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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가람

[건가람] 원수는 개강총회에서 만난다

아, 젠장.. 가람이 속으로 작게 욕을 흘렸다. 흥겨워야 할 술자리였지만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가람의 눈은 계속해서 저쪽 구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흘끗흘끗 흝고 있었다. 이게 바로 진짜 존망했다는 걸까? 가람이 식은땀을 흘렸다. 재수가 없으려도 이렇게 없을수가. 가람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덟시밖에 안 되었다. 게다가 신입생주제에 지금 간다고 일어나면 오히려 제 쪽으로 시선을 모이게 하는 꼴이다. 가람이 침을 삼켰다. 앞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의 뿌연 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 연기 뒤에 내 얼굴이 가려질려나? 술잔들이 쨍 하고 부딪혔다. 자, 건배! 가람이 소주를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주가 알코올인지 느끼지도 못할 만큼 지금 정신은 반쯤 나가있었다.


후배, 뭐 각오같은 거 없어? 저는 이번 학기에 꼭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안경잽이가 그렇게 소리쳤다. 짜식, 충실하구먼. 그럼 너는? 대화들을 흘려들으며 가람이 앞에 놓여있는 물잔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죽고 싶다...그 때로 돌아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다. 가람이 멍하게 생각했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을까.... 가람이 땅을 파고 기어들어갔다. 무덤을 깊게 판 가람이 스스로 흙을 덮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든 희망에 가람이 삽을 내던졌다. 아니야! 저 자식은 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는 한달 전이었는데다가, 저새끼는 술도 취해있었으니까. 필름이 끊겼을지도 몰라. 가람이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맞아, 필름이 끊겼을 거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길바닥에 나자빠진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약간 가벼워진 마음에 가람이 젓가락을 들고 부대찌개에서 햄을 집어올렸다. 아, 맛있다. 가람이 입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그 쪽을 다시 곁눈질했다. 들어올때도 건성으로 인사만 받는 듯 하더니 아예 저쪽에만 앉아서 다른곳에는 눈길도 안 주고 아는사람들끼리만 놀고 있었다. 그래, 괜찮을거야. 어차피 학부생은 200명쯤 되니까 마주칠 일은 별로 없겠지. 오늘만 조심하고 다음부터는 피해다니면 되는 일이다. 첫 대학생활을 벌써부터 망칠수는 없다. 가람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백건이 뚱한 얼굴로 내미는 소주잔을 받아들였다. 야 빽건 왠일이야? 개총에 다 나오고. 너 귀찮다고 이런거 안나왔잖아. 은찬이 신기하다는 듯 얼굴을 들이댔다. 아 못생긴 얼굴 치워라. 백건이 단호하게 은찬의 얼굴을 밀어냈다. 새끼가...은찬이 웃으며 이를 갈았다. 백건이 소주를 원샷하고는 빈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그냥, 심심해서."


 

니가 심심하다고 여기에 나올 인간이야? 이 시각에 클럽에 안 가면 다행이지. 은찬이 못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백건이 은찬을 노려보았다. 맘대로 해, 믿든지 말든지. 됐고 너 잔 안 비우냐? 백건이 아직 남아있는 은찬의 소주잔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마시려고 했어, 어휴 눈알 빠지겠다. 은찬이 잔을 비웠다. 그리고 탁자에 탕. 됐지? 은찬이 싱글싱글 웃었다. 은찬 선배! 저 쪽에서 은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은찬이 어어?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귀여운 여학생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건이 그런 은찬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거저거 또 저렇게 홀랑 넘어가지. 주은찬의 호구같은 면은 잘 알고 있지만 매번 볼때마다 감탄하고 있었다. 은찬이 백건에게 말했다. 야, 난 저기로 간다. 너도 여기만 있지 말고 후배들이랑 좀 친해지고 그래. 너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애들 많을걸? 저기 저 여자애도 너한테 관심있어하는 거 같은데? 백건이 눈을 돌렸다. 짧은 검은색머리를 한 여자. 제 타입은 아니다. 화장만 진하게 해선. 백건이 혀를 쯧 찼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은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하여튼.


한동안 동기들끼리 술잔을 주고받던 백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나 재미없네, 술마저 없었으면 진작에 나갔을 것이다. 그냥 온 김에 술이나 거덜내고 가야지. 백건이 쓸데없는 다짐을 하고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다 끝낸 후 백건이 잠깐 화장실 문턱에 기댄 채 와글와글대는 술집 안을 쳐다보았다. 징그럽게 많네, 개미떼 같다. 백건이 눈으로 슥 흝었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저 쪽에서 신나서 입을 털고 있는 주은찬이 보일 뿐. 옆에 앉아있는 여자애들은 선배님 최고라며 은근슬쩍 제 술잔을 떠넘기고 있었다. 백건이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폈다. 아, 갈까? 잠시 고민했다. 아직 아홉시밖에 안 됐는데. 그래, 열시에 가자. 백건이 입을 쩝 다셨다. 그리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어? 백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딘가 익숙한 뒤통수인데.... 왜 뒤통수가 낯익지? 백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건이 그 자리에서 선 채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흐으으음, 백건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한편, 그런 백건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장본인인 청가람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열렬한 시선에 뒤통수가 뚫려버릴 것 같다.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백건이 제발 절 보지 말고 지나치길 바라면서 가람은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평소에 그렇게도 찾지 않던 하느님과 부처님, 심지어 알라신까지 찾으면서. 제발요, 저새끼가 그냥 지나가면 저 지금부터 교회도 다니고 성당도 다니고 절도 다닐게요... 하지만 가람의 그런 간절한 심정을 하늘은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야, 거기."

 

 

익숙한 음성에 가람은 몸을 움찔했다. 역시, 20년동안 제 의견을 묵사발냈던 신이라는 작자는 이번에도! 또!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가람은 뻗딩길 수 있을 때까지 뻗딩겨보기로 했다. 백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쭈, 선배가 부르는데 뒤도 안 돌아봐? 백건이 손을 뻗어 뒤통수 주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경직된 어깨, 백건이 물었다. 너, 나 좀 봐봐. 뒤통수의 주인이 고개를 반만 돌려 옆모습만을 보여주었다. 흐음? 백건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드는데.....그런데 언젠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가람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보던 백건이 손을 놓고 떠났다. 휴우, 가람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들키는 줄 알았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제 앞에 털썩 앉는 백건의 모습에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 친근한 후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백건이 씨익 웃으며 가람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것도 완전히 표면장력, 술잔에 가득 찬 꼴이었다. 가람이 백건이 내민 소주잔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신은 뒤졌어.

사실, 청가람과 백건은 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달 전, 1월 말쯤이었다.

 

 


야 이제 우리도 성인이다?! 클럽도 갈 수 있는 거거든? 가자가자! 친구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고, 어어어? 하는 사이에 눈을 떠보니 가람은 왁자지껄한 클럽 안에 있었다. 아 여기는 어디지. 가람이 번쩍번쩍한 스테이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명들에 부대끼는 사람들에 소리들에. 가람은 정신줄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걸까? 가람의 시선이 저쪽에서 미친듯이 여자랑 부대끼며 춤을 추고 있는 친구들을 향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여기있는 사람들 중 자신만 멀쩡한가 보다. 가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떡하지, 그냥 가도 되려나. 자리에는 아까 여자들을 헌팅하고 다 못 마신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거절하다 보니, 여자들의 관심이 가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가람의 친구들에게로 향했고 그래서 지금 청가람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참이었다.


가람이 빈 술잔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렇게 다 맛있게 마시던데. 가람이 남은 술을 잔에 쪼르르 따랐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맛없는 걸 사람들은 왜 마시는지 몰라. 가람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1시 31분. 가람이 다시 친구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은 아웃 오브 안중인 듯했다. 개새끼들....가람이 이를 갈았다. 몰라, 저 구미호에게 간을 쏙 빼먹히든지 말던지. 난 갈거야.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겨우 문을 여니 탁 트인 공기에 살 것 같았다.


가람이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갔다. ...러, 넌 좀 꺼져.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계단이 올라갈수록 점점 커졌다. 누가 싸우나?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완전하게 지상으로 나오자 클럽의 뜨거운 열기와는 다르게 확 식은 밤공기에 몸이 얼어붙었다. 으, 추워. 당장은 안 되겠다. 가람이 몇 걸음 도로 내려갔다. 아, 진짜 짜증나게 구네! 좀 전보다 더 큰 목소리가 귀에 틀어박혔다. 뭐지? 호기심이 동한 가람이 고개를 빼고 싸움이 난 곳을 지켜보았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비켜. 누굴 호구로 알아!? 여자가 뭐라뭐라 항변했다. 하지만 남자는 듣기 싫다는 듯 담배를 빼내물었다. 후우, 한 모금 피운 남자가 연기를 공기중으로 날려보내고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씨발년아, 진짜 한 대 치기 전에 꺼져라.'

 


남자의 그 말에 여자가 움찔하더니 당장 내뺐다. 가람이 도망가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남자쪽을 바라보았다. 쯧, 남자가 혀를 차고선 비틀거렸다. 어? 가람이 눈을 끔벅였다. 비틀거리는 게 아무래도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아까 화낼때는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았는데. 비틀, 비틀.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남자가 움직이는 꼴을 보던 가람이 몸을 빼서 남자쪽으로 다가갔다. 좀 오지랖이지만, 저렇게 그냥 두면 저기 보이는 등 나간 가로등에 제대로 꼴아박을 참이었다. 가람이 뛰어가서 막 가로등에 박으려고 하는 남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 뭐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선이 가람을 향했다. 멍한 와중에도 빛나는 노란 눈동자. 거기, 가로등이거든요. 남자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기에 가람은 존댓말을 썼다. 가람의 말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곤 다시 가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근데 넌 뭐야?'

'지나가는 행인1입니다. 소리가 너무 커서요.'

'들었냐?'



가람의 말에 남자가 킥킥거렸다. 그리고 담배를 떨어뜨리고 발로 비벼 껐다. 그거 진짜 어마어마한 썅년이야, 어디서 감히 날 뜯어먹으려고 들어? 남자가 푸 하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윽, 가람이 코를 막았다. 진한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섞여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가람의 표정을 알아챈 건지 남자가 고개를 내려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어허라? 남자가 코를 막고 있는 가람의 손을 떼어냈다. 아씨, 뭐야. 가람이 당황해서 손에 힘을 주었으나 남자의 힘은 생각보다 셌다. 기어이 가람의 손을 붙잡고 코를 막지 못하게 한 남자가 후 하고 길게 다시 숨을 내뱉었다. 가람의 얼굴이 자동적으로 일그러졌다. 뭐하는 거야! 예의없는 남자의 행동에 화가 난 가람이 인상을 잔뜩 쓰고 화를 냈다. 이런 개념없는 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가로등에 꼴아박건 길바닥에 대자로 드러눕건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는 거였는데. 그런 가람의 심경은 모르는 남자가 구겨진 가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야, 너 근데 인상쓰니까 예쁘다?'



남자가 덧붙였다. 아까 그 년은 인상쓰니까 되게 못생겼던데, 뭐 원래도 못생겼긴 했지만. 뭐라는 개소리야. 가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가람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토끼같이 동그랗고 붉은 눈. 꽤나 취향인 얼굴이다. 어....괜찮은데....? 아 이 새끼는 뭐하는 인간이야, 처음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들이대다니. 미친놈인걸까? 속에서 남자의 이미지는 한참이나 깎아져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람의 화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너 나랑 모텔갈래?'



남자가 씨익 웃었다. 돈은 내가 낼게, 어때? 아니면 술 더 마시고 갈까?

술 더 마시긴, 내 발이나 먹으시지. 가람이 퍽 남자의 명치를 발로 깠다. 비틀거리며 떨어지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한번 더 갈기자 남자가 맥없이 땅으로 철버덕 쓰러졌다. 후우우우, 가람이 분노게이지가 가득 찬 속을 다스렸다. 아 진짜 화나서 죽는 줄 알았네. 가로등에 꼴아박으려고 한 걸 도와줬더니, 술냄새랑 담배냄새 푹푹 풍기고 뭐? 모텔을 같이 가? 돌았나.


결과적으로 가로등에 꼴아박는것을 방치하는 것보다 더한 걸 한 셈이지만 가람은 후회하지 않았다. 저런 놈은 맞아도 싸. 가람이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꺾고서는 돌아섰다. 그러다 잠시 멈칫했다. ...이 날씨에 그냥 두고가면 동사할지도 모르는데.... 가람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맞아도 싼 놈이지만 아직 죽어도 싼 놈은 아니지. 가람이 기절한 남자의 옆으로 가서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남들같지 않게 잠금을 걸지 않아서 화면을 쉽게 켤 수 있었다. 가람이 최근통화목록으로 들어가서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두어 번 신호가 간 후, 일방적으로 끊겼다. 어? 가람이 당황했다. 잠시 멍청하게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가람이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다시 두어 번 신호가 간 후,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연결이 이어졌다.

 

- 미친놈아...이 시각에 왠 전화질이야...


지치고 한숨소리가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가람이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어, 이 핸드폰 주인과 친구분이신가요?'

-...백건이 아닌데.. 누구세요?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이 핸드폰의 주인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어서요. 혹시....'

- 아, 또 지랄이네 이 새끼...



핸드폰 너머로 욕지거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굳이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얼어죽어도 상관없긴 하지만....거기가 어디죠? 가람이 위치를 읊었다. 알았다는 말이 들리고 곧 전화가 끊겼다. 가람이 끊어진 핸드폰을 보다가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아. 백건? 참 지랄맞은 이름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거기까지가 백건과의 첫만남이었다. 그때 그렇게 제대로 못 걸을정도로 취해있었기에 저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희망을 걸었었는데. 아닌가 보다. 확실히... 나같아도 기억하겠지. 악연은 얽히고 얽힌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가람은 울고 싶어졌다. 제 앞에서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백건때문에 더 죽을 맛이었다. 그런 미친놈이, 제 선배였다니. 죽고 싶다.... 가람이 아련하게 생각했다.

흐응, 백건이 턱을 괴었다. 얼굴을 똑바로 보니 다 기억났다. 그 때 보았던 녀석이라는 걸. 한동안 죽여버린다고 길길이 뛰었는데 여기서 마주치게 되다니. 아직도 그때 맞았던 명치랑 뒤통수가 얼얼한 것 같았다. 백건이 가람에게 가득 찬 소주잔을 내밀었다.

 

 

"발차기가 화끈한 후배. 이름이 뭐냐?"

"...청가람입니다."

"청가람? 그래, 청가람."

 

 

백건이 두어번 이름을 되뇌이고서는 술을 건네주었다. 가람이 백건에게서 소주잔을 받아들었다. 백건이 자연스럽게 제 소주잔을 내밀었다. 가람은 다시 고민했다. 여기서 미친척하고 병을 들어 저 놈의 머리를 내리칠까? 강한 충격을 받아 그 기억을 잊게 될 수도 있다. 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가람은 곧 포기했다. 진짜 머리통을 내리쳐서 기억을 잊게 하는거에 성공한다고 해 봤자, 새로운 역사서를 다시 쓰는 꼴이다. 아마 제목은 '신입생 주제에 선배의 머리통을 깨부순 미친놈'이 되지 않을까. 가람이 백건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꼴꼴꼴, 3분의 2정도 따른 후 가람이 병을 내려놓가 백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게 뭐야? 백건이 잔으로 탁자를 가볍게 쳤다. 선배를 우습게 보는 거냐? 더 따라. 더? 가람이 조금 더 따랐다. 더. 가람이 조금 더 따랐다. 더. 술잔이 백건이 건네준 제 술잔과 같이 가득 찼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백건이 잔을 들어올렸다.

 

 

"청가람, 원샷이다."

 

 

백건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가람도 할 수 없이 백건을 따라 잔을 들이켰다. 아까는 온통 신경이 쏠려 무슨 맛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다. 썼다, 목이 타는것같이 너무도 썼다. 가람이 얼굴을 찡그린 채 잔을 내려놓았다. 백건이 그런 가람의 표정을 감상했다. 찡그려진 표정, 아 진짜 예쁘네. 백건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선언했다.

 

 

"너, 나 이길 때까지, 집에 못 가." 

 

*

 

제 어깨를 툭 치는 누군가의 손에 은찬이 고개를 돌렸다. 어? 명훈이냐. 왜? 여자후배들과 즐겁고 단란한 시간을 즐기던 은찬이 동기의 손에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백건이 한 후배의 앞에 주구장창 앉아서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천하의 백건이 어쩐일로 먼저 후배에게 다가갔대냐? 은찬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동기가 은찬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새끼가 후배 골로 보내려고 작정한 것 같다고! 응? 은찬이 되물었다. 저거 봐봐, 미친놈이야. 아까 저놈 옆에있던 후배에게 들었는데, 술로 절 이길 때까지 안보내주겠대. 그러면 죽는거 아니냐고. 백건 주량 쩔잖아. 우리 귀여운 후배를 벌써부터 죽일 순 없다구우우! 동기가 절규했다. 은찬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술로 배틀뜨고 있다고? 신입생이랑? 은찬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나 좀 나갈게.

 

죽을 것 같다. 가람이 이를 악물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깡소주만 마셔대서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안주라도 먹을라치면 어허, 어디서 안주야? 이러는 백건 때문에 한입도 먹질 못했다. 오로지 마시는 건 소주와 죽여버리고싶다는 감정 뿐. 한계다. 더 이상 마시면 토한다, 그건 백퍼 확신한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는 다르게 백건의 모습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저랑 똑같이, 아니 더 많이 마셨는데 왜 저렇게 멀쩡하지. 가람이 이마를 싸맸다. 후으...... 골골거리는 가람을 보고 백건이 물었다. 

 

 

"힘들어?"

"네..."

"그래? 힘들어해. 어차피 이길때까지 안 보내줄거야."

 

 

백건이 소주잔을 집어들며 멀쩡하게 대답했다. 미친놈아, 그만해! 가람은 진심으로 울고싶어졌다. 잔 들어, 아니면 내가 입에 부어넣어줄까? 그 말에 가람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잔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조그만 잔이 왜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천근만근 쇳덩이처럼 느껴진다. 가람이 소주에 입을 댔을 때였다. 저쪽에 앉아있던 주은찬이 동기의 제보를 받고 다이다이를 뜨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은찬이 새하얗게 질린 가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채 넘기지 못한 소주가 가람의 입 옆으로 흘러내렸다. 저거 괜찮을까, 은찬이 걱정하는 사이 겨우 마신 가람이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쯧, 저렇게 약해서야."

 

 

백건이 황급히 자리를 떠난 가람을 보고 혀를 찼다. 은찬은 그런 백건을 매정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니가 인간이야? 백건이 뭐냐는 듯한 얼굴로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줄줄이 쌓여있는 초록색 병들에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악감정이 있길래 애를 죽이려 들어? 백건이 안들린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둘이 얼마나 죽기살기로 술을 마셨으면 이렇게 옆이 텅텅 비었겠냐. 백건이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옆으로 두 칸 정도는 비어 있었다. 슬금슬금 피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청가람이 술을 마시는지 아닌지만 잡아내느라 바빴으니까. 그렇게까지 했으면, 가서 애 등 좀 두드려주지 그래? 내가 왜? 백건이 되물었다. 은찬이 어깨를 들썩이고서는 대신 가람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침, 들어가니 막 칸막이 칸에서 청가람이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가람이 세면대로 비척비척 걸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은찬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가람을 쳐다보았다. 양 손으로 물을 받아 입안을 몇 번 헹군 가람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거울에 박았다.

 

 

"괜찮아?"

"아니요...죽을 것 같아요."

 

 

가람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선배, 왜 저렇게 주량이 세요? 은찬이 턱을 긁적였다. 좀 많이 괴물이긴 하지...지금까지 취한 거 본게 딱 두번뿐이니까 말이야. 술독이야, 술독. 은찬의 말에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나가기 싫다...지금 안그래도 토까지 하고와서 속이 뒤집어질것 같은데 백건이라는 놈은 안봐주고 마시라고 할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까지 된 거야? 은찬의 물음에 가람은 그저 말을 삼켰다. 으음, 은찬이 가람의 어깨를 톡톡 쳤다. 너무 속이 안좋으면, 집에 갈래? 구원의 말에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내가 데려다줄게. 그렇게 취해서야 잘 걷지도 못할 것 같은걸. 은찬의 말에 가람이 눈물을 글썽였다. 은찬의 뒤에서 성스러운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선배....감사해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가람의 인사에 은찬이 당황했다. 얘가 진짜 힘든가 보다. 가람이 거울에서 이마를 뗐다. 그리고 걸음을 딛는 다음 순간 비틀거렸다. 어이쿠, 은찬이 땅으로 쓰러지려는 가람을 빠르게 부축했다. 진짜 심각한데, 집까지 갈 수 있겠어? 가람이 은찬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을 나갔다. 아 뒤질것같다.... 비명횡사하면 다 백건 새끼 때문이야.

 

저건 또 뭐야? 청가람이 언제나오나 기다리면서 한두잔을 더 들이킨 백건이 은찬의 손에 딸려나오는 가람을 보고 인상을 썼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면서 실려나오는 꼴을 보니 조금 불쌍하기도 한데, 그보다는 감히 저를 상대하던도중 주은찬에게 매달려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백건의 손등에 핏줄이 빡 하고 섰다. 백건이 은찬의 손에 실려오는 가람을 웃기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야, 청가람. 누가 벌써 뻗으래? 은찬이 가람 대신 항변했다. 그만해 빽건, 이러다가 애 진짜 죽겠어. 집에 보내. 집? 지입? 백건이 허 하고 웃었다. 아니, 안 돼. 절대 못 가. 백건이 은찬의 손에서 가람을 뺏어들었다.

 

 

"잠시 바람쐬고 온다."

 

 

은찬에게 그렇게 통보한 후 백건은 가람을 질질 끌고 술집을 나갔다.

 

*

 

백건이 가람을 끌고 한적한 학교앞을 걸었다. 가람은 힘없이 백건이 끄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백건이 아무 말 없는 가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좀 심했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백건이 걷다가 편의점 앞에 멈춰섰다. 그 앞에 있는 의자에 가람을 대충 앉혀놓은 백건이 편의점 안으로 쏙 들어갔다. 

땅이 훌라춤을 춘다. 가람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생각했다. 앉아있는 의자가 바이킹처럼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다, 이런 기분 더럽네..... 후 하고 숨을 뱉자 제가 마신 술냄새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으, 가람이 눈을 감았다. 그 때, 재차 백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

"입 벌려."

 

 

가람이 정신없는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차가운 게 입안으로 들어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람이 황급히 입에 물려있는 아이스크림을 뺐다. 약간 녹은 연두색 아이스크림. 백건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거 먹어. 백건도 옆에 털썩 앉아서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곤 한 입 베어물었다. 역시 메로나가 짱이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람이 백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람의 시선에 백건이 다시 말했다. 그거 먹으라니까? 녹는다. 가람이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에 넣었다. 입속에 퍼지는 메론맛. 죽을듯한 소주의 파티가 벌어진 후에 오는 아이스크림의 맛은 정말 천국이었다. 가람이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살 것 같다. 옆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베어물면서 뭐라뭐라 말하는 백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깼냐? 빨리 먹어. 그거만 다 먹으면 다시 안으로 들어갈거니깐. 아직 다 안 끝났다. 가람이 아이스크림을 쳐다보곤 한 입 먹었다. 먹는 와중에도 백건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반복된다. 아직 다 안끝났다....안 끝났다아아아아... 울컥, 가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람이 메로나를 뺐다.

 

 

"진짜....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앙?"

"나쁜 자식...병주고 약주고...나쁜 새끼..."

 

 

가람이 코를 훌쩍였다. 지금 짜증나서 선배고 뭐고 존댓말이고 뭐고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백건이 그런 가람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불쌍해서 친히 아이스크림까지 사줬더니만 뭐라는거야? 백건이 허 혀를 차며 가람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고 자신쪽으로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웅얼대는 청가람 때문에 무슨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야, 말하려면 똑바로 고개나 들고 말해. 고개 들어. 절레절레, 무시하는 청가람의 행동에 화가 치민 백건이 강제로 청가람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본 순간, 할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닭똥같은 눈물을 뚜욱뚝 떨어뜨리고 있는 청가람.

 

 

"솔찌키 너더 양심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지..."

 

 

씨이, 가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먼저 저질스러운 말을 뱉었으면서 지는 잘못 하나도 없는 줄 알고...그 때 그냥 가려구 그러다가 얼어죽을까봐 불쌍해서 연락까지 해놨는데. 가람이 눈물을 훔쳤다. 오징어, 말미자알, 자갈치같은 자식.... 온갖 바다생물들을 나열하던 가람이 다 못 먹은 아이스크림을 내던지고 백건의 멱살을 붙들었다. 나 더 못 마셔, 억지로 마시게 한다면 네 앞에다 대고 토할 거햐.. 그만해 미친새키야.

가람이 눈물을 떨구며 징징거렸다. 울분을 토해내던 가람의 손아귀 힘이 점점 풀려지더니 고개도 같이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건은 그런 청가람의 주정을 말없이 듣고있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청가람. 자냐? 가람이 백건의 가슴팍에 얼굴을 떨군 채 중얼중얼댔다. 이놈 참 어이없는 자식일세. 백건이 내려다보이는 가람의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때도 그렇고 지금 봤을때도 그렇고, 호기심을 끄는 녀석이다. 뒤통수값은 이정도로 쳐둘까? 백건이 청가람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통통, 반응이 없자 백건이 가람의 상체를 떼어냈다.

 

 

"야, 알았어. 봐준다."

"구라...."

"거짓말 아니라니까. 굳이 더 마시고 싶다면 안 말려."

 

 

가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족해......개족까튼 자식. 점점 너 말이 심해진다? 백건이 가람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하지마. 싫은데? 백건이 깐족거리며 가람의 코끝을 한번 더 퉁겼다. 가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말라거. 다시 한번 더. 가람이 백건의 손을 잡아챘다. 히바...하지말랬자나! 백건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제 딴에는 화를 내고있는 모양이었는데 술기운이 완전히 돌고있는지 혀가 다 꼬이고 눈은 다 풀린 채였다. 게다가 울어서 눈가가 빨개진 게 더.... 더? 백건이 눈을 깜박였다. 더....귀여웠다.

 

 

"미친.."

 

 

백건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미쳤나? 이렇게 술주정하는 게 귀엽다고? 그것도 감히 제 앞에서 반말과 욕을 찍찍 쓰는 놈을? 백건이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가람을 다시 바라보았다. 백건이 생각했다. 진짜 귀여워 미치겠네, 씨발.

 

백건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백건의 심정을 알 리 없는 가람은 말없는 상대에 슬금슬금 화가 나고 있었다. 집에 갈거야, 집에 갈거라고. 보내줘, 보내줘어. 자? 일어나. 나 업고 가. 나 못 걸어, 나 집까지 데려다 줘. 가람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내뱉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제 얼굴을 밀어내는 백건의 큰 손 뿐이었다. 아 좀 조용히 해. 이를 갈며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 가람의 눈에서 다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럽고 슬펐다. 내가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이렇게 힘든 게 누구 때문인데! 선배면 다야? 몇 년 빨리 학교 들어갔으면 다냐구! 진짜 싫어, 진짜 실타구.... 옹알대는 목소리에 백건이 생각했다. 아 더이상 못 참겠다. 백건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가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청가람. 그만 징징대라. 왠지 모르게 더 서늘한 목소리에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죽여버리겠다는 걸까? 내가 너무 막나갔나? 빙빙거리는 머릿속으로 생각해봤으나 잘 모르겠다. 그냥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주잔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확 먹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

 

 

씨발, 백건이 가람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건이 주변을 바쁘게 빙빙 돌아다녔다. 존나 귀여워, 징징거리는 것도 귀엽다. 저걸 그냥 먹어 말어? 원래 배고플 때 먹어야지 더 맛있는 법인데. 백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치겠네... 백건이 가람이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뭐야, 백건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색색, 일정하게 숨을 내뱉으며 어느 새 청가람은 잠들어 있었다. 백건이 쭈그리고 앉아서 가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냐? 백건이 비죽 튀어나온 가람의 더듬이를 잡아당겼다. 가람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 마.. 말미잘아.. 백건이 푸시식 웃고 머리칼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뚜르르,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백건이 입을 열었다. 청가람이 뻗어서, 나 먼저 자취방에 들어간다. 뭐? 당연히 같이 들어가는 거지. 내가 얠 왜 버려? 시끄럽네 주은찬. 끊는다. 아, 그리고 가방은 니가 좀 챙겨놔.

 

백건이 통화종료를 눌렀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은 백건이 가람을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차, 근데 이녀석 생각보다 되게 가볍네. 안 먹고 사나? 백건이 자신의 자취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청가람, 내 비싼 등에 탑승한 값을 갚아야 할거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 제 등에 업혀있는 청가람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아주, 재밌는 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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