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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백] Beta

* 르씨님께 드린 현백!

* 알파 현우 x 베타 백건입니다 근데 별 상관은 없는듯

 

 

 

 

"왜 그래요?"


현우가 백건의 표정을 살피며 한 말이었다. 문득 던져진 말에 백건이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냐는 말이에요. 이어진 말에도 백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려는 행동에 현우가 어깨를 들썩 해보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내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신경을 끈 현우는 앞에 놓은 음료를 들이켰다. 째각째각, 움직이는 시계를 보던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건이 어디 가, 하고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미리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약혼자 문제 때문에, 가봐야겠어요."

"그래."

"데려다줄까요?"

 

같은 길이면 태워줄 수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부탁하지 않아도 현우가 그렇게 물어왔다. 절레절레, 백건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차 있어. 그래요? 그럼. 두 번이나 반복할 생각은 없었는지 현우가 레스토랑 안을 빠져나갔다. 흐릿한 검은 잔상을 보며 백건은 제 앞에 놓인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번에 들이켰다. 왠지 모르게 목이 탔다.






Beta

현우 X 백건


1.


현우와 백건의 집안은 둘 다, 우성알파 집안이었다. 날 때부터 권력을 쥐고 태어난 기득권층. 현우는 우성알파였고, 백건도 당연히 우성알파여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백건은 베타로 판정이 났다. 백건이 베타라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집안에서는 아무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메가가 아니었으니 되었지, 뭐. 아버지가 이를 닦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사실 백건이 오메가로 판정이 났었더라도 가족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백건의 집안은 우성알파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성향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통의 알파 집안과는 다른 아주 자유롭고 방목적인 분위기, 백건은 그런 환경 안에서 자라났다.

그에 비해 현우의 집안은 자식들의 성향에 신경을 엄청나게 많이 쓰는 편이었다. 알파로 판정받지 못한 자식들은 집안에서 퇴출되거나 권력을 위한 도구로만 전락했다. 물론 알파인 자식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베타이거나 오메가인 자식들보다는 조금 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줄 뿐, 어차피 다 집안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사방이 꽉 틀어막힌, 감시하는 눈동자들이 어디를 가던지 따라다니는 그런 숨 막히는 집안. 현우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눈초리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현우는 자연스럽게 눈치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치열한 경쟁 속, 관심과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라나야 할 시기에 숨이 막히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백건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우는 예전에 말라비틀어졌을지도 몰랐다.


알파 집안들끼리의 교류회. 부모님과 누나 옆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어른들끼리의 말이 이어지자 백건은 그 속을 잠시 빠져나왔다. 어릴때부터 줄곧 보아왔던 풍경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아 자유롭게 주변을 돌아다녔다. 홀을 지나,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 혼자 돌아다니던 백건은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현우를 발견했다. 얼굴 표정에서부터 묻어나오는 압박감과 피곤함.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를 발견한 건 오랜만이라 호기심이 생긴 백건은 그에게 다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첫번째로 다가와준 타인의 손, 백건의 호의를 현우는 받아들였다.

'저 쪽으로 가볼래?'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우는 마침내 그 손을 잡고 백건의 뒤를 걸었다. 어차피 제 집은 자신이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무슨 행동을 하던지 눈도 주지 않기에 상관없었기도 했고. 흔한 통성명 없이, 몇 년을 알고 지냈던것 마냥 자유롭게 끌고다니는 백건은 현우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둘이 다닌 후, 백건의 이름을 알았던 것도 백건의 부모님이 그를 찾아 아래층까지 내려온 것 때문이었다. ​현우에게 있어서는 백건이 첫 친구였다. 백건에게 있어서도 현우 또한,

어린 시절부터 모든 시간을 공유해온 그런 존재였다.


2.


아무래도 나이가 차니 혼담이 오가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백건의 부모님은 네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 해라, 라는 주의였으므로 미리 그들의 선에서 거절해 주었다. 물론 매번 거절하는 게 힘든 적도 있어서 몇 번 여자를 만나본 적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런 편이었다. 백건은 혼사 건에서 자유로웠으므로 현우가 집안 혼담 건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겪었던 혼사와는 180도 다를 것이 분명했기에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시점부터 알게 모르게 눈 밑에 피곤함을 달고 다니는 현우의 모습을 안 순간 백건은 그런 생각을 했다.

현우는 여지껏 여자를 몇 번이고 만나왔다. 우성알파 집안의 우성알파 여자. 알파와 알파끼리의 결합은 집안들 사이의 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양가의 결합으로 각 가문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정략결혼,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현우는 더 힘들어했다. 그러나 가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자 쪽에서 매번 현우를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혼사 건으로 바빠지는 시기에는 만날 틈이 거의 나질 않아서 두 사람은 대게 전화로 대화를 했다. 시덥잖은 이야기 뿐이었지만 딱히 용건이 없는 전화라 더 편안하기도 했다. 용건이 없어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상대. 그 날도 백건은 핸드폰 액정에 뜬 현우의 이름을 보고 아무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두 다리를 쭉 뻗고 흔들의자 앉아서 팔만을 쭉 뻗어 어 왜, 하고 전화를 받았던 백건은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흔들던 몸을 멈추었다.

"뭔데?"

- 아무래도 이번에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몇 마디에서 혼사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짐작한 백건이 그렇게 물었다. 평소와 같은 현우의 목소리였지만, 다른 느낌을 받은 이유에는, 그 뒤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과 다르게 결혼 날짜가 잡혔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한 달 뒤로 잡혔어요. 확정난거죠.



무덤덤한 현우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넘어왔다. 백건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하게 손끝으로 팔걸이를 일정하게 두드리던 동작을 멈췄다. 갑작스럽네. 이번에 여자쪽이 싫다고 하지 않았나 봐?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백건이 농담조로 그렇게 말하자 현우도 맞받아치며 웃었다. 그러게요, 서로의 이익이 맞았나 봐요. 그 여자도 나와 같은 입장인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보면,

- 불쌍한 결혼이죠.


불쌍하다, 라는 말은 분명 여자를 지칭하는 게 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백건은 왠지 그 불쌍하다고 하는 게 현우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백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핸드폰 너머로는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도 구기고 있나, 자기도 짜증나긴 하겠지. 한 손으로는 여전히 전화를 받은 채 냉장고를 열고 마실것을 찾고 있을 때, 현우의 말이 들려왔다. 


- 그전에, 한번 만나요.

"그래. 그 다음에 만날 때는 유부남이 되어있는 건가?"

- 그렇게 되겠죠.


간결한 대답에 백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냉장고를 닫았다. 그래 너도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 시간 나면 연락해. 난 어제 프로젝트 끝나서 당분간은 시간 널널하니까. 백건의 유한 대답에 현우가 긍정의 답을 표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놓고 백건은 물잔에 물을 따랐다. 시원한 물을 들이키며 조금 전에 들었던 현우의 결혼 소식을 다시금 생각했다. 몇 번이고 여자를 만났지만 몇 번이고 퇴짜를 맞은 현우가 결국에는 결혼을 하게 되다니.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백건은 현우에게서 통 연락을 받지 못했다. 자신이 먼저 보기로 해놓고 연락이 없는 건 무슨 심보냐 하고 트집을 잡고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결혼이라는 게 그만큼 복잡한 것을 누나의 일로 이미 알고 있었길래 백건은 굳이 먼저 연락을 하려 들지 않았다. 여유로워지면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겠지. 그리고 그저께 드디어 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단히 식사나 하면서 얼굴이나 보자는 말이었다. 저녁 8시.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보던 백건은 화면 옆에 떠 있는 날짜를 보고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


한 달 후에 잡혔다는 결혼식도 이제는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확인해보니 정말 그랬다. 갑자기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이유없이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고 갑갑했다. 짜증이 치밀어서 백건은 손에 집히는 여러종의 차키중에 아무거나 들고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계속 집안에만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운전하다 보면 기분도 나아지겠지.


3.


식사는 평소에서 약간 업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버린 듯한 현우의 얼굴 덕분에 백건의 기분 또한 덩달아 올라갔기 때문이다. 원체 말이 그다지 없는 현우였으나 오늘따라는 말이 좀 많았다. 이렇게 있으니 좋네요, 숨통이 트이는 것 같고. 다음 단계의 요리를 내놓으려 직원이 서빙을 할 때 현우가 한 말이었다. 그동안 많이 굶었어요? 누가. 내가? 날아오는 질문에 백건이 받아쳤다. 현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히 백건 당신이죠. 놀리는 어조에 백건은 인상을 구기며 입 다물어, 라고 말했다. 하하, 현우가 가볍게 웃었다. 그 사이에 메인 디쉬가 나왔다. 적당히 익은 고기를 뒤적거리는 현우를 보고 백건이 입을 열었다.


"뭐해, 안 먹어?"

"그냥, 요새 기름진 걸 너무 많이 먹어서."

"분에 넘친 소리네."

"그래요?"

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물우물,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기를 해치운 백건을 보고 현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이 식사하는 사이에 속도좀 지켜줘야 되는거 아니에요? 우리가 언제부터 그딴 매너가 있었어? 너야말로 어이없는 소리 한다, 라는 말투로 받아치자 현우가 하긴,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에도 기름진 고기를 먹는 건 별로인건 사실이었는지 그저 나이프로 고기를 푹푹 찌를 뿐이었다. 저거 고기 낭비하네, 백건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화가 멈추고 조용함이 이어졌다. 계속 이어진 대화속에 간만에 찾아온 고요함이 나쁘진 않아, 천천히 와인을 마시고 보니 현우가 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묻었냐?"

"그건 아닌데."

백건이 몸을 살짝 뒤로 뉘였다.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는 현우의 눈이 유난히 검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피식 웃는다. 좋댄다. 백건이 비꼬았다. 현우가 한 손으로 얼굴을 슥 흝어내리곤 밖을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건물들이, 야경이 좋았다. 다 끝난거지? 두서없이 나온 말에도 재빠르게 알아들은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식장에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끝이에요. 남은 것도 없고, 해야할 것도... 현우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다시 돌려 백건을 바라본다.


"좋아해요?"

​"뭐를?"

주어가 없는 물음에 백건이 되물었다. 침묵. 그러는 사이에 접시가 치워졌다. 빈 테이블에 의문과 망설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현우가 입을 달싹였다. 짐작가는 게 아무것도 없는 백건은 현우가 설명을 덧붙이길 기다렸다. 여기 식사를 좋아한다고? 아니면 저런 야경을 좋아하냐고? 그것도 아니면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냐고? 생각을 하는 동안 현우의 입에서 같은 말이 떨어졌다.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대체 뭘?"

"당신이 절."

 

​툭, 하고 현우의 입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허? 지금 저 입에서 무슨 말을 뱉은 건지 이해하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백건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이에 현우는 빤히 백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뭐라고 말한 건지 깨달은 백건이 비웃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갑자기 내뱉은 소리는 지금 이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뜬금없이 나온 말이었다. 현우 장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너 머리가 돌았구나? 집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면 안 되지. 백건이 덤덤하게 받아쳤다. 망설임없이 떨어지는 말에 현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그리고 곧, 말을 바꾸었다.

 

"내가 당신을,"

현우의 입에서 무거운 말이 뱉어졌다. 펑, 하고 폭탄이 터졌다.

"좋아한다고."


그 말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가 레스토랑을 나갔다. 폭풍이 쓸고간 자리에는 백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4.


그렇게 현우가 먼저 자리를 뜬 후, 백건은 후식까지 먹고 덤덤히 레스토랑을 나갔다.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평온했다. 그냥 순전히 장난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동을 거는 순간 폭발적으로 화가 들끓어올랐다. 부드럽게 시동이 걸리려던 걸 도로 끄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긴 다리로 잘 빠진 차체를 신나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시작의 근원을 모르는 분노였다. 그리고 방향이 없는 분노였다. 백건 자신 또한 왜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어디서 화가 난 거지? 백건이 주먹으로 두꺼운 유리문을 내리쳤다. 박살나기는 커녕 주먹이 아작났지만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백건은 수없이 주먹으로 차체를 치고, 발로 걷어찼다.

오랜만에 현우녀석을 만났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말투. 결혼식, 가문간의 결합. 좋아해요? 누구를? 당신이 저를 좋아해요? 아니. 사실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어요. 내가 당신을, 백건을, 좋아한다고. 빠르게 사라지는 검은 뒷모습. 빛깔좋고 맛만 좋던 디저트를 끝내고 나서 주차장으로 향한 자신. 왜 그런 소리를 했냐? 왜 이런 시기에 그런 말을 나에게 내뱉었나?


조용한 주차장 속에서 쾅쾅 들려오던 소리가 멎었다. 백건이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표정으로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 하아, 하아. 약간 차오른 숨을 고르고 나니 이제서야 시야가 깔끔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건이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는 형편없이 찌그러진 고철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니깟 놈이 뭔데, 내 마음이 이렇다 저렇다, 마음대로 정하나? 그리고 네 놈이 뭔데, 갑자기 그런 말을 내뱉어?

 

"씨발...."


백건이 주먹으로 다시 차체를 내리쳤다. 손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붉었다. 지금 주체할 수 없는 제 감정처럼. 마냥 씩씩거리던 백건이 벽에 등을 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의도가 뭐야, 새끼야. 한참동안이나 백건은 주저앉아서 이어지지 않는 단편의 생각들을 잇고 있었다. 첫 만남,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너와 나의 사이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 무엇으로 변할지. 백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호텔 안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우 놈이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몇 층, 몇 호에 묵고 있는지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너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네가 알려줬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면 기억하지 않는 내가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 이유도 단 하나.

 


5.

현우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대충 수건으로 닦은 채 화장실을 나왔다. 충동적, 아니 계획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후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백건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해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자신이 자초한 것이니 덤덤하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신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겁쟁이. 덜컥 내뱉어놓고서는 한숨짓는 멍청이.

띵동,

잡스러운 생각들을 불쑥 깨고 들려온 벨소리였다. 현우가 문을 쳐다보았다. 이 시각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또 그쪽 집안 사람인가. 하여튼 의심병만 많아서는. 끝까지 귀찮게 굴었다. 그래도 귀찮게 굴고 있다는 것은 아는 모양인지 벨을 한 번만 누르고는 더 이상 누르지 않았다. 이제 결혼식까지도 별로 안 남았으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현우는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순간 누군가가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왔다. 누군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문을 닫고서는 입술을 마주쳐왔다. 백건이 현우의 입술을 잡아뜯듯이 채물었다. 당황한 현우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자신의 입술을 덮은 사람이 백건인 것을 알고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백건의 뒷머리에 손을 깊숙히 넣어 끌어당겼다. 잡아먹을 듯 거칠게 붙어오는 입술에 현우가 고개를 틀어 급한 키스를 이어갔다. 백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현우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푸흐흐,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현우를 세게 붙잡고 입술을 파고들던 백건이 눈을 치켜떴다. 웃어?


"이제야, 마음을 인정할 생각이 들었나, 봐요?"

현우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백건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헝클며 물었다. 백건이 거칠게 현우를 잡아끌며 대답했다. 닥쳐, 아까는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생각이란 게 없는 상태니까. 그 발언에 현우가 눈꼬리를 휘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덕분에 지금 이성이 날아간 상태거든요.


"설마, 이렇게 빨리 날 찾아올 줄 몰랐죠."


그리고 키스를 선물할 줄은, 몰랐죠. 말을 삼키고 현우가 백건의 입술을 잡아물었다. 분위기가 점점 그러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저 친구로만 여겼던 사이는 당사자도 모르게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던 거였다. 현우가 백건을 침대로 이끌었다. 깔끔히 정돈되어 있던 침구가 두 사람의 행동에 금세 흐트러지고 있었다. 현우가 백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고백은 내가 먼저 했으니까, 먼저 이끌어도 되죠? 아 미안, 이거 지금 의견 물어본 거 아니에요. 그냥 통보. 내가 이끌 테니까, 그냥 따라오기만 해요.

​6.


일은 일사천리였다. 이게 이렇게 빨리 나가도 되나 싶을 만큼 빨리. 정작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백건이 약간 미간을 좁힌 채 허리를 두드렸다. 밖은 아직 컴컴했다. 새벽 3시쯤 되었나. 백건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셔요. 저에게 물을 건네는 현우의 손에서 물잔을 받아든 백건이 단숨에 들이켰다. 물맛이 좋았다.

"근데 손은 왜 그래요?"

"빨리도 물어본다."


아까 차에다 분풀이해서 피딱지가 진 손이 쓰린 듯 씁, 하고 혀를 차는 백건을 바라보며 현우가 꺼낸 말이었다. 의사 부를까요? 금방 올 텐데. 현우의 말에 백건이 무심하게 받아쳤다. 이 꼴로? 다 벗은 상태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자 현우가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백건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알아서 할게. 피는 멈춘것 같고 지금은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다른 곳이 더 아파서. 들으라는 듯 한 소리에 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변하지 않는 얼굴빛에 백건이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저런 뻔뻔한 새끼한테 홀랑 넘어가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백건에게서 빈 잔을 받아든 현우가 입을 열었다. 파혼할거에요. 평온한 어조로 다시 엄청난 말을 내뱉는 현우를 보고 백건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방책은 있고?"

"그 약혼녀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가문과의 결합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물잔을 조그만 테이블 위에 갖다놓고선 침대 위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백건이 현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현우가 말을 덧붙였다.



"윈윈 전략을 쓰자고요."

그래도 백건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현우가 희미한 미소를 걸며 백건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현우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백건이 눈을 깜박였다. 가까워진 얼굴 사이, 숨결을 느끼며 현우가 입을 열었다.


"지금 프로포즈 한건데."

그 말을 듣고서야 백건이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참으로 건조한 고백이었다, 이건. 그러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아마. 백건이 픽, 웃으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7.


바람이 백건의 머리칼을 세차게 헝클고 지나갔다. 오지게 춥네. 백건이 입을 열었다. 너, 그때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정말 뜬금없이. 뭐,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지만 말이야. 일사천리로 된 일을 지칭하는 게 두 사람의 성관계를 말하는 건지 묵히고 묵혔던 지난 과거를 말하는 것인지는 애매했지만 백건이 그렇게 말을 끊었다.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갑작스럽게 말이야. 현우가 백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거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현우가 뚝뚝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힐끗 백건을 돌아본다. 마주친 노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현우가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세찬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현우가 입을 떼었다. 무서운 바람 소리에도 현우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마지막이니까 한없이 구차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저 좀 구해달라고 구차하게 매달리면, 당신이 봐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그랬어요. 마지막이니까 용기가 불쑥 솟아오르기도 했고. 툭 털어져나온 진심에 백건이 눈을 크게 떴다. 그냥 그랬다고요. 하길 잘했죠, 뭐.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현우가 난간위로 턱을 괴었다. 현우가 웃었다.


봐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