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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남친룩

"로망이라..."

 

편하게 벽에 등을 기댄 채 티비를 보던 백건이 문득 중얼거렸다. ​티비 속 화면에서는 여자가 앞치마를 입은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보글보글 김이 피어오르는 찌개를 들어 식탁에 내려놓은 여자의 요리솜씨에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수저로 국물을 한 웅큼 뜨고, 즐겁게 웃고. 그저 흔하디흔한 일상물이지만 네 명의 사신후계자들은 그것을 나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었다. 백건은 편히 벽에 기댄 채, 은찬은 배를 깔고 드러누운 채, 현우는 정좌세를 취한 채, 그리고 가람은 빨랫감을 척척 개면서 말이다. 앞치마를 입고 자신에게 요리해주는 게 로망이라고, 극중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백건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로망이 너무 작네.

"자고로 메이드룩이 로망 아니겠어?"

"그게 뭡니까?"

백건의 말에 현우가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얼굴로 물어봤다. 백건이 손을 들어 설명했다. 그러니까 하녀들이 입는 옷.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프릴이 달려있는 레이스지. 머리에 그 뭐더라?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머리띠 같은건데 천같은거 메고. 백건의 설명을 들은 현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공자 취향이 그렇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현우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말을 했다. 그럼 저의 로망은, 흰색 속저고리를 입어주는 게 로망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현우의 말에 백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 한복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냐? 백건이 현우에게로 돌아앉아 오지랖 넓은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야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복장이 가득한데. 그렇게 평범한게 로망이라니 너도 참 너 답다. 가람은 그런 백건과 현우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반듯하게 갠 수건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짧게 내뱉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은찬도 그런 둘의 싸움을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티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웅다웅, 두 명의 미성숙한 놈들이 쓸데없는 말싸움을 해댔다. 시끄럽네...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입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는데. 한동안 현우와 남자의 진정한 로망룩, 이 무엇인가에 대해 열심히 설득하려던 백건이 결국 포기했다.

 

"그래, 넌 그 좋아죽는 저고리나 가져라."

"알겠습니다."

납득한 현우의 목소리에 백건이 짜증을 냈다. 몰라 짜증나. 스트레스만 얻은 백건이 벽에 머리통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가 발끝으로 주은찬을 찼다. 야, 주은찬. 차대는 백건의 발에 은찬이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입을 열어 묻는다. 뭐가. 백건이 물었다. 너도 있을거아냐, 로망이 뭐냐고. 문득 떨어진 백건의 질문에 은찬이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티비에서 여전히 흘러나오는 장면에 시선을 주다가, 옆에서 빨래를 개는 청가람에게 살짝 눈을 주었다. 어...나는.

"남자친구룩."

"허?"

"내 옷을 입어주는 게 로망인데."

커가지고 조금 흘러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은찬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건이 혀를 찼다. 거기서부터 벌써 사심이 드러난다. 현우도 동감했다. 주작공자, 호색한이군요. 뭐? 은찬이 발끈했다. 너네들이 더하거든? 한 놈은 메이드라고 하지 않나, 한 놈은 속옷이라고 하지 않나. 현우가 되받아쳤다. 전 속옷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은찬이 입을 비죽였다. 속저고리가 속옷이나 마찬가잖아. 세 명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들으면서 가람은 마지막 빨래를 갰다. 툭툭, 옆으로 쌓아놓은 가람이 다독여 빨랫감을 정리했다. 세 명이 말하는 대화주제를 자세히 들어보니 이미 드라마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너가 더 해, 내가 무슨 변태라고. 퍽퍽 발로 차는 소리가 들린다. 백호공자와 주작공자 둘 다 더럽습니다, 제 옆에서 떨어지시죠-. 더럽긴 뭐가 더러워. 발끈하는 소리.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빨랫감을 각 사람에게 던져주었다.

"는....억!"

"아주 놀고 자빠졌네. 각자 방에 갖다 놔, 친히 정리해줄 마음까지는 없으니까."

 

현우가 날아온 빨랫감을 간신히 받아들고서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냥 말로 하지 왜 던집니까. 가람이 웃으며 여의주를 꺼내들었다. 지금 내가 한건 말이 아닌가 봐? ....갖다놓고 오겠습니다. 현우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백건도 가람의 눈치를 보며 따라 일어났다. 머리아픈 것들. 가람이 나가는 두 명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나가는 은찬을 보고 조용히 불렀다. 야. 은찬의 어깨가 놀라 화들짝 움직였다. 네..네? 은찬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다가 가람이 이상한 표정을 짓자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가람의 눈치를 살폈다. 가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뚫어버릴 것만 같은 책망의 눈동자. 잘못했습니다... 은찬이 일단 사과를 했다. 가람이 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턱끝으로 백건과 현우가 나간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알면 빨리 두고 와.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하더라? 하늘에서 떨어진 떡? 엄청난 횡재? 은찬이 얼떨떨한 눈으로 제 앞에 서 있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멍청아, 뭐해. 가람의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은찬은 입을 조금 벌린 채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보니 방을 바꾸어서 자게 된 날이었다. 현우와 자신이 있는 방으로 건너온 백건은 원래부터 그 방이 제 것이었다는 듯 편하게 누워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안락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제 자리에 누워서 절 올려다보는 백건의 모습은, 분명히 누워있는데도 잘생김이 넘쳐나 조금 비참해졌다. 아니 왜 사람이...저렇게 누웠는데도 잘생겼지. 새삼 백건의 잘생김에 우울해졌던 은찬은 백건이 좁은 방에 그만 쳐 있고 빨리 저쪽 방으로 꺼지라는 소리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은찬은 제 방에서 베개를 들고 백건의 방으로 넘어갔다. 드르륵, 문을 열고 아무생각 없이 들어갔던 은찬은 이제 와?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뭘 그렇게 자꾸 보고 있어?"



퉁명스러운 말투. 가람이 입을 비죽였지만 은찬은 천천히 눈을 굴려 청가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제 수련복을 입고 있는 청가람. 안에 붕대를 묶고 있지 않아 속살이 간간히 보였다. 그래, 가람이 성장이 멈추어서 몸이 작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렇게... 은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렇게 옷이 헐렁거릴 줄은 미처 몰랐다. 은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 가람아. 왜 내 옷을. 띄엄띄엄 말하는 은찬의 목소리에 가람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남친룩? 하여튼 잘 모르겠지만, 그게 로망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내가 네 옷 입어주는 거. 그래서 입어준건데.



"왜, 싫어?"



가람이 샐쭉하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은찬이 고개를 미친듯이 저었다. 아니 싫을 리가! 가람이 어깨를 들썩였다. 은찬의 시선이 좀 더 밑으로 내려갔다. 수련복 밑으로 보이는 분홍빛 도는 하얀 다리. 털없이 쭉 뻗은 다리가 제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니 잠깐. 은찬이 생각을 멈추었다. 맨다리잖아?! 맨다리다. 은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 주은찬의 시선을 잡아낸 가람이 허 하고 짧게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소리에 은찬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청가람이 무슨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은찬은 혼자서 주절주절 변명을 해댔다. 아니, 가람아.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시선이 저절로..

 

보고 싶어서 본 거면서 무슨 변명을 저렇게 한담. 가람이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딱히 주은찬을 책망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말 그대로, 보여줄려고 이렇게 입은 거니까, 그렇게 쳐다봐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가람이 손을 움직여서 허리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에 은찬은 잡념을 다 잊고 끈을 푸르는 가람의 손에 집중했다. 마침내 끈이 맥없이 바닥으로 사락 떨어졌다. 허리를 졸라매던 붉은 옷자락이 조금 공간을 두고 나풀거렸다. 아.... 은찬의 손에서 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가람이 손을 들어 비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리 와, 멍청아."


가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은찬이 멍한 눈으로 드러난 가람의 맨몸을 흝어보았다. 어휴, 멍청이. 절 타박하는 청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마저도 귓가에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가람이 은찬의 앞으로 가볍게 걸어와 아직까지 열려있는 문을 드르륵 하고 닫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주은찬의 뜨거운 시선에 가람이 무신경하게 고개를 돌렸다.

 

상 차려놨잖아, 안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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