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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side memory

* Lost Memories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현우야."

 

은찬이 현우를 불렀다. 현우는 고개를 내려 마루 끝에 앉아있는 은찬을 바라보았다. 주작 공자, 왜 안 자고 여기 나와있습니까. 은찬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눈동자에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걸어가 은찬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바깥 바람이 찼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흐르지 않았다. 현우는 그저 손끝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와 달리 무거운 분위기에, 말없는 은찬이 어색했지만, 어째서 이토록 조용한 것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에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은찬이 입을 열 때까지, 현우는 얌전히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은찬이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네."

"..그렇죠."

 

하아,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현우는 은찬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여기서 함부로 위로의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상처를 줄 것이 뻔하다. 은찬은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사신강림을 해서 하늘로 올라갈 시기가 된 현무 후계자 현우와 사신 후계자 자격을 곧 박탈당할 주작 후계자 주은찬. 그리고 그런 현우와 같이 올라갈 백건과, ....청가람. 은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렸을때부터 이 자리만을 보면서 달려온 길이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생각해본적도 없지만, 이제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포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은찬은 그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마음에 하나 걸리는 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청가람이었다.

청가람은 겉으로는 한없이 강인한 척 행동을 했다. 날선 성격, 톡 쏘아붙이는 삐죽한 말투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 청가람은 헤어질 때 덤덤한 척 할 것이다. 평소와 같은 덤덤한 얼굴로 제 얼굴을 바라볼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문이 닫히면 그 표정은 곧 일그러지겠지. 이제 사는 곳이 갈라진 우리들의 기억에 괴로워하며 살겠지. 그런것은 원하지 않는다. ​은찬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현우야, 부탁이 하나 있어.

만일 하늘나라에 올라가서도 가람이가 사신의 임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 생각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힘들어하면, 가람이에게서 내 기억을 지워줄래? 현우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은찬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난 가람이가 힘들어하는 것은 보고싶지 않아. 차라리 처음부터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편해지겠지. 은찬의 말에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말이 없어진 은찬을 보며 현우는 입을 떼었다.   

 

"공자는 이기적이네요."

"....뭐?"

"청룡 공자는 주작 공자를 계속 기억하고 싶을 겁니다. 그 의지를 짓밟으라고요?"

 

약간은 차가운 목소리. 현우의 쓴소리에 은찬이 고개를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얼굴, 은찬은 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기적이라고, 그래. 은찬이 중얼거렸다. 현우는 그런 은찬의 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찬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은찬이 중얼댔다.

하아, 현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주작 공자의 부탁,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공자 그거 압니까? 만일, 내가 부탁을 들어주면, 주작 공자는 영원히 청룡 공자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하게 될 거에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쯤은, 가람이가 편해진다면 아주 하찮은 것일 뿐이니까.

 

 

 

하늘문이 온전히 열렸다. 사신강림을 한 세 명의 후계자들, 아니 이제 사신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찬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얘들아.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릴게, 기다리고 있을게 주은찬. 빨리 와야 해. 알겠지? 은찬은 가람의 말에 그저 웃어보였다. 잘 가, 가람아. 은찬은 가람의 모습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놓았다. 덤덤하게 서서 날 바라봐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마지막이니까, 생생하게 기억해야지. 안녕, 가람아.

 

 

너는 나를 잊겠지만,

 

 Side Memory

 

나는 너를 기억하고 싶어.

 

 

1.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은찬이 가방을 멘 채 할머니를 향해 돌아보았다. 할머니, 그동안 감사했어요. 할머니는 그런 은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끔 차 마시러 놀러라도 오거라. 할머니의 말에 은찬이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은찬은 몸을 돌려 중앙을 걸어나갔다. 발걸음이 가볍고도 무거웠다. 은찬의 머리색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은찬을 보고 부모님은 말없이 껴안아주었다. 은찬아, 괜찮아, 괜찮아. 자신을 꼭 껴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주면서 말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말에 은찬은 그제서야 펑펑 울었다. 덤덤한 척 중앙에서 나왔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나도 주작강림을 해서 하늘나라로 같이 올라가고 싶었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싶었어.

"지상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사는 세계가 하늘나라가 되길 바랐어요. 아버지는 은찬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주은찬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대학교를 들어가서, 남들과 같이 공부를 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졸업하길 잘했지. 은찬은 캠퍼스 안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제 이 곳이 내 세계이다, 내가 살아갈 세계. 은찬은 다른 사람들을 사귀었다. 핸드폰에 저장되는 새로운 번호들. 은찬은 2학년 때 여자친구가 생겼다. 자신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던 여학생이었다. 나 네가 너무 좋아, 은찬아. 너의 그 웃는 모습과, 배려깊은 모습이 좋아. 은찬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지어지는 미소.

 

은찬은 웃으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3학년 올라가는데 전공트랙 뭐 선택할거냐? 은찬이 푸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제대로 생각해본적은 없는데,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없는 은찬의 말에 친구들은 아 새끼, 나보다 생각이 없는 놈이네 하고 웃어제꼈다. 은찬이 받아쳤다. 그러는 너도 정하지 않았잖아. 친구가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든 된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은찬은 그렇게 죽어나간다는 4학년이 되었다. 남들처럼 서류전형에서 많이 떨어져 인생의 쓴 맛을 맛봤지만, 면접까지 간 것도 꽤 있었다. 은찬은 옷을 차려입고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이 던지는 황당한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하나 신중하게 대답했다. 면접관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은찬은 한 회사에서 인턴으로 생활을 했다. 은찬은 26살이 되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문득 던진 말이 있었다. 은찬아,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게 어떠니? 은찬이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 해, 은찬은 중소기업 하반기 공채에 합격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은찬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여자친구가 바람을 폈기 때문이다. 은찬은 화를 내지 않았다. 여자가 오히려 화를 냈다. 내가 너의 그런 행동 때문에 바람을 피운 거야, 주은찬. 너의 그 관심없는 듯한 행동이 나를 슬프고, 화나게 만들어. 여자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친구, 아니 이제는 예전 여자친구가 된 여자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히 바람핀 남자겠지. 은찬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하루 사는게 바쁘다. 일상에 치이기 바쁘다. 주말이 되면 은찬은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휴일을 즐기며 축적된 피로를 풀기에 바빴다. 하지만 마냥 집에만 있을 수만도 없던 것은, 은찬의 친구들이 그를 가끔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야 준! 나와, 술 한잔 하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사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은찬은 간간히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는 게 그렇지 뭐. 은찬은 살아가는 것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한 구석에는 중앙에 대한 기억을 묻어둔 채.

 

2.

은찬은 지금의 아내를, 추운 겨울날의 길거리에서 처음 만났다. 28살의 겨울, 곧 있으면 30대일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은찬은 많은 생각을 하며 이어폰을 낀 채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다. 앗,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은찬은 저도 모르게 넘어지기 전에 팔을 뻗어 누군가를 붙잡았다. 아! 아픔에 찬 여자의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소리난 곳을 힐끔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찬이 황급히 이어폰을 떼고 사과를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치진 않으셨어요?"

여자의 발 앞에는 테이크아웃 커피가 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잡는 바람에 놀라 그녀 자신도 모르게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손을 꼭 쥐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치진 않았어요. 커피는 이미 조금 식은 터라... 다만, 조금 끈적거리긴 하네요. 은찬의 눈이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아, 은찬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선홍색 눈동자. 그 때, 중앙에서 있었던 마지막 일인, 21살 이후로 처음 보는 같은 색의 눈동자였다. 부들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청가람이 여자였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까? 은찬은 멍하니 있었다. 여자가 조금 불편한 시선으로 커피가 묻은 손을 털었다. 물수건...없으시죠? 여자의 질문에 은찬이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대신 은찬이 다른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여자의 이름은 한서희라고 했다. 자신보다 한 살 어렸다. 겨울날에 있던 한 실수로 인해, 은찬은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직업은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부드럽고도 어딘가 결단력이 있는 여자의 모습이 은찬은 마음에 들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물은 지 약 한 달, 은찬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교제신청을 했다. 여자는 수줍게 마음을 받아들였다. 사귄지 약 3년 후, 31살의 은찬은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6월의 신부,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했다.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은찬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한 다음 년도, 첫 아이를 낳았다. 여자를 꼭 닮은 여자아이었다. 깜박거리는 선홍색의 큰 눈, 아직은 길지 않지만 보들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주은영, 은영아. 아이가 은찬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은찬은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은영이, 라고. 아이는 기어다니는 시간을 지나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초여름이었다. 은찬은 운전대를 잡았다. 아내가 찻집의 차가 마시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앙이고 아니고를 떠나, 가게의 차 맛은 은찬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은찬은 가족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를 했다. 아이는 먼저 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차를 타고 달려오는 내내 찡얼거리던 것을 생각해보면, 차 안이 많이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가, 다치겠다. 여자가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은찬은 차 문을 잠근 채 아이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아직까지는 봄바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바람이 불었다. 아이가 누군가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푸른 한복이 펄럭거렸다. 은찬이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얌전히 손을 떼었다.

사과를 건네며 은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은찬의 얼굴은 굳고 말았다. 청가람이었다. 청가람, 18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난 청가람이었다. 은찬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람의 표정은 살짝 찡그려졌다. 아내의 조심스러운 물음도 들려왔다. 여보, 왜 그래요? 한동안 멍하니 있던 은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착각했어."

​청가람,이 먼저 중앙 안으로 사라졌다. 자, 우리도 들어가자. 은찬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은찬은 조금 전 보았던 가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시선. 자신을 알아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주은찬은 알 수 있었다. 현우가,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익숙한 찻집 안. 알바생이 메뉴판을 건네며 물어왔다. 아내가 잠시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한 차를 시켰다. 이걸로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알바생이 물러갔다. 여기 차는 향이 진하고도 부드러워서 좋아요. 아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은찬은 지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참이었다. 아이가 휴지를 뽑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엄마아, 언제 나와? 아이가 발장난을 쳤다. 조금 기다리자, 먼저 탁자 위에 다과 몇 개가 놓여졌다. 아이가 신나하며 과자 한 개를 집어들었다. 아, 안되겠다. 여보, 나 잠깐만 갔다 올게. 어디를요? 은찬이 가만히 단어를 뱉었다. 중앙, 여기서 시간을 같이 보냈던 사람을 봐서. 아아,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은 아내와 아이를 가게 안에 있으라고 말하고는 중앙으로 걸어들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찬은 청가람의 뒤를 쫓아들어갔다. 가람은 막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 그 아이들은 지금쯤이면.... 은찬이 황순 할머니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매화장에서 수련하고 있을 시간이죠? 가람이 뒤를 돌았다. 불만에 찬 목소리가 섞여나왔다. 저 인간은 또 뭐에요? 일반인인데 막 들어와도 되는 거에요?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순 할머니가 은찬을 반겼다. 은찬아, 오랜만이구나. 네 가족들은?

 

 

"아내와 딸은 찻집에 있어요. 아내가 여기 차를 정말 좋아해서요."

왠지 대화에서 소외되어진 가람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은찬을 마땅찮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관심없어진 눈을 하고 몸을 돌린다. 은찬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가람을 줄곧 보고 있었다. 백건과 같이 쓰던 방을 들여다보던 가람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다른 방을 둘러보았다. 맨발로 마루를 걷는 모습이 마치 선녀 같다, 고 생각했다. 가람은 다시 신발을 신고 잠시 이쪽을 바라보더니, 저 뒤에 난 모퉁이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매화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찬아. 은찬이 다시 시선을 내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가람이랑 싸웠던 게냐?"

"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일 텐데 왜 이렇게 찬바람이 쌩쌩 부느냐. 너를 모른다는 듯이 속삭이던 것도 그렇고.... 할머니의 말에 은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주인 할머니께는 가람에게서 자신이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은찬이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싸우고 갔었나 봐요. 할머니가 은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은찬이 숨기고 있는 것을 캐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은찬은 시선을 피해서, 가람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결국 할머니는 은찬이 숨기는 것을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어서 쫓아가서 잠시만이라도 이야기 나눠라, 못 볼 아이인데.

 

"이렇게 다시 헤어진다면 힘들지 않겠느냐."

네, 그래야겠어요. 은찬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겠어요, 할머니.

 

3.

 

이 곳을 걷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은찬이 대나무길을 걸어갔다. 매화장, 많은 시간을 보낸 만큼, 많은 기억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매화장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은찬이 고개를 딱 돌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청룡 후계자를 밀어붙이고 있는 청가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 아까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여서 청가람도 철이 들었나,하고 생각했는데 저걸 보니까 가람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절부절한채 불공정한 싸움을 지켜보는 세 명의 사신후계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안의 주작 후계자도.

 

삼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소녀가 뛰어왔다. 소녀가 자신에게 뛰어오는 것을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는 가람의 모습도 시야에 잡혔다. 오랜만이에요, 삼촌. 그나저나 삼촌, 저 청룡좀 말려줘요. 소녀가 안절부절하며 은찬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같이 중앙에서 지냈잖아요? 친하잖아요."

 

아까 청룡 후계자가 좀 무례한 말을 내뱉긴 했는데, 저렇게 당하는 것도 싸긴 하지만, 좀 불쌍해. 은찬이 두 청룡을 바라보았다. 그래, 조금 불쌍하긴 하다. 은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때, 가람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싸움을 멈췄다. 손에 잡혀있던 긴 창도, 가람에게 내린 청룡신도 스르륵 사라졌다. 가람이 말없이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은찬도 그런 가람을 바라보았다. 구깃, 가람의 미간이 구겨졌다. 알고 있었어? 가람의 날카로운 말이 톡 튀어나왔다. 뭐를?

"그쪽이 현 청룡이라는 것을?"

 

 

청가람을 청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어색했지만 은찬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람이 뭐라뭐라 말을 했다. 은찬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면서도 하나하나 대답했다.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꼭 예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면 빨리 고마워해. 내가 너네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는 거니까. 가람이 가슴을 당당하게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내가 사방신이야, 제일 위대하신 청룡이라고. 가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은찬의 눈이 한 번 깜박였다. 청룡, 그래 너는 청룡이지. 이제 청가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청룡이지.

 

"청....룡."

 

하하, 은찬이 웃었다. 배를 잡아가며 은찬은 크게 웃었다. 너는 청룡이고, 사방신이다. 하지만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너에게는 닿을 수 없는 그런 하찮은 인간이지. 새삼 실감했다, 가람과 자신의 격차는 너무나 크다는 것을. 그래서 웃음이 났다. 너무 슬퍼서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람이 발을 쿵 하고 굴렀다. 왜 웃어! 왜 웃어!! 저렇게 화내는 목소리도 너무 우습고 슬퍼서, 네가 날 완전히 잊었다는 게 슬퍼서. 은찬이 웃느라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가람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토록 간절하게 보고싶어했던 눈동자, 루비보다 더 아름답고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가람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먼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청룡 후계자에게 엄포를 놓았다. 너, 게으름 부리면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하늘문을 열었다. 가람이 발을 내딛기 전,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은찬은 가람의 입모양을 읽었다.

'이상한 사람.'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하늘문이 닫혔다. 

 

청가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주은찬의 자리를 대신하는, 주작 후계자가 은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삼촌, 청룡이랑 싸우고 헤어졌어요? 응? 은찬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우리들처럼 같이 수련하고 오래 알고 지내왔을 텐데, 저렇게 모른척 하는게 좀 이상해서요. 은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주인 할머니에게서도 들은 말. 은찬이 대답했다. 

"응, 싸웠어."

그래서 날 모른척하는 거야.

그래도....!! 뭐라고 말하려는 소녀의 입을, 은찬이 쉿, 하고 막았다. 은찬이 손을 들어올려 소녀의 붉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무튼, 힘들텐데 열심히 하고. 네 자신을 믿는 거야, 그러면 돼. 알겠지? 은찬이 다른 후계자들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그리고 매화장에서 몸을 돌렸다. 다시 자신을 잡아끌 현실로, 자신을 기다릴 아내와 딸이 있을 곳으로.

은찬은 돌아가면서, 아직 네 명이 다같이 중앙에 있었던 겨울날을 떠올렸다. 

 

​4.

"청가람."

 

은찬이 마루에 걸터앉아서 방 안에 들어앉아있는 가람을 불렀다. 은찬의 목소리에 가람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왜 불렀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은찬이 가람에게 손짓했다. 너도 나와. 가람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싫어, 밖에 춥단 말이야. 은찬이 가람을 꼬드겼다. 밖에 눈 내려서 절경이라구? 계속 방에만 있을 거야? 저기 현우 봐봐, 멍걸이랑 잘 놀고 있잖아. 가람이 멍걸이에게 끌려다니는 현우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노는 건가? 가람이 은찬을 무시했다. 안 가.

안 돼, 나와 봐. 은찬이 신발을 벗고 가람이 배를 깔고 엎드리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건이 목도리를 두르다가 방 안으로 들어온 은찬을 곁눈질했다. 가람이 경계태세를 취했다. 너, 나 억지로 끌고 나갈 거지.

 

"나 추운 거 싫단 말이야!"

 

몇 번을 말해, 나 추위 잘 탄다고. 그 말대로, 가람은 추위를 매우 잘 탔다. 더위도 잘 타고, 추위도 잘 타는 편이라 가람은 날씨에 민감했다. 그리고 그말은 만일 바깥 날씨가 안 좋은 경우라면 가람은 오랫동안 히키코모리가 된다는 사실 또한 뜻했다. 은찬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두터운 패딩을 억지로 가람에게 입혀주려 했다. 가람이 잽싸게 도르르 굴러 은찬의 손을 피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자니까, 밖이 얼마나 예쁜지 너도 봐야 해! 아, 싫다고! 가람이 버둥거렸다. 저것들 참 유아틱하게 잘 논다. 목도리를 다 멘 백건이 가람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넌 좀 나가야 돼, 청가람."

쿵, 백건이 가람을 마루 위로 떨어뜨렸다. 죽고 싶어?! 가람이 아려오는 엉덩이를 문지르다가 백건에게 소리를 질렀다. 청가람이 화나 나서 날뛰거나 말거나 백건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신발을 신었다. 가람아, 팔. 방 안에서 가람의 옷을 들고 나온 은찬이 팔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니가 제일 짜증나, 주은찬. 가람이 이를 갈았다. 조금만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럼. 응? 아편마냥 부드러운 주은찬의 미소에 스르르 녹은 가람이 결국 패딩에 팔을 찔러넣었다. 조금만이야, 바로 들어갈 거야. 그래그래. 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이 신발을 신었다. 하아, 숨을 내뱉자 하얀 김이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다. 춥다. 가람이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현우는 눈을 보고 신나서 날뛰는 멍걸이의 목줄을 간신히 잡은 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끌려다니고 있었다. 으아악, 공자들! 얘 좀 어떻게 해 봐요! 백건이 한심스러운 얼굴로 현우를 쳐다보았다. 저 멍청한 놈... 백건이 혀를 쯧 차며 멍걸이를 불렀다. 그러자 멍걸이가 무서운 속도로 우다다다 달려온다. 흰 눈이 쌓인 마당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온 몸에 온통 눈뭉치를 단 멍걸이가 백건의 다리에 부딪혔다. 

 

"난 눈 내리는 거 싫어하는데.."

 

 

가람이 말끝을 흐렸다. 소리는 작았지만 옆에 가까이 있어서 가람의 말을 들은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조금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가람은 예전의 기억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아버지에게 제 존재를 부정당한 날을.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은찬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퍽.

 

 

"헐.."

가람의 얼굴에 정통으로 날아든 눈덩이가 투투둑 마루로 떨어졌다. 백건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으니까 맞지, 멍청아. 멍청아를 연달아 두 번쓴 백건의 말에 가람의 이마에 빡 하고 핏줄이 불거졌다. 뒤지고 싶냐? 조금 전 우울했던 기분은 어딘가로 집어던진 가람이 여의주를 꺼내들려고 한 참이었다. 퍼억, 백건의 옆얼굴에 눈덩이가 던져졌다. 얼떨떨, 신나게 가람을 비웃던 백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풉, 가람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새 다른 눈뭉치를 만든 은찬이 눈덩이를 손에서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백건에게 말을 건넸다.

"맞아,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으니까 맞는 거지."

"해보자는 거냐, 주은찬..."

 

은찬이 가람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는다. 복수, 복수. 입모양으로 벙긋벙긋거리는 것을 읽은 가람이 결국은 웃음을 떠뜨리고 말았다. 백건이 던진 눈송이를 피한 은찬이 재빨리 손에 미리 만들어두었던 눈덩이를 던졌다. 백건이 잽싸게 피하자 저 쪽에 있던 현우가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공자아! 억울한 현우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하, 웃겨. 가람이 눈싸움에 합세했다. 마루에는 점점 깨진 눈뭉치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은찬이 가람에게 눈덩이를 건네주며 물었다. 어때, 재밌지? 가람이 인심썼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그래, 재밌긴 하네. 

 

 

5.

 

그 때 이후로, 청가람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차피 그때 본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괜찮았다. 은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요새 이유없이 식은땀이 나고 소화가 잘 안 되고, 어지럼증이 잦았다. 업무에 집중도 잘 할 수가 없었다. 주변 동료가 은찬에게 걱정어린 말을 건넸다.

 

"어디 아파요? 병원에라도 가보지 그래요."

살이 좀 빠진 것도 같았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편이라 병원에 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봐야겠어. 은찬은 동네 병원에 들렀다.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은찬에게 권유했다. 대학병원에서 한 번 검진받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은찬은 아내를 안심시켰다. 아니, 별 거 아닐 거야. 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아빠, 별 거 아니겠죠? 응, 그럴 거야. 아빠는 괜찮을 거야. 

별거 아닌게 아니었다. 은찬은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었다. 간암 말기입니다.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서 수술을 진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내는 그 말을 부정하고, 화를 냈다. 무슨 소리에요! 이이가 암이라니, 다른 분꺼 잘못 가져온 거 아니에요? 진단을 잘못한 것일거라고, 여기는 돌팔이다.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을 받아보자고. 하지만 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보. 사실인걸. 저걸 봐.

은찬은 덤덤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화를 내며 진료실 안을 쿵쿵 돌아다니던 아내가 은찬의 말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니야, 여보. 내가 잘못 들은거라고 말해 줘요. 은찬은 말없이 아내를 껴안아주었다. 간암 말기.

벌이다. 

이건 벌이었다. 은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를 속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온 한 인간에게 내려진 천벌이었다. 은찬은 항암치료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입원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면 살 기간은 더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은찬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은찬은 확고했다. 어차피 병원에 있어봤자 결국에 죽는 것은 똑같다. 그럴 바에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앞으로 남은 살 날은 길어봐야 세 달. 은찬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뭐, 죽는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을테니 마지막 가는 길 치고는 괜찮은 편일까. 은찬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녔다. 후회하지 않게, 용서를 빌면서 여행을 다녔다.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여행하는 일일히 사진을 남겼다. 점차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자, 은찬의 눈앞에는 환영이 떠다녔다. 흐릿한 환영이었다. 가람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은찬은 보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가지는 여유로운 시간인걸까. 얼마나 오랜만에 가지는 가족 여행인걸까. 모순적인 현실에 아내는 웃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 여보. 아내는 흐느끼며 은찬을 꼭 껴안았다. 은찬은 아내를 토닥였다. 그 때도 여전히 가람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람의 선홍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박였다.

 

이제 힘이 없어져서, 밖으로 돌아다닐 수조차 없었다. 연필을 들 힘도 없어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주소지는 모르지만, 어디 있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은찬은 불을 켜고, 자리에 앉아 힘들게 한 자 한자 써내려갔다. 기억속에 항상 남아있던 이름, 청가람에게였다. 몇 시간 뒤에, 은찬은 간신히 편지를 쓰는 것을 끝마쳤다. 흰 편지봉투에 넣어서 전에 사둔 상자 속에 넣었다. 문득 들린 인기척에 은찬이 뒤를 돌았다. 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뭐야?"

"친구에게 보내는 거야."

 

은찬이 한 구석에 상자를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은찬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은영아, 이리 와. 딸이 천천히 걸어와 은찬의 품에 안겼다. 아빠, 아빠. 딸이 은찬을 불렀다. 왜 이렇게 말랐어. 은찬은 말없이 제 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볐다. 아빠, 죽지 마. 아직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아직 난 성인이 아니잖아요.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만 있어줘요. 네?"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우리 딸. 미안해.

 

 

6.

시간이 흘렀다. 은찬은 병원 침대위에 누워서 떨어지는 링거액을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안 있어서, 죽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지랑이처럼 마냥 흐리기만 했던 가람의 모습이 또렷해졌기 때문이었다. 가람의 환영은 가끔 제 침대 옆에 앉아서 침대보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병원에 있는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꼬마였을 때 알던 녀석들, 대학교 친구들, 회사 동료들. 하나같이 찾아와서는 하늘은 무심하다고 중얼거리고 눈물을 흘리고 갔다. 정작 은찬은 평온했다. 마른 손을 들어 그들의 손을 한번씩 잡아줄 뿐이었다. 

 

"아빠, 나 오늘 고백받았어요."

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전부터 좋아하던 애한테서요. 아빠처럼 배려깊고 좋은 아이에요. 그리고 잘생겼​어요. 은찬이 웃었다. 잘 됐다. 예쁘게 사귀면 좋겠네. 은찬의 말에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오래 사귈래요.

죽어서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면 그곳에는 청가람이 있을까? 어린 소년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강한 기억속의 모습 그대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은찬은 침대에 누운 채 말을 띄엄띄엄 이었다. 이제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은찬은 딸에게 부탁을 했다. 은영아, 아빠 방에 있는 조그만 상자, 알지? 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은 목소리도 잘 안나오려는 것을 쥐어짜서 말을 이었다. 아빠가 눈을 감으면, 그 상자를 태워 주겠니? 딸이 눈물을 삼켰다.

 

"그럴게요. 네, 그럴게요."

 

7.

 

가람아, 날 잊어줘, 잊어 줘. 아니, 잊지 마.

 

은찬이 정정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솔직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 뒤로, 절 쳐다보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누구야, 누구인 거야. 은찬이 흐려지는 시야를 선명하게 보려 애쓰며 인영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가람이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봐주는 청가람. 중앙을 나온 이후, 온통 속이며 살아왔던 자신은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솔직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사실 그랬다.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너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람아, 가람아.

가람의 푸른 머리가 흔들거렸다. 가람은 자신을 보고 울고 있었다. 가람의 선홍색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아름답고 탐스러운 흰 꽃이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주변 사람들은 그 꽃에 묻혀져 점점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 꽃밭에 서 있는 자신과 청가람 뿐이었다. 가람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리 와.

가람이 눈물을 단 채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 손을 잡아.

은찬이 손을 뻗었다. 뼈밖에 남아있지 않은 손이 바들거리며 움직였다. 처량하고 가냘픈 손이, 마침내 가람의 손과 맞닿았다. 두 손이 서로를 마주잡은 순간, 생기없던 은찬의 손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고 따스해졌다. 가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같이 가자, 난 너무 오래 기다렸어. 이제, 같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자. 주은찬.

 

 

은찬이 웃었다. 아아, 마지막은, 너와 함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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