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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미스터 앤 미스터 킬러

*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패러디입니다

 

 


"자기, 죽었어?"



매캐한 먼지 사이를 뚫고 날아오는 말소리에 은찬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매일 한 번만 저렇게 불러달라고 애원했을 때에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있다가 꼭 지금에서야 말하지, 청가람. 달콤한 '자기'라는 애칭으로 지금 불러도 그렇게 기분좋지는 않다구? 은찬이 구멍난 벽을 흘끔 바라보았다. 바닥에 채이는 수많은 유리조각들과 벽에서 떨어져나온 콘크리트 조각들. 총알이 몇 발 남았더라, 남아있는 총알의 수를 가늠해보려 했으나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은찬이 가람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불러달라고 할 때는 안 불러주더니​ 이제와서 자기라고?"

"서비스야, 서비스. 그래도 죽기전엔 한번쯤은 불러줘야 편하게 가지 않겠어?"

"하하, 누가 죽는대?"

"움직이지 마, 빗겨나가면 좀 아플꺼야."



가람이 웃으며 다시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 집안 가득히 울려퍼지는 굉음들. 이크! 은찬이 재빨리 한바퀴 굴러 벽을 뚫고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복도 안쪽으로 달렸다. 모퉁이를 휙 꺾고 서 있다가 거울에 흐릿하게 비치는 형체를 보고 반자동 총을 쐈다. 하지만 당연하게 청가람은 맞지 않았다. 그 의미로 계속해서 총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다닥, 은찬이 빠르게 계단에서 슬라이딩하며 자신을 뒤따라오는 가람의 모습을 찾았다. 철컥, 총탄이 비었다. 젠장, 은찬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그렇게 무섭게 갈겨대던 청가람 쪽도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빨리, 빨리. 은찬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위이잉하고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 돌아가고 안에서 권총 한개와 장총이 나왔다. 탄환들을 쓸어담은 은찬이 권총도 품속에 집어넣고 장총을 집어들었다. 그닥 좋은건 아니지만 할 수 없지. 문을 나와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청가람의 행방을 찾고 있으려니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애인끼리 서로 총구를 겨누고 상대방을 죽이기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니. 은찬의 눈에 장식장 한쪽에 진열되어있는 값비싼 도자기들이 비춰졌다. 반짝, 무언가가 빛난다고 생각했을 때.


투두두두두-


윽! 총알은 정확히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있던 도자기를 박살냈다. 그리고 아마도 은찬이 재빨리 몸을 숙이지 않았더라면 총탄이 몸을 찬란하게 수놓으며 지나갔을 것이다. 은찬이 소리를 질렀다.



"이 도자기 이탈리아 갔을 때 비싸게 주고 사온거란 말이야!"



색이 너무 희귀하고 아름다워서 사온건데, 그걸 박살내다니! 청가람 이 잔인한 놈! 버럭버럭 고함치는 은찬이 가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저에게로 날아오는 총탄들을 피해 벽 뒤로 쏙 숨은 가람이 소음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 은찬의 말에 대답했다. 니가 거기 있던 게 잘못이지! 난 몰라! 이 상황에서 저게 비싼건지 아닌건지 알 게 뭐야! 그러니까 얌전히 죽어주라고, 주은찬! 그러면 네가 아끼는 물건을 박살낼 이유도 없는데! 

가람의 말에 은찬이 몸을 일으켜 가람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올라갔다. 총알이 바닥나자 들고있던 총을 집어던지고 품속에 있던 권총을 집어들며 구멍난 벽 뒤로 흘끗 보이는 갈색 머리를 향해 쐈다. 탕, 탕탕. 청가람이 옆으로 사라지며 부엌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놔둘 줄 알고? 은찬이 가람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시시각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 마당에 왜 이렇게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서 빨리 끝내야 되는데 말이다.

 

 

주은찬과 청가람은 살인청부업자였다. 사실, 두 사람이 서로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을 안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단 하루 전뿐이었지만 말이다. 그전까지는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인줄만 철썩같이 믿고 살았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청가람, 세일즈맨인 주은찬. 겉포장된 외면만을 보고서도 끌린 두 사람은 만난지 일주일만에 같이 잤다. 떳떳하게 드러낼수는 없지만 그래도 두사람이 행복한 애인관계. 사소한 것에 웃고, 바쁜 하루속에서도 간간히 연락하고, 같이 밥을 먹고 밤에는 서로의 체온에 기대 잠들고.


[주은찬, 지금 뭐해?]


가람이 문자를 보냈다. 은찬은 그때 막 한 사람을 죽이고 나오는 길이었다. 띠링, 날아온 문자에 은찬이 손을 움직여 답문을 보냈다. 지금 막 하나 성사되고 쉬는 중이야. 일처리했으니 비슷하지 뭐, 은찬이 볼에 묻은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지이잉, 은찬이 보낸 메세지를 보며 가람이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요즘은 잘 풀리나봐? 오늘 저녁은 뭘로 할까?

다시 던져진 물음에 은찬이 가만히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뒤를 돌아보니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된 남자의 시체가 보였다. 비릿한 냄새. 갑자기 회가 먹고 싶네, 육회. 은찬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외식하자, 회 먹고 싶어. 내가 살게.


일이 틀어진 건 어느 사건에서부터였더라? 은찬이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에 담겨있는 기억이 촤라라락 책장처럼 넘겨졌다. 아 맞아, 시카고에서였지. 출장이라고 거짓말을 치고 중요한 타겟을 노리러 갔었다. 청가람도 며칠간은 중요한 업무때문에 집을 못들어가겠다고 말해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제 표적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죽임당한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리고 그 일이 두번정도 더 반복되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쪽에서는 나름 탑인데 그런 자신이 번번히 타겟을 가로채이다니. 누군지 몰라도 자신이 알아채기 전에 처리하고 나오다니 대단한 실력을 가진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 몇번이라니. 은찬이 가람에게 투덜거렸다. 요새 자꾸 내 동료가 내 공로를 빼앗아간단 말이야, 정말 짜증나. 물을 들이키며 은찬의 불만을 듣고 있던 가람이 조언했다. 힘들겠다, 그럼 너도 되갚아줘. 그러면 되겠네. 은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다 가람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음...그게. 나도 요새 누군가가 자꾸 내 뒤를 밟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스토커? 빨리 말했어야지!'

'아니, 스토커는 아니고....'



은찬의 반응에 가람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좀 예민한 거. 그냥 그런 시선을 좀 받았을 뿐이야. 묘하게 거슬린달까.... 스토커는 아닌 것 같은데 좀 그래. 그러다 덧붙였다. 뭐, 그냥 기분탓일수도 있고.


그 시선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고 말이다. 은찬이 쓰게 웃었다. 그저께 현우에게서 전해들은 말은 얼마나 놀랐던가. 부탁한거 주인 알아냈는데, 괜찮아요? 현우가 어색하게 절 쳐다보았다. 뭔데 그래. 번번히 제 타겟을 가로챈놈을 드디어 알아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은 은찬이 어서 정보를 내놓으라 닦달했다. 전 몰라요, 공자가 부탁한거에요. 현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공자가 직접 봐요, 전 나가있을테니. 뭐길래 저 현우가 이런 반응을 보인건지 약간의 궁금증을 담고서 은찬이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리고 모니터에 뜨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굳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같은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청가람. 촤르르륵 하고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나온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청가람에 대한 모든 것은 거짓말.


지금까지 웃으면서 주은찬이 제 입으로 말한 것들은 모두 거짓말.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타깃 처리할 시간은 48시간으로 충분하지?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다마다. 사랑하는 주은찬, 죽여버릴테니 각오해.



철컥. 두 사람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두 사람의 탄창 또한 다 비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은찬과 가람은 총을 내던지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퍽, 은찬이 가람의 배에 주먹을 꽃아넣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킨 가람이 은찬이 다시 때리기 전에 발로 은찬을 걷어찼다. 큰 충격에 비틀거리는 은찬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몇 번 맞던 은찬이 정신을 차리고 가람의 손을 막아 벽에다 쾅 박았다. 으윽,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아픔에 가람이 신음을 삼켰다. 주은찬이 이렇게 힘이 셌었나,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는 사이에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주은찬의 공격에 시야가 멍해졌지만 손으로 후라이팬을 들어 은찬의 얼굴을 갈겼다. 데엥, 맑고 큰 소리가 나며 은찬이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청가라암....!"



골이 흔들리는 기분에 은찬이 악물며 소리쳤다. 그 사이에 저에게로 돌진하는 청가람이 보인다. 어찌할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은찬이 냉장고에 세게 부딪혔다. 아까 총탄들에 맞아 너덜너덜해진 냉장고가 다시 가해진 충격에 내용물을 토해냈다.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귤이 탱탱 굴러가고 음료수잔이 깨졌다. 개새끼, 가람이 이 사이로 신음처럼 토해냈다. 퍽퍽 주먹질하는 손이 계속해서 치명타를 안겨주고 있었다. 은찬이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좀 전에 부딪힐때 어깨를 잘못 부딪혀서 그런지 몹시 아려왔다. 은찬이 가람을 번쩍 들어올려 바닥으로 내던졌다. 저 멀리 나가떨어진 가람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잠시간 숨을 돌렸다. 주은찬 니가 날 내던져? 가람이 짓씹으며 칼집에 꽂혀있는 과도를 빼들었다. 번뜩이는 칼날에 은찬이 주춤거리는 걸 보면서 가람이 입을 열었다.



"왜그래? 내가 끝내주게 죽여줄게, 이리 와."

"섬뜩하게 그렇게 말하지는 말아줄래....?"



입꼬리를 올려 웃는 가람의 얼굴에 은찬이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가람이 손에 든 과도를 고쳐잡았다. 왜, 솔직히 사격은 너보다 좀 뒤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칼쓰는 건 진짜 잘하거든. 안아프게 죽여줄게. 입안에 고인 피를 뱉은 가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은찬의 앞으로 달려가 과도를 휘둘렀다. 은찬이 고개를 젖혀 칼을 피했다. 휘두르는 힘이 어찌나 강했던건지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릴 정도였다. 주은찬, 이리저리 빼내지말고 가만히 있어! 계속해서 피하는 은찬이 짜증났던건지 가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화내지 마, 청가람. 은찬이 가람의 손목을 세게 가격했다. 땡캉, 하고 가람의 손에 들려있던 과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람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은찬이 가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쿵, 큰 소리를 내며 가람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못 움직이게 가람의 위로 올라탄 은찬이 한 손 높이 과도를 집어들고 청가람을 겨누었다.


반짝, 은빛으로 빛나는 예리한 칼날. 가람이 은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볼에는 말라붙은 핏자국. 한순간에 고요해진 주변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가람이 속으로 생각했다. 뭐하는 거야, 주은찬. 어서 날 죽이지 않고 뭐해. 뭘 주저하는 거야. 속에서 불안감이 점점 커져간다. 도무지 자신을 향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과도와 그것을 들고 있는 주은찬.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은찬은 제 밑에서 절 올려다보는 청가람을 보고있을 뿐이었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들과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널 죽여? 은찬이 생각했다. 조직이 원하는대로, 지금 당장 이 손을 내리면 청가람은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잘 해결될 터인데. 조직에서 더이상 의심받지도 않고 본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텐데. 왜. 은찬이 서서히 손을 놓았다. 땡캉. 금속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람이 눈을 크게 떴다.


 

"뭐하는....거야.."

"......."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은찬."

 

 

주은찬의 손에서 더이상 칼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없이 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난 못하겠어, 가람아. 난, 못해. 천천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가람이 이를 갈았다. 뭐라고? 가람이 울분을 토해냈다.

 

 

"무슨 헛소리야, 당장 다시 칼 들어!"

"....싫어. 난 못 해."

"들으라고, 멍청아!!"

"차라리 네가 날 죽여."



은찬이 가람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속삭였다. 그래, 차라리 네가 날 죽이고 조직으로 돌아가면 돼. 그러면 돼, 가람아. 난 너라면 괜찮으니까. 가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쁜자식아, 왜 자꾸 날 이렇게 힘들게 해. 나쁜 놈아,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편안한 얼굴로 절 내려다보고 있는 주은찬. 첫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절 바라보던 주은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졌다. 

조직따위 필요없어, 이제 어찌되든지 상관 안할래. 가람이 은찬의 목을 홱 끌어당겨 키스했다.


급작스러운 가람의 손길에도 금방 적응한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세게 움켜잡고 잡아먹을듯이 입술을 탐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은찬이 굶주린 사람처럼 가람의 혀를 먹어치웠다. 으응, 흣. 평소의 젠틀한 이미지는 집어치우기로 작정했는지 한없이 격렬한 키스에 가람이 숨을 헐떡였다. 숨을 쉬려 얼굴을 떼려해도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은찬의 행동에 질식사할 지경이었다. 마치 처음 맛보는 것처럼 세세한 곳까지 다 핥은 은찬이 가람이 잠시 숨을 쉴 수 있게 놓아주었다. 그리고 가람이 숨을 쉬자 곧바로 다시 잡아채 키스를 이어나갔다.


좋다, 은찬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좋다, 너무 좋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달아오른 청가람의 야한 얼굴을 보는 것도 좋고, 뜨겁게 혀를 섞는 것도 좋다. 손으로 만져지는 청가람의 허리가 부드럽고 아찔한만큼 키스는 기분좋았다. 숨을 쉬는 시간도 아까워 계속 가람의 혀를 물고빠는것에만 집중했다. 가람이 은찬의 뒷머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아, 더이상 못참겠다. 은찬이 가람의 허리를 붙들고 일어섰다. 갑자기 붕 뜨는 느낌에 놀란 가람이 벗어나려 했으나 도망치지 못하게 강하게 잡은 은찬이 어질러진 식탁을 대충 밀어버리고서는 가람을 내려놓았다.

 

 

"너무 좋아ㅎ...."

"알았으니까 빨리 해."



은찬의 말을 가로막고 가람이 말했다. 급했다. 가람이 손을 들어 먼저 은찬의 셔츠를 벗겼다. 너무나 다급해 단추를 푸는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단추가 많은 거야, 가람이 속으로 화내며 겨우 벗긴 은찬의 셔츠를 내던졌다. 내 주은찬. 은찬의 손에 도움을 받아 티를 내팽겨친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은찬의 목을 세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또 키스. 키스만으로도 가버릴정도로 황홀하고 기분좋았다. 한 손으로 가람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람의 볼을 매만졌다. 손끝에서 감기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볼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으로, 또 쇄골에서 가슴으로.


흐으, 홀릴듯한 은찬의 손길에 가람이 절로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게 거짓이었어도 좋아, 괜찮아. 가람이 생각했다. 제 목을 깨무는 주은찬. 지금까지 알던 주은찬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지만, 괜찮아. 쇄골을 깨무는 주은찬. 넌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그만큼 좋아하니까. 은찬의 손이 내려가 가람의 바지를 벗겼다. 차가운 공기의 느낌에 가람이 잠시 다리를 오므렸으나, 곧이어 다가오는 열기에 눈을 감았다. 많이 좋아해, 주은찬.





".....괜찮아?"

"뭐."



은찬의 물음에 가람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 무슨 말을 해야되지. 청가람이랑 같이 있고, 관계 후에 같이 깨있는것도 많이 해봤는데 왜 지금은 아무말도 안 떠오르는걸까. 은찬이 멍하니 있을 때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가람이 대충 대답했다. 목이 말라서. 냉장고에 남은 게 있으려나.... 가람이 깨진 유리조각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셔츠 하나만을 걸친 채 걸어가는 청가람. 흰 다리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삼스럽게 갑자기 왜 이래. 은찬이 제 얼굴을 찰싹 때렸다. 뭐하는 거람. 깨진 유리병안에 반쯤 남은 오렌지주스를 가져오면서 가람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쪼르르르, 그나마 깨지지 않은 컵에 주스를 따른 가람이 자학하고 있는 은찬에게 잔을 건넸다.



"여기."

"어... 고마워."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가람이 건네준 잔을 받으니 갑자기 미친듯이 목이 타서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난장판에 용케도 남아있었구만. 은찬이 싱겁게 생각했다. 아, 뻐근해. 은찬이 목을 비틀었다. 그걸 본 가람이 은찬에게 말을 던졌다. 왜? 어디 뻐근해? 응, 오른쪽 어깨가 조금. 대답에 가람이 마시던 주스를 내려놓고 은찬에게 다가왔다. 돌려봐. 은찬이 순순히 돌리자 가람이 양 손으로 안마했다. 으으, 은찬이 신음했다. 어때? 시원해? 가람의 말에 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졌어. 잘하네. 괜찮다는 말을 들은 가람이 손을 떼고 은찬의 옆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술집에서 혼자 마시고 있던 나 옆에 니가 앉은 거?"

"맞아. 그때 네 표정 진짜 안좋아보였는데, 그래도 예쁘더라구."



찡그려도 예쁜데 웃으면 얼마나 더 예뻐질까 궁금했었어. 가람이 눈을 흘겼다. 그 날, 사실 의뢰가 틀어져서 짜증나서 그랬던거거든. 어? 뭐였는데? 가람이 대답했다. 그 대머리 정치인 말이야. 은찬이 입을 열었다. ....나돈데. 둘 사이에 다시 대화가 끊겼다. 가람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우리, 대체 어디서부터 말해야 되는 거야?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대화를 새로 시작해야겠는걸."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며 동의했다. 침묵. 가람이 입을 열었다. 일단, 집이나 치우면서 말하자. 은찬이 그런 가람의 생각에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점심 먹을것도 사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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