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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Kill me

그 날은 타락한 사방신중 하나가 내려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날이었다.

 

불타는 중앙 한가운데에 한 명이 서 있었다. 무감각한 눈으로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사신 후계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은찬. 타닥타닥, 하고 불길에 타들어가는 나뭇조각 소리가 불안한 정적 사이로 잠깐씩 들려왔다. 은찬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서 있었고, 그 주변을 일렁이는 불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날아올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와중에 현우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윽, 반 이상 찢겨나간 왼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며 땅을 적셔갔다. 그 소리를 들은 가람이 현우에게 시선을 흘끗 주곤 내뱉었다.

 

 

"넌 빠지는 게 낫겠다, 어디 가서 숨어있어."

 

 

가람의 말에 현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내뱉었다. 글쎄요, 과연 지금 제가 빠지면 공자들 둘이서 저것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현우가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이 상태로는... 숨을 데도 없습니다. 백건이 현우의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래, 이미 중앙이 거의 다 부숴졌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저 녀석을 막지 못하면, 아마 일반인들까지 피해가 가게 되겠지.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여기서 저녀석을 막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쯤은. 중앙의 몇십, 몇백 배나 되는 곳들이 분명히 쑥대밭이 되겠지, 더 처참하고 끔찍하게 말이다.

 

 

"주은찬..."

 

 

가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넌 왜, 흑주작으로 변해버린거야. 가람이 말을 삼켰다. 검게 물든 머리카락, 평소와 달리 한없이 싸늘한 얼굴에 한기가 돋았다. '그것'이 주은찬의 몸에 강림한 것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전에 보았던 주은찬의 이상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평소와 달리 몸이 안좋다며 우울하게 혼자 앉아있고, 눈을 찌푸리며 있던 주은찬. 그때 알아챘었어야 하는데.

 

 

 

윽. 들린 신음에 청가람이 뒤를 돌았다. 멍청아, 뭐하는거야!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깨진 도자기가 눈에 띄였다. 검은색의 문양이 그려져있는 조그마한 상자 같은 것. 깨진 자기에서 한순간 스멀스멀하고 음침한 기운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지만 곧 사라졌다. 뭐지, 이상한 느낌에 가람이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곧이어 끙끙대는 은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은찬의 팔을 홱 잡아채자 보이는 길게 난 생채기에 한숨을 흘렸다. 넌 왜 이렇게 덤벙대? 은찬이 어색하게 웃으며 가람의 손에 잡힌 제 팔을 빼냈다.

 

 

'깨뜨린 건 뭐야?'

 

 

가람이 조각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글쎄....잘 모르겠어. 주작 문양이 그려져 있길래 뭔가 해서 한 번 꺼내본 건데, 미끄러져서...은찬이 말을 흐렸다. 가람이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하도 할줄아는게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꺼내본 거야? 가람이 손끝으로 은찬의 코를 톡 치며 내뱉었다.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가람의 말에 은찬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가람이 계속해서 쫑알거렸다. 너 때문에 이거 깨뜨렸으니 어떡할 거야, 주인할머니가 야단치면 난 몰랐던 일이라고 둘러댈거니깐, 너가 알아서 해. 얄짤없는 말에 은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얌전히 말을 듣는 은찬의 모습에 가람이 순순히 돌아섰다. 혼자 그거 치우고 와, 난 이만 밥 차려야되니까.

 

나가는 청가람의 뒤를 보고 은찬이 가만히 서 있다 다시 눈을 찡그렸다. 다친 팔쪽이 이상하게 몹시도 아려왔다. 분명히 별로 심하지 않은 상처일 뿐인데, 왜그럴까. 약간 식은땀도 나며 으슬으슬 추운 게 이상했다. 지난밤에 좀 추웠나, 요새 추워진 밤공기를 생각하며 은찬이 가볍게 생각했다. 오늘은 문 닫고 자야겠다. 그리고 가람이한테 따뜻한 차나 한잔 줄 수 없냐고 부탁이나 해 볼까. 물론, 빠르게 거절당하겠지만 말야. 은찬이 미소지었다.

 

 

항상 다른 애들과 뒤쳐진다. 주은찬이 생각했다. 금강불괴의 백건, 비록 주술을 쓸 수는 없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무술가인 현우, 열여섯의 나이에 사신강림까지 한 청가람. 나는 뭐지? 대대로 주작 후계자가 여자여서 그런지, 남자인 자신은 주술가임에도 주술을 잘 쓸 수 없었다. 음양오행 때문이라나 어쩌라나. 은찬이 씁슬하게 웃었다. 후계자의 증표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가문에서 별볼일없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조용히 숨죽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냉혹한 법. 어찌저찌해서 중앙으로 오긴 했지만, 열등감에 시달렸다. 다른 애들은 다 빠르게 성장해서 앞으로 치고나가는데 자신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두 발로 뛰고는 있지만, 그 차이를 메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가람이 그랬다. 제일 약해보이면서도, 제일 강한 녀석.

 

 

'넌 네 몸이나 간수 잘하는게 좋겠어.'

 

 

강해져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고싶다는 말에 청가람이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소중한 사람들이 아마 너보다 강할 것 같은데? 은찬이 눈을 깜박이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 그렇지? 청가람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멍청아, 수련이나 하러 가. 아님 밥 안 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강한 아이러니한 상황. 은찬이 양손을 펴들고 가만히 생각했다. 어떻게, 뭘 더 해야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내가 이 상태에서 사신강림을 할 수는 있기는 할까? 강해지고 싶다. 은찬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누구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 자괴감과 더불어 힘을 향한 집착이 심해졌다. 어떻게라던가 누구라던가 수단과 방법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하며 은찬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애들과 동등하게, 사실은 그보다 더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타락한 사방신 중 하나가 은찬의 생각을 갉아먹었다. 뭐라도 좋으니, 날 강해지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 순간, 은찬의 안에 숨어든 검은 날개가 타올랐다.

 

 

 

 

"난 이제 약하지 않아."

 

 

은찬의 입이 열리며 그의 목소리가 무게있게 흘러나왔다. 약하지, 않아. 띄엄띄엄 말한 은찬이 주먹을 쥐었다. 훅, 하고 불길이 강하게 타올랐다. 나도 이제 너희들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은찬이 찬찬히 입을 열어 다짐하듯이 말했다. 백건이 중얼댔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미 먹혀버린건가.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하는 은찬의 모습에 세명이 긴장했다. 정신차리십시오, 공자! 현우가 소리쳤다. 언제까지 흑주작에게 잡혀있을 겁니까! 사신 후계자라는 이름이 아깝습니다! 현우의 말에도 은찬은 냉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사신 후계자라니.....너무하잖아, 그깟 '후계자'라니.

 

 

"지금 나는 사신강림한 상태인데."

 

 

그거면 됐어. 다른 건 상관하지 않을래, 계속 무시당하고 멀어져가는 등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 지쳤어. 은찬이 다시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뒤쪽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방향을 틀어 세명에게 혀를 날름거렸다. 흠칫, 가람이 고개를 홱 돌려 남아있는 두 명을 바라보았다. 현우는 이미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고, 금강불괴의 몸이라는 백건은 현상황에서 그보다 더 강한 주은찬의 공격에 몇 번 당했으니 겉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내상을 많이 입었을 거다. 가람이 눈을 돌렸다. 이 상황에서 흑주작과 겨룰 수 있을 상대는 오로지 자신 뿐이다. 그렇지만....

 

 

"...멍청이."

 

 

가람이 여의주로 저희들에게 휘몰아치는 불길을 맞받아쳤다. 불길 사이로 백건과 현우가 다른 곳으로 옮겨뛰는 게 보였다. 주은찬, 내가 너를 상대로 진심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람이 이를 아득 갈았다. 멍청이, 멍청아. 가람이 몸을 홱 돌려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위로 올라서니 좀 더 크게 보이는 풍경, 처참한 풍경인건 여전했다. 손을 뻗자 여의주가 긴 창으로 변했다. 한 손에 창을 잡고 가람이 은찬을 향해 뛰어내렸다. 챙, 어느새 은찬의 손에 생긴 긴 칼이 가람의 창을 여유롭게 막아냈다. 은찬의 검은 눈이 멍하게 청가람을 향했다. 정신 차려, 바보야! 가람이 소리질렀다. 하지만 은찬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가람에게 팔을 휘둘렀다. 이 녀석이 이렇게 셌었나,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던 가람이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조금전보다 더 빨라지고 강해진 것 같다. 착각인가? 숨을 돌릴 때쯤 백건이 은찬에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펑 하고 크게 폭발하는 소리가 나고 백건이 불길 속에서 쿨럭거리며 빠져나왔다. 왈칵,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덩이. 백건이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는 것을 보면서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주은찬을 잠식한 흑주작의 힘이 점점 강해져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가람이 창을 꽉 잡았다. 뭐가 널 이렇게까지 만든 거야, 울고 싶어졌다. 넌 바보긴 하지만 상냥해서 좋았어. 웃는 얼굴이 좋았어. 여의주가 다시 변하며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몸을 훌쩍 날려 번개를 피한 은찬이 공격을 날려보낸 청가람을 쳐다보았다. 냉기가 서린 얼굴. 너는 바보긴 하지만 나에게 항상 웃어줬어. 그렇게 차갑게 쳐다본 적이 없었단 말야. 검은 불길이 휘몰아쳤다. 이글이글 끓는 열기에 타버릴 것만 같은 착각. 간신히 버티고 있던 현우가 결국 중상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와르르르, 지붕이 무너지며 기왓장이 조각조각 부숴진다. 가람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넌, 싫어.

 

남아있는 사신 후계자 둘과 미쳐버린 흑주작 하나. 싸우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이쪽의 승산이 없다는 게 절실하게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 백건은 넉다운될 것이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막아내려면 여의주의 힘을 완전개방해야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람이 번뜩 고개를 틀었다. 안 돼! 그러면 주은찬이 크게 다칠 것이다. 자신이 가진 여의주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건지 잘 알고 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주은찬에게 쓰면 안 된다.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데, 바로 코앞에서 힘이 빠진다. 이미 인형이 되어버린 주은찬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냥 힘이 빠진다. 쾅, 은찬의 공격을 제대로 맞은 가람이 무너진 기왓더미에 부딪혔다. 윽, 느껴지는 통증을 참아내며 고개를 드니 불길속에서 나타나는 주은찬이 보였다. 손을 들어올리는게 보이지만 빠르게 움직일 수 없어 다가올 공격을 각오하고 있을 때.

 

 

".....가람아?"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주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짙은 검은색머리는 그대로였지만, 자신을 보는 눈동자가 달랐다. 알던 사람을 보는 눈빛,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었던 눈빛. 바보같이 웃으며 말하던 주은찬의 눈빛이었다. 네가 왜. 은찬이 말을 삼켰다.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내가, 이렇게. 가람이 멍하니 은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주은찬의 안에서 세력싸움이 일어나는 듯 했다. 본래 몸의 주인인 주은찬이냐, 흑주작이냐. 하지만 한낱 인간이 사방신을 이기는 건 무리였다. 은찬이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떨ㅇ...져...나한...테서. 다음 순간에는 다시 얼음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저건."

 

 

같은 장면을 본 백건이 비틀거리며 내뱉었다. 그리고는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피해라..청..룡. 가람이 서둘러 피하자 앉아있던 기와더미가 폭발했다. 파편에 볼이 긁히면서도 가람은 은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희망이 있다, 주은찬을 원래대로 해놓을 수 있는 희망이.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은 거였다. 안에 있어, 주은찬이. 속에서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어떻게해서든 저게 완전히 폭주하기 전에 주은찬을 이끌어내서 저지해야 한다. 가람이 팟 하고 사라져 은찬의 뒤를 노렸다. 재차 공격이 막혔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안에 주은찬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야, 바보야!!"

 

 

가람이 소리질렀다. 다시 나와, 정신 차리라고!! 캉캉 부딪히는 공격들을 막아내며 가람이 은찬의 눈을 똑바로 보며 소리질렀다. 펑, 아까보다 확연히 커진 검은 기운이 감당하지 힘들 정도로 턱턱 부딪혀왔다. 제발 다시 한번만 더 나와, 주은찬. 가람이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넌 분명히 후회할 거잖아, 더 후회하기 전에 나와! 불길에 소매 끝이 살짝 탔다. 제발, 은찬아.

 

 

"제발...."

 

 

가람이 애원했다. 하지만 날아드는 건 공격 뿐이었다. 직격타를 맞은 가람이 먼짓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저 뒤로 밀쳐져 무릎을 끓었다. 파지직, 여의주가 주인인 청가람을 보호하려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것을 본 가람이 억지로 여의주를 짓눌렀다. 안 돼. 불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가만히 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 가람이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다가오는 주은찬의 팔을 피하고 그 손을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가늘게 뜨여있던 은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한 채 은찬이 제 팔을 붙잡은 가람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긁힌 얼굴, 그을려진 머리카락. 잠시나마 돌아온 걸 본 가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 돌아온 거지?"

"청가람.."

"그만 힘을 거둬."

 

 

그 목소리에 은찬이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길 속에 서있는 단 두명. 나머지 사신후계자들은 불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진 중앙. 은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이렇게 한 거야?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했다. 그만 힘을 거둬, 주은찬. 가람이 다시 힘있게 말했다. 은찬이 제 팔을 잡고있는 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슬픈 웃음에 가람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왜 웃어, 너.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은찬이 아주 이상한 말을 내뱉을 것만 같은 느낌. 미안, 힘을 거둘 수가 없어. 불길이 더 세차게 타오르자 가람이 홱 돌아보곤 다시 은찬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뭔데, 주은찬. 아냐."

 

 

가람이 부정했다. 아니라고 말해, 당장 흑주작을 몰아낼 수 있다고 말해. 니가 중앙 부순거 미안하고, 애들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 은찬이 대답했다. 그러네, 말해줄래? 미안하다고. 가람이 화를 냈다. 내가 왜 말해줘! 니가 직접 말해, 나는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니까! 점점 더 불안해졌다. 당장이라도 주은찬이 사라질것 같았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무서웠다. 은찬이 여전히 웃음기있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약해서 그 틈을 파고든 것 같아. 내가 강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은찬의 말에 가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주은찬. 넌 충분히 강해. 처음으로 듣는 '강하다'는 말에 은찬의 얼굴에 진심으로 웃음꽃이 피었다. 그 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마워.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았다. 잡아오는 손길에 가람이 흠칫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곧 완전히 폭주가 시작될 거야. 난 이걸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없어. 다시 그녀석에게 먹히겠지."

"아냐, 네가 막을 수...."

"잘 들어, 청가람. 흑주작이 다시 날 지배하면 더 이상 나는 나오지 못할 거야."

 

 

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손으로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게 될 거야. 난 그런 건 싫어. 뭐라고 말하려는 가람의 말을 무시한 채 은찬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곧 그 순간이 다가올 것임을 직감한 탓이리라. 이게 완전히 폭주하면 막을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용족인 너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겠지. 그 전에 빨리 끝내는 방법밖에는 없어. 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주은찬. 그러니까 네가 그만두면 된다고....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매만졌다. 청가람, 한마디만 더 할게. 널 많이 좋아했어. 은찬의 고백에 가람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널, 좋아했어. 그러니까. 은찬이 서글프게 웃었다.

 

 

"네 손으로, 날 죽여줘."​

 

 

여의주의 힘을 완전히 개방해서 말이야. 은찬이 덧붙였다. 무슨 소리야. 가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너. 화르르르, 아까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검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해줘, 가람아. 폭주가 시작되면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없어. 부탁할게.

 

가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 보고 환하게 웃는 주은찬, 허둥대다가 정리해둔 수저통을 잘못해서 엎어뜨린 주은찬,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던 주은찬. 그리고... 지금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주은찬. 넌, 정말, 바보고, 멍청이야. 청가람이 이를 갈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너무나 뜨거워 눈물인지 불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안해, 부탁할게. 은찬이 가람의 손에 창을 세게 쥐어주며 웃었다. 좋아해, 청가람. 

   

 

 

하늘에서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온 사방을 덮던 불길은 거의 다 꺼져 약한 불길만이 스산하게 주변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었다. 으으, 겨우 정신을 차린 현우가 통증이 느껴지는 팔을 붙잡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생지옥에 있는 것 같았던 상황은 종료되었는지 한없이 무거운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얼굴에 퍼붓는 비를 막는 걸 포기한 백건도 앞을 바라보았다. 새카맣게 타버린 원모양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있었다. 백건과 현우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누워있는 주은찬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청가람. 가람이 맥없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은찬의 주변으로 빗물에 희석된 핏물이 점차 고이고 있었다. 입가에 여전한 미소를 달고 깨어나지 않는 주작 후계자, 였던, 주은찬.  

 

비는 청가람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 끊임없이 내리고 또 내렸다. 가람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은찬, 넌 왜 계속 웃고 있는 거야. 인간은 멍청해,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멍청해. 그리고 또, 제일 잔인해.

 

  

그 날은 타락한 사방신중 하나가 내려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청가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앗아간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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