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찬가람

[찬가람] Lost Memories

"그 아이의 기억을 지워버릴 거니?"

 

주작이 그녀의 손가락에 앉아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에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우가 대답했다. 예, 그럴 겁니다. 주작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주작이 고개를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살랑 불었다. 주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이란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기억이지. 그것을 강제로 흔들어버린다면, 어떤 대가가 돌아올지 몰라. 주작이 가볍게 손을 털어 나비를 날려보냈다. 현우에게서 대답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백호궁의 주인, 백건도 네 생각을 알고 있니?

"알고 있습니다."

"그래.."

주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현우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겨있던 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픈 기억을 안고 평생 괴로워하며 살아가느니, 처음부터 기억하지 못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축복일지도 모르죠. ​  

 

저벅저벅, 일정하게 걷는 소리의 주인에 청룡궁의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현우가 걸어갈 때마다 오묘한 검은색의 옷자락과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청룡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걸어간 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서는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춤추는 새들, 그리고 갖가지의 동물 그림들이 새겨져있었다. 현우가 그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문을 양 손으로 열어제꼈다.

방안의 풍경은 하늘하늘한 꽃잎들로 가득했다. 눈처럼 휘날리는 꽃잎들에 현우는 잠시 자신이 청룡궁이 아니라 현무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흩날리는 흰 꽃잎들이 마치 자신이 다스리는 계절인 겨울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현우가 눈으로 떨어지는 꽃잎들을 쫓았다. 이것들은 다 청가람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현우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눈처럼 사폴사폴 내리는 꽃비들을 맞으며 걸어가, 아름다운 환상에 스스로 갇혀있을 한 사람에게로.

현우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산처럼 수북하게 쌓여있는 꽃더미 위에 올라가있는 사람 하나. 보드랍고 긴 푸른 머리가 마치 꽃들에게 물을 주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청룡궁의 주인인 청가람이었다. 손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잎들에 시선을 주던 가람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무기력한 얼굴, 방 안의 분위기과는 정반대로 우울함이 가득 배어있는 붉은 눈동자.

"청룡 공자."

 

가람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검은 두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가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왔어? 일 많을 텐데. 겨울이잖아. 가람이 내뱉었다. 그런 가람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현우가 손을 내저었다. 파사사사사,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던 꽃잎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죽비죽한 가시 속에 갇혀있는 청가람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과 몸은 가시에 긁히고 쓸려 상처투성이였다. 현우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것을 잡아챈 가람이 피식 웃었다. 왜, 놀랐어? 뭘 놀라. 이런 거 알고 있었잖아. 현우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 알아요. 그래서 온 거죠. 현우가 가시들을 헤치고 걸어가 가람의 눈 앞에 섰다.

 

"공자, 아직도 주은찬이 생각나 괴롭습니까?"

"......."

가람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긍정의 뜻이었다. 현우의 눈에 일순간 동정의 빛이 스쳤다. 공자, 언제까지 지상의 일에 묶여살겁니까. 이미 지나간 시간이에요. 가람은 반응하지 않았다. 현우가 가람의 푸른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공자. 현우가 가람을 불렀다. 주작과 백호 공자도 제 생각에 동의한 겁니다. 제 독단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말만이 흘러나왔다. 현우가 계속 말을 했다. 다들 공자를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공자,

 

 

"날 봐요."

"왜?"

눈을 들어올린 가람이 현우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척을 알고 눈을 번뜩였다.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주술에 묶여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현우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주술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자신은 주은찬에 대한 기억속에 얽혀있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었다. 너... 뭐 하려는 거야. 가람이 이를 갈았다. 벌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우가 중얼거렸다.

 

"주작 공자에 대한 기억을 없애드릴 겁니다."

"뭐?"

 

충격적인 말에 가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싫어, 나한테서 주은찬을 앗아가지 마, 나쁜 자식아. 가람이 마지막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현우의 팔을 세게 긁어내렸다. 까드득, 무지막지한 힘에 현우의 소매가 주욱 찢기고 피가 송골 맺혔다. 개새끼, 주작도 백건도 개자식이야. 왜, 왜, 왜. 대체 왜.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제 기억속에 남아있는 주은찬을 떠올리는 것뿐인데. 그것마저도 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거야?

눈 앞은 이제 주술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처럼 컴컴하다, 마치 절망스러운 현실처럼 어둡다. 코도, 귀도, 온 몸의 감각들이 주술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청룡 공자, 날 원망하지 마요. 현우의 목소리만이 몽롱하게 울려퍼졌다. 머릿속에 남아있던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람아, 청가람, 가람아! 밝게 웃는 주은찬의 모습. 자신에게 손을 건네려던 직전, 주은찬의 모습이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안 돼, 가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안돼, 가지마. 없애지 마, 제발. 가람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오던 주은찬의 온기. 사라진다. 깨지고, 깨져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주은찬. 가람이 내뱉는 단어들은 점점 띄엄띄엄 흘러나오더니, 결국 가람은 고개를 푹 꺾은 채 잠들었다. 현우가 잠든 청가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약간은 후회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들으세요, 이제 공자의 기억 속에 '주은찬'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은찬은 -

​Lost Memories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는 거에요.​ 

 

1.

하늘나라는 아름답고, 고귀하고, 웅장하다. 천상의 세계인만큼 지상에 사는 인간들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장대하고 아름다운 경치들이 펼쳐져있었다. 그 아름다운 곳의 주인인 청룡, 주작, 백호, 현무궁은 제각기 독특한 자태를 뽐냈다. 청룡궁은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였고, 주작궁은 강렬하면서도 따스한 이미지, 백호궁은 서늘하면서도 장엄한 이미지, 마지막으로 현무궁은 엄숙하고 웅장한 이미지였다. 사방신의 궁들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구역에는 거대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사방신들 각자의 궁에도 숲이 딸려있긴 했지만 중앙에 있는 숲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계절이 한 자리에 모여서 신비스럽고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선인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했다.  

중앙의 숲. 가람은 오색 돌들이 녹아있는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가람의 발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곧 보석이 되어 다시 시냇물 속으로 사라졌다. 평화롭다. 그리고 또 아름답다. 왜 예전에 청룡이 안 될거라고 그 난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하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식, 가람이 웃었다.

지금 계절은 가을, 따라서 백호궁의 힘이 가장 강할 시기였다. 그리고 백건이 제일 바쁜 시기일 거라는 사실 또한 의미했다. 아무튼 자신이 맡고 있는 봄이 아니었기에 조금 여유로운 가람은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싱그러운 풀향기들과 꽃향기들을 맡던 가람은 제 앞으로 걸어오는 사슴을 발견하고 살짝 무릎을 끓었다. 이리 와. 가람이 팔을 벌렸다. 잘생긴 뿔을 단 사슴이 타박타박 걸어와 가람의품에 안겼다.

 

"잘했어."

가람이 슥슥 사슴의 털을 쓰다듬었다. 손 안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털의 느낌이 기분 좋다. 머리가 당겨지는 느낌에 가람이 문득 내려다보니 사슴이 제 머리카락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야, 안 돼. 가람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사슴의 입에 들어가있는 자신의 머리칼을 빼냈다. 내 머리카락은 먹이가 아니야. 사슴의 눈을 바라보며 엄하게 꾸짖자 사슴이 둥그런 눈을 더 가까이 한다. 푸후, 가람이 굳혔던 표정을 풀고 웃으며 사슴의 코에 자신의 코를 갖다댔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지? 나 이래봬도 청룡이라고, 널 한 입에 꿀꺽-하고 잡아먹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순진한 사슴의 눈에 마음이 풀려버린 가람이 가볍게 혀를 차고 고개를 떼어냈다. 한동안 사슴이랑 놀던 가람은 익숙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허리까지 사뿐하게 내려와있는 윤기도는 붉은 머리카락, 잠시 지상에 볼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던 주작이었다.

"언제 돌아온 거에요?"

"방금."

 

주작이 머리를 휙 뒤로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그리고 가람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청룡은 할일 되게 없나봐? 보아하니 꽤 여기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데? 놀리는 듯한 주작의 목소리에 가람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보다는 많지만, 나도 쉬어야 할 때가 있으니까 나온 거에요. 지금 후계자도 사신강림을 하지 못했는데, 내가 과로사로 죽으면 골치아파질게 뻔하니까. 아하하, 가람의 농담에 주작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농담도 잘한다, 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조금 전 가람이 했던 행동과 똑같이 물에 발을 담갔다. 

주작이 헤엄치는 오색의 물고기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가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제 청가람은 다람쥐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놀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 주작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람쥐의 꼬리를 만지고 있던 가람이 문득 든 생각에 주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동작에 순간 주작은 가람이 제 생각을 읽은 것인가 하고 걱정했지만, 가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상에는 왜 내려간 거에요?"

"응?"

"주작 후계자 때문에?"

지금 나랑 같이 이 곳에 있어야 할 이번 대 주작 후계자는 잘못되어서 중앙으로 오지도 못했었으니까. 가람이 혀를 쯧 하고 찼다. 그것 때문에 사신 일은 두 배로 더 오래해야 되잖아요. 나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다음 대 청룡 후계자나 잘 감시해둬야 하나... 가람이 중얼거렸다. 주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그 아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주작이 말을 멈추었다. 가람이 끊긴 대화를 다시 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 주작 후계자는 어때요? 당신이랑 똑같으면 곤란한데. 가람이 악의없는 말을 건넸다. 주작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참 궁금한데, 넘어가줄게. 주작이 가람을 째릿 노려보다가 웃으며 가람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어떠고 할 것도 없이, 아직 다섯 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냥 귀엽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주작이 웃었다. 이 조그만 게 언제 커서 내 자리를 대신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빨리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격이 확실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려주는 게 좋겠지. 가람이 주작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도 귀여웠었지... 주작이 중얼거렸다. 옅은 후회와, 슬픔이 담겨있는 눈동자다. 잘못된 이번 대의 주작 후계자를 말하는 건가. 가람이 생각했다. 나 같으면 20-30년만 하면 될 사신의 일을 계속해서 떠맡게 만든 후계자에게 엄청나게 욕을 해댔을 텐데.

2.

 

하늘나라로 올라와 사신으로 일하고 있는 기간은,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20년이 다 되어간다. 봄이 끝나고, 계절은 여름이 되었다. 그에 맞추어 조금 여유로워진 가람은 오랜만에 백건과 마주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종이 두 사신의 앞에 김이 피어나오는 차를 내려놓고, 다과도 몇 개 내려놓은 채 물러갔다. 봄의 계절 내내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청룡궁은 이제 조금 휴식기가 돌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조금 썰렁한 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이유에는 가람이 계속 바빴을 청룡궁의 사람들에게 일주일은 쉬고 와도 좋다고 명을 내린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이 다과를 하나 집어들어 깨물었다. 톡, 입 안에서 퍼지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좋다. 냠냠, 반쯤 과자를 먹은 가람이 차 안에 꿀을 넣었다. 그것을 본 백건이 피식 웃는다. 너 입맛이 유아틱한 건 여전하구나?

 

"남이사."

 

백건의 시비조에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된 가람이 참견하거나 말거나 꿀을 더 넣었다. 이제 화도 안 내는군, 하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거에 화를 낸다면 진전이 없지. 백건이 납득했다. 백건이 고개를 돌려 청룡궁을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분위기가 딴판인 청룡궁은 볼때마다 신기했다. 맨 처음에는 청가람의 지랄맞은 성격과 궁의 분위기는 전혀 비슷하지가 않았길래 과연 이게 청룡궁이 맞나 하고 인상을 찡그렸었다. 하지만 청룡궁에 오래 살고 또 다스리다 보니 청가람은 궁의 모습을 닮아간 것 같았다.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화한 성격으로 변했달까.

잠시 생각하던 백건은 문득 시선을 청가람에게 돌리고 경악했다. 꿀을 대체 얼마나 넣은 거야, 윽. 저거는 차가 아니라 그냥 꿀 자체겠는데? 가람이 찻잔을 들었다. 저걸 진짜 마시려고? 놀라움과 감탄과 어이없음이 가득한 백건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가람이 한 모금 홀짝였다. 백건의 눈썹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것을 알아챈 가람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달아?"

"난 좋은데."

 

너도 마셔볼래? 가람이 권유했다. 아니, 난 됐어. 백건이 재빨리 거절했다. 난 이게 더 좋아서. 백건이 제 찻잔을 집어들고 홀짝였다. 가람이 입을 비죽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밖에서부터 날아온 노오란 꽃잎 하나가 찻잔 속으로 떨어졌다. 음.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이 꽃잎은 무슨 향이었더라, 기억이 안 나네. 차 위에 동동 떠다니는 꽃잎을 보던 가람이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항시 보드라운 꽃들이 피어있는 청룡궁이다. 이제 18년, 사신의 임무기간 중 약 반 정도 왔을려나. 빠르면 3분의 2정도 왔을 수도 있고. 자신에게 남은 임무 기간은 다음 대의 청룡 후계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간은 참 빨라."

"거의 반 정도 왔으니까?"

"응. 빨리 모든걸 내려놓고 쉬고 싶기는 하지만...청룡궁을 떠나는 건 조금 아쉬워질 것 같기도 해."

"아쉬울 것도 많다."

가람의 말에 백건이 혀를 찼다. 나는 빨리 끝내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뿐이야. 백건이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사신의 임무를 수행한 후 평생 하늘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건지 알겠어, 이렇게 부려먹잖냐. 가람이 고개를 까닥이며 그런 백건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서 양심이 있으니까 여기서 계속 살게 해준다는 거겠지.

주변이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그저 존재하는 소리라고는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와 비껴지나가는 바람소리 뿐이였다. 백건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살 흔들리는 푸른 머리칼. 16살에서 성장이 멈춘 앳된 얼굴. 21살에 하늘나라로 올라온 뒤로 오랫동안 사신의 일을 수행했지만. 청가람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사신강림을 늦게 해서 어른의 모습을 한 자신과 현우와는 달리, 청가람은 아직도 앳된 소년의 모습이라 가끔은 저런 모습으로 청룡궁에 앉아있는 청가람이 신기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소년이 지상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것 같달까. 왜? 빤히 바라보는 백건의 시선을 눈치챈 가람이 물었다. 백건이 노란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리고 단어를 툭 던졌다. 

"인간세계." 

가람이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백건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세계? 갑자기 왜? 백건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지 않냐? 별로. 가람이 가볍게 받아쳤다. 거기에 볼 것도 없는데. 정말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가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쌀을 찡그렸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넌 지상에 내려가고 싶은가 봐? 가람이 다과를 집어들었다. 한 입에 쏙 넣어 몇 번 오물거린 후 다 먹어버린 가람이 제 생각을 말했다. 복잡하고 머리만 아플 곳을 내려가느니 여기에 계속 있는 게 낫지. 인간들은 욕심많고 어지럽게 사니까. 그리고 딱히 가볼 데도 없지 않아? 생각나는 거라고는 중앙뿐인데. 다시 생각하면 거긴 볼 곳도 없고. 주인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실까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백건이 입을 다문 가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글쎄. 자신의 눈에는 조금 호기심에 들뜬 청가람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청가람. 백건이 가람을 불렀다. 그러면서 내심 궁금해하고 있지? 가람이 선홍색 눈을 들어 백건을 쳐다보았다. 백건이 피식 웃었다.  

"딱히 지상에 내려가본다고 해서 제재받는 건 아니니까. 어때? 너 조금 지쳐 보이는데."

 

새로운 자극을 받으면 힘이 날지도 모르잖냐. 기분전환도 할 겸.

가람이 백건을 쳐다보았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노란 눈. 한동안 백건을 쳐다보던 가람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3.

 

오랜만에 내려온 지상세계의 느낌을 한 단어로 압축해보자면, 똑같았다. 가람은 뒤에서 닫히는 청룡문의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걸었다. 이왕 내려온 것이라면, 어디로 가야 할까? 내려오기 전에 가람은 목적지를 생각했다. 기분전환을 하려 내려가는 거다. 전 청룡, 그러니까 제 아버지가 있을 집구석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그 곳은 끝난 인연이다. 집을 제외하고 자신이 갈 곳을, 더불어 약간의 추억도 상기할 수 있는 장소를 생각해보자면 딱히 중앙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람은 중앙으로 내려왔다. 

가람이 고개를 들어 저 앞에서 보이는 찻집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펄럭, 신비로운 푸른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사신의 옷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실까? 그랬으면 좋겠다. 살아계시면 인사를 드리고, 조금 말이나 나누고. 아. 걸어가면서 가람이 든 생각에 말을 뱉었다. 그러고보니까, 중앙에 다음 대의 사신 후계자들이 들어왔겠네.

 

"온 김에 청룡 후계자나 보고 갈까..."

 

 

얼마나 수련을 열심히 하는지도 봐야겠어. 응, 그래야겠다. 결론을 내린 가람이 가벼워진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느 새 찻집 앞까지 도달한 가람은 멈추어 섰다. 전통 찻집 둥굴레 라고 적혀있는 돌을 보니 괜시리 표정이 뭉근하게 풀어진다. 인간세계에 남아있는 유일한 추억의 공간. 가람은 한동안 그 앞에서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여전히 똑같구나. 중앙도 내 기억속에 남아있던 곳과 똑같을까? 생각에 잠겨있던 가람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우와."

가람과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얘는 뭐지. 가람이 제 옷자락을 꼭 잡은 채 눈을 깜박거리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한 쪽으로 짧게 땋은 검은색 머리, 그렇지만 자신과 비슷한 선홍색 눈동자가 시선을 끌었다. 예쁜 언니다. 언니? 가람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구겨졌다. 하지만 이 말을 들었다면 성질을 내며 아이에게도 버럭 화를 냈을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자신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가람이 입을 열어 아이의 발언을 정정했다. 언니가 아니라, 오빠. 아이의 눈이 깜박였다. 으응? 도무지 가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행동이었다.

 

 

"은영아!"

뒤에서 아이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람의 옷을 잡고 있던 아이가 입을 비죽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 처음 보는 사람의 옷을 그렇게 잡아당기면 안 돼. 이리 와. 은영이라는 아이가 가까워진 어머니의 손에 팔을 뻗었다. 여자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가족인가 봐. 가람이 눈을 들어 여자와 아이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사과했다. 학생, 미안해요. 조금 놀랐죠? 은영아, 어서 오빠에게 사과해야지. 여자아이에게 주의를 준 남자가 가람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며 쳐다보았다. 가람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눈이 약간 커졌다.

"...가.."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가?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자신들과는 많이 다르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을 텐데. 조금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가람은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검은 눈동자, 입가에 있는 조그만 점 하나. 여보, 왜 그래? 이상한 점을 느낀 건지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가람을 잠시 바라보던 은찬이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착각했어. 남자가 다시 사과를 건넸다.

"아이가 그쪽에 민폐를 끼친 건 미안해요."

"괜찮아요. 닳는 것도 아니니까."

 

가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찻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빠, 왜 그래? 뒤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아빠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아서 조금 놀란 것 뿐이야. 안으로 들어갈까?

 

가람은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딛으며 찻집 어딘가에 있을 할머니를 찾았다. 가게에 있으실까 해서 잠시 들여다보았으나 그 곳에는 찻집을 청소하고 있는 알바생 한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중앙에 계시겠지. 가람이 중앙으로 향하는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새로운 기분이 든다. 마치 자신이 예전에 이 곳으로 와서 수련하고 있을 때의 기억 같다. 예전과 똑같지만, 살짝 달라진 것을 눈치채며 걸어가던 가람은 저 앞에서 보이는 조그만 그림자에 반가운 웃음꽃을 피워냈다. 할머니! 가람의 목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몹시 놀라워하며 종종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네요."

"아니, 가람이가 아니냐. 이곳엔 왠일이냐?"  

할머니가 가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조금 기분전환도 할 겸 내려왔어요. 할 일은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혹시나 할머니가 타박할까 봐 재빨리 덧붙였다.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그래... 그러면 잘 됐지.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가람의 손을 어루만졌다. 자글자글한 손. 전보다 주름이 늘어난 게 보였다. 인간은 늙는구나. 가람이 재차 생각했다. 더 나이가 든 황순 할머니가 가람의 눈을 쳐다보며 오물오물 입을 열었다. 기분전환을 하려 내려왔다고 해도, 별로 볼 건 없을 텐데. 걱정하는 목소리에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여길 다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전환이 되는걸요. 그리고, 청룡 후계자를 보고싶기도 하고요. 가람의 말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 그 아이들은 지금쯤이면...

"매화장에서 수련하고 있을 시간이죠?"

"오, 은찬이도 왔구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응? 하고 고개를 돌린 할머니가 걸어오는 한 인영을 보고 반갑게 불렀다. 이 목소리는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인데. 가람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까 제 옷을 잡아당기던 아이의 아버지가 맞았다. 그런데 왜 여기 들어온 거지? 가람이 할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할머니, 평범한 인간이 여기 들어오게 놔둬도 되는 거에요? 황순 할머니가 가람의 말을 듣고 입을 떼려 할 때였다. 남자가 할머니 대신 대답했다. 귀가 어찌나 밝았던지, 가람의 말을 들은 듯 했다. 

 

"음, 평범하긴 하지만 평범하진 않으니까 괜찮은 것일지도?"

 

무슨 소리야. 가람이 눈쌀을 찡그렸으나 남자는 가람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할머니가 남자를 보고 말을 걸었다. 가람이도 보고, 은찬이 너도 보고 오늘은 참 신기한 날이구나. 그런데 은찬아, 네 가족들은? 은찬, 이라고 불린 남자가 대답했다. 아내와 딸은 찻집에 있어요. 아내가 여기 차를 정말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아내를 닮아서, 제 딸도 벌써부터 차를 좋아하는 것 같고요. 아직 그 나이에는 안 어울리는데, 그래서 사실 조금 고민이에요. 은찬이 하하, 웃었다. 시끄럽다. 가람이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예전에 쓰던 방을 기웃거려보니 이제는 타인의 흔적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와는 다르게 이 방의 주인은 정리를 잘 안 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대충 던져진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가람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 마루위를 거닐었다. 발바닥에 닿는 오래된 나무의 느낌이 생생했다. 기분전환, 기분전환. 눈을 깜박거리자 자신과 말다툼을 하는 백건의 모습이 투명하게 비추어졌다. 공자들, 뭐 이렇게 싸워대요. 시끄럽습니다. 그걸 말리는 현우의 모습도. 다시 깜박이자 환영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후계자일 때의 옛 기억들. 가람은 다시 신발을 신고, 매화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모퉁이에서 꺾고, 대나무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가고 나니 눈을 감은 채 정신수양을 하고 있는 네 명의 사신후계자들이 보였다. 조금 더 다가간 가람이 멈추어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애가 청룡 후계자군. 제가 입고있던 수련복을 입은 한 명을 발견한 가람이 그를 스윽 흝었다. 그 후에는 다른 후계자들도 쳐다보았다. 으으음, 가람은 가볍게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았다.

어디 얼마만에 알아차리나 볼까. 조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가람은 얌전히 앉은 채 기다렸다. 얼마 후, 인기척을 느낀 청룡 후계자가 눈을 떴다. 어? 바위 위에 올라앉은 채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가람을 발견한 남자애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다른 세 명이 덩달이 눈을 떴다. 여기에 일반인은 들어오면 안 될 텐데? 남자애가 장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누구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룡 후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람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지만, 칭찬해줄게. 누가 누구를 칭찬해? 저보다 어려보이는 꼬맹이에게 시건방진 말을 들은 소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금세 낯선 기운이 감돌며 가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스윽, 푸른 머리가 길게 나풀거리는 게 청가람 제 눈으로도 보였다. 어억, 청룡강림한 가람의 모습을 본 소년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설마.

"현 청룡......?"

...이런 꼬맹이가? 멍하니 흘러나온 말은, 청가람의 앞에서만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빠직, 가람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4.

"미, 미안, 아니, 죄송, 죄송하다구요!!"​

 

가람의 매서운 공격을 피하기 바쁜 청룡 후계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사과를 했다. 넌 그게 사과냐? 가람이 속으로 청룡 후계자를 씹었다. 젠장, 다음 후계 싹은 글러먹었어. 좀 고쳐주고 가야지. 내려와보길 잘했군. 가람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했다. 솔직히 애를 대상으로 전력으로 혼내주는 것은 못해먹을 짓이라 제 딴에는 한껏 봐주고 있었지만 지금의 청룡 후계자는 그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나 보다.

청룡 후계자의 얼굴 옆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챙챙챙, 창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싸우는 두 청룡을 바라보면서 다른 후계자들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현 사신이 지상에 내려와서, 청룡 후계자를 상대해주고 있는 장면은 정말 보기 힘든 희귀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심 속으로는 항상 잘난척을 하던 청룡 후계자가 저렇게 맥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조금 불쌍하기도 하고. 세 명의 후계자들이 잠시 후에 생각을 바꾸었다. 신나서 눈을 번뜩거리는 현 청룡, 청가람의 눈을 보니 저 인간을 상대하고 있을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때, 꼬맹이한테 밀리니까 좋아? 저렇게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는 것도. 하지만 현 사신과 한낱 후계자는 힘의 차이가 엄청났음으로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물론 청룡 후계자는 고래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새우겠지만. 그냥, 나서지 않는 게 최선책이지. ...아무리 화났다고 해도 자기 다음을 이을 후계자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챙챙, 금속음이 정신없이 울려퍼졌다. 휙휙 나는 바람소리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청가람의 몸놀림을 보던 주작 후계자가 저 쪽에서 걸어오는 주은찬을 보고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삼촌!"

 

삼촌? 싸우는 도중에도 착실히 들리는 대화들에 가람이 귀를 쫑긋 세웠다. 왠지 저 호칭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주작 후계자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도도도 은찬의 앞으로 뛰어갔다. 여긴 왠일이에요? 은찬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찻집에 들렀다가 잘 하고 있나 궁금해져서 한 번 와봤지. 가람이 동작을 멈추었다. 헉, 헉. 가람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급급하던 청룡 후계자가 가람에게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가람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가람이 창을 집어넣었다. 스스슥, 가람의 몸에 강림해있던 청룡 신령의 모습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살았다, 가람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진이 다 빠진 청룡 후계자가 늘어지게 한숨을 쉬며 땀을 닦았다. 멍청아, 그러니까 누가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으랬냐. 소근거리는 현무 후계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어도 당사자 앞에서는 함부로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다행히, 가람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저 인간. 가람이 주작 후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주작 가문의 인간이네. 그래서 아까 뭐라고 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거로군? 은찬이 시선을 돌려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부드럽게 웃음지어 보이자 청가람의 눈이 샐쭉하니 가늘어진다. 너,

"알고 있었어?"

"뭐를? 그쪽이 현 청룡이라는 거?"

 

정체가 들통난 터라, 자연스럽게 말을 놓아버린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잠시 얽혔다. 저거 봐라. 아까는 그냥 일반인이라고 생각해서 존댓말을 써준 거였지만, 자신이 청룡이라는 것을 안 이상은 더이상 높여줄 이유가 없었기에 가람은 막 밀고나가기로 했다. 그래! 가람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알았지. 청룡강림한 거 보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거야. 은찬의 말에 가람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알아낼 수 없었기에, 가람은 속아주기로 마음먹었다. 함부로 사신강림한 그 쪽이 말미를 준 거 같은데. 끄응,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삼촌. 주작 후계자가 은찬을 불렀다. 삼촌, 청룡이에요. 은찬이 손을 들어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응, 알아. 은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청룡이지, 현 청룡.

가람이 몸을 은찬의 쪽으로 돌린 채 물었다. 여기에 온 것도, 저 녀석을 보려고 온 거야? 가람이 손끝으로 주작 후계자를 가리켰다. 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반쯤? 가람이 말꼬리를 잡았다. 은찬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대답했다.

"집사람이 여기 차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가끔씩은 방문하기도 해."

 

그랬는데 여기서 사신을 보게 되다니, 엄청난 행운이지. 은찬이 말을 마쳤다. 자신을 드높여주는 듯한 말투에 가람이 흐흥 하고 콧김을 푹 내뿜었다. 그래, 알면 고마워 하라고. 지금 인간세계가 안전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건 나니까. 가람이 팔짱을 끼고 가슴을 죽 앞으로 내밀었다. 은찬이 웃었다. 그래, 고마워. 덕분에 마음놓고 살 수 있으니까. 은찬은 순순히 인정했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은찬은 가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빤히 봐? 은찬의 입에서 간격을 두고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청...룡."

"그래, 내가 청룡이다."

은찬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가람이 받아쳤다. 청룡... 은찬이 멍하니 되뇌였다.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닳아, 네가 부르면 닳으니까 부르지 마. 날카로운 가람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은찬은, 잠시 후 하 웃었다. 하하하, 은찬이 배를 잡아가며 웃었다. 웃겨? 무시당하는 기분에 가람이 발을 무섭게 쿵쾅거렸다. 아, 삼촌!! 괴팍한 청가람의 성격을 조금 전의 대련 -을 빙자한 구타- 으로 알고나서 불안해진 주작 후계자가 은찬을 타박했다. 하하, 하아, 미안. 은찬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아주 잘 하시는구만. 가람이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때, 은찬의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아, 기분 이상해. 끝이 없는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가람이 눈을 질끈 감고 은찬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청룡 후계자에게 쏘아붙였다. 너! 네, 네? 빠릿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가람이 으름장을 놓았다.

"열심히 수련해. 난 사신강림 16살에 했는데, 넌 그때의 나보다 나이 많이 먹었는데 못하고 있잖아."

이게 다 게으름을 부려서 그런 거지 뭐야. 열심히 해서, 빨리 사신강림도 하고 하늘나라로 빨리 올라와. 내가 위에서 지켜볼 거야. 그리고 농땡이치면, 다시 내려온다. 가람이 음산하게 내뱉었다. 가람의 협박에 청룡 후계자가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대답. 가람이 재촉했다. 네,넵 열심히 할게요. 가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좋아,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은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왠지 기분이 찜찜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목적은 다 이뤘고, 이만 돌아가야지. 가람이 청룡문을 불러냈다. 열린 청룡문을 보던 가람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전해줘."

 

가람이 사신 후계자들에게 남은 말을 전했다. 아아, 네. 어린 후계자들의 대답이 들렸다. 가람은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청룡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5.

지상세계,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밌었네. 가람이 청룡궁에 되돌아와서 생각했다. 흘러가는 지상 세계의 시간, 그리고 다음 대의 후계자들. 가람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청룡신을 불러냈다. 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이 곳이지, 가람의 머리카락이 푸르고 길게 변했다. 가람은 이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아주 오랫동안, 다음 대의 청룡 후계자가 사신강림을 하고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청룡 자리에서 물러난 가람은 처음으로 너무 평온해서 죽을 것만 같은 평안함을 느꼈다. 정말 좋다. 자신이 청룡이었을 때, 일거리가 쌓여있어서 조금 쉬러 나온 것과, 정말 일이 없어서 쉬는 지금은 천지차이였다. 이제 앞으로는 탱자탱자 노는 것밖에 남질 않았군. 가람이 볼을 부풀렸다. 푸우, 숨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백건과 주작은 자신이 물러나는 때와 같이 현 사신의 자리에서 은퇴했고, 현우도 1년 뒤 사신의 자리에서 은퇴했다. 가람이 시냇물에 발을 담갔다. 가만히 있자니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지상세계에 내려갔을 때의 기억이. 그 녀석들이 지금 다 커서 사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니, 재밌는걸.

가람은 이렇게 멀리까지 저를 데려다준 이무기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이무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몇 번 쓰다듬었다. 가람의 행동에 별 거 아니라는 듯 공중에서 또아리를 한번 튼 이무기가 몸을 틀어 움직였다. 사라져가는 이무기를 잠시 바라보던 가람이 발걸음을 옮겨 오색산을 올라갔다. 신선들이 피리를 부는 소리가 몽롱하게 들려왔다. 좋네, 이런 평화로운 기분. 사신의 일에 치이느라 전에는 오지 못했던 산을 와서 기분이 좋았다. 가람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가 부드러운 가락을 듣고 날아와 가람의 어깨에 앉았다. 가람은 제 어깨에 날아와 앉은 조그만 새와 함께 거닐었다.

 

"어."

걸음을 옮기던 가람은, 옆에서 반짝이는 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가람이 몸을 숙였다. 그래, 하늘나라가 얼마나 넓은데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지. 가람이 오색꽃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따릉, 맑은 소리가 나며 꽃잎이 흔들렸다. 소리도 나네, 예쁘다. 가람이 꽃을 꺾어들어 코에 가까이 했다. 향기 좋다. 가람이 깊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 꽃봉오리 한가운데에 박혀있던 작은 보석이 터지며 화한 향기를 뿜어냈다. 윽, 이게 뭐야! 갑작스럽게 바뀐 향기에 가람이 손에서 꽃을 떨어뜨린 채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함부로 꺾으면 이상한 향기를 뿜어내는 건가 봐, 지독한 향으로 바뀐 걸 빼고서는 달라진 게 없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머리가 쨍 하고 울리더니, 기억이 급속도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백건, 현우, 그리고 자신뿐이었을 터였다. 중앙에서 후계자들끼리의 기억은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의 기억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붉은 머리를 가진 한 사람이 생겨났다. 식사도 같이, 수련도 같이. 중앙에서의 기억에는 '주작 후계자'가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주작 후계자는 잘못되어서 중앙으로는 오지도 못했는걸. 그런데 이 기억들은 뭐지? 왜 네 명의 사신 후계자들이 있는 거야.

이게 뭐야, 뭐야, 뭐야. 가람이 머리를 싸맸다. 청가람!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는 어떤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6.

'멍걸이 산책시켜야 하는데.'

'그건 네가 해.'

'같이 하고 올래? 같이 가자, 가람아.'

 

은찬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날씨 딱 산책하기에 좋은데 말이야. 응? 저러면서 살살 구슬리는 말이라,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너나 가. 주은찬은 제 말을 무시한 채 덥석 손을 잡았다. 같이 가자, 같이 가주는 거지? 좋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주은찬을 보고서는 혀를 찼다. 저럴거면 왜 물어봤어? 차라리 물어보질 말지. 웃는 자신들의 모습, 같이 수련을 하는 모습, 조용한 달빛 아래에서 키스를 하는 자신들의 모습.

 

그리고.

잘 가, 얘들아. 하늘문이 열리고, 나와 백건과 현우는 하늘나라로 올라갈 준비를 한 채 뒤를 돌아봤다. 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언제쯤 올라올 것 같아? 기다릴게, 기다리고 있을게. 자신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기다린다고, 빨리 사신강림을 해서 하늘나라로 올라오라고. 너는 반드시 해낼 거라고, 믿는다고. 하지만, 너는 확답을 주지 않았었다. 그저 웃었잖아, 주은찬.

네 머리색은 곧 검은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아. 주작 후계자의 증표는 온 몸의 털이 빨간 거래. 내 머리카락, 불타는 것처럼 빨갛지? 그랬던 네 말이 기억나지만 주은찬. 난 알아, 은찬아. 네가 사신 후계자의 자격을 박탈당해 검은 머리를 지닌 채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거라는 것을 알아.

알아, 알아, 난, 위로 올라가서도 하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널 그리워할 것이라는 걸 알아. 하늘문이 닫히고,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예전에 우리가 중앙에 같이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와서 한 여자를 찾았지만 기억해낼 수 없었던 어떤 신선의 이야기처럼, 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 알아, 왜냐고? 난 인간이 아니니까, 용족이니까.

모든 게 기억났어, 지금.

그 모든 순간이 기억났어, 네가.

예전의 소중했던 순간들이 기억났어, 보고싶어.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하늘문을 열었다. 이제는 사신도 아니라, 맘대로 하늘문을 열어버리는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은 문책을 받을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예전에, 지상으로 내려갔을 때 우연히 마주쳤던 주은찬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였었지, 그리고 나이를 먹었었지. 그때 네 얼굴, 놀란 네 얼굴. 나를, 나를 알아본 거였어. 난 너를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지금의 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7.

한 주택 안이었다. 가람은 멍하니 서서 보이는 집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오던 한 여학생이 갑자기 집 안에 나타난 가람을 보고 깜짝 놀라 손에 들고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쿠르릉, 가람의 등에서 서서히 닫히던 하늘문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낯선 침입자에 놀라서 나올 비명소리나, 누구세요 라는 그 흔한 말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여학생은 한참동안이나 자신 또래의 모습을 한 가람을 바라보았다. 하나로 묶어내린 긴 검정 포니테일 머리, 잠시간의 정적 속에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깜박거리는 선홍색 눈.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학생이 먼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람에게는 조금 뜻밖이었다.

 

"나, 그쪽 본 적 있어요."

 

 

가람은 그저 말을 들었다. 처음으로 말을 건넨 여학생은 몸을 숙여 떨어뜨린 책을 주워들었다. 가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전통 찻집에 갔던 날. 그때 그쪽을 봤거든요. 푸른 하늘옷을 입은 채 서 있는 아름다운 사람을. 입고 있던 옷이 특이해서 기억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죠. 요즘,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가람도 동시에 기억을 떠올렸다. 와아, 하며 제 옷자락을 잡아당긴 어린 여자아이 하나. 그 아이가 커서 이렇게 된 건가.

여학생이 책을 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학생이 마저 계단을 내려오다가, 두 칸을 남겨두고 멈추었다. 다시 정적. 가람은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내가 본 문, 혹시 하늘문인가요? 질문에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학생은 가람에게서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엄마는 볼일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오늘은 주말이라, 저는 학교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 거고요. 가람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너나 네 어머니나.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모르는 사람의 행방이 아니야. 가람이 천천히 입을 떼어서, 가장 원하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네 아버지, 주은찬은?"

목소리가 기대감에 떨리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가람은 여학생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여학생이 눈을 깜박이며 가람을 쳐다보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래, 주은찬은 어딨어. 빨리 알려줘. 주은찬이 어떻게 변했을까 난 그게 너무 궁금해. 후, 그녀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이윽고 여학생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버지께서는,

"-반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기대감에 마구 방망이질하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피가 싸늘히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가람의 눈이 멍해졌다. 지금 뭔가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돌아가셨다, 죽었다.

가람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학생이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는 슬픔이 완전히 치유가 되지 않은 것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눈 앞으로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여학생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충격받은 표정의 청가람에게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빠는, 작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완치가 불가능했죠. 늦게 발견해서 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하더라구요. 여학생의 눈이 가라앉았다.

병원에서 병명을 진단받고서, 아빠는 웃었어요. 웃었다고? 가람이 속으로 되뇌였다. 가람의 표정을 읽은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웃었어요. 그냥 단순히 며칠 정도 쉬면 될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후, 의사에게서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은 후에 아빠가 처음 내뱉은 말은 이거였어요. 여학생은 말을 이었다. 벌이구나, 라고.

"아빠는 자기가 벌받는 거라고 했어요."

 

선홍색의 눈동자가 더 깊게 가라앉았다. 벌이라니, 아빠는 평생 남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살았으면 살았지, 미움받을 이유는 없을 텐데 벌이라니. 물어봐도 대답해준적은 없지만,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해요. 여학생이 가람을 쳐다보았다. 우리 엄마, 그쪽이랑 정말 많이 닮았거든요. 말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보드라운 갈색 머리, 선홍색의 눈. 분위기는 다르지만, 외모는 그쪽이랑 정말 많이 닮았어요. 아빠도 분명 그런 엄마에게 끌린 거겠죠. 엄마 자체에 끌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닮은 엄마에게. 여학생이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를, 닮은. 가람의 입속으로 되뇌였다. 여학생이 몸을 살짝 틀어 난간을 짚었다. 

 

"그쪽에게 줄 게 있어요. 잠깐 나 따라올래요?"

 

여학생이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라가며 가람에게 손짓했다. 가람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올라갔다. 걸어올라가고는 있었지만 정신은 멍한 상태였다. 주은찬이 죽었다니. 당연히 인간은 언젠가 죽고, 그게 자연의 섭리인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죽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 더 나이가 든 주은찬을 예상했을 뿐이다. 얼굴에 주름이 생겼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신을 보면 놀라워하며 반겨줄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너는 아직 열여섯 살 그대로구나 하고 웃을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요, 가지고 나올게요. 여학생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가람은 세월이 새겨진 벽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배된 칠이 약간 벗겨져있는 벽. 상처다. 상처....지. 가람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방에 들어갔던 여학생이 조그만 나무상자를 들고 나왔다. 받아요. 가람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가벼웠다.

 

"아마, 그쪽의 것이 맞을 거에요."

가람이 상자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여학생이 말을 이었다. 아빠는 자신이 죽으면 그 상자 통째로 태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니, 여자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간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언젠가 그쪽이 내려올거라는 걸 알았거든요. 가람은 상자에서 고개를 떼고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눈동자였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 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지어 내가 죽은 후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그쪽이 올거라고 생각했고, 결국 내 생각은 맞았네요. 여학생이 싱긋 웃었다. 상자, 열어보지 않았어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아빠만이 알겠죠. 가람이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아빠가, 여학생이 잠시 말을 흐렸다. 목이 메어 말을 삼키는 행동이었다. ..아빠가, 여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묻힌 곳은 주작 가문의 조상들이 묻힌 곳이에요."

길을 알려줄게요. 갈 거죠? 여자아이가 미소지었다. 가야만 해, 아빠가 보고싶어할 테니까.

 

8.

주작가의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 가람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만개한 벚꽃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움직이며 벚꽃잎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가람은 계속 올라갔다. 사신강림을 해서 하늘나라로 올라간 주작 후계자들의 이름은 당연히 없고, 주작 가문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묘들. 가람의 발걸음이 한 묘 앞에서 멈추었다. 주은찬의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 가람이 그 앞에 스르르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묘비에 새겨져있는 이름을 조각조각 어루만졌다. 여기에 네 이름이 있으면 안 되는 건데....왜 있는 걸까.  

"이게 너구나...."

가람이 중얼거렸다. 목이 콱 막혀온다. 아프다, 아파. 하늘나라 주민인 자신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처럼 병에 걸릴 일은 없을 텐데, 지독한 병에 걸렸나 보다. 그래, 그런 건가 보다. 주은찬, 주은찬. 묘비를 어루만지는 가람의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은찬아, 내가 왔어. 일어나서 날 봐봐. 보고 싶잖아, 보고 싶어했을 거잖아. 가람이 묘비를 부둥켜안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왜, 내 말에 대답해 주지 않는 거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람의 눈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조그만 흰 꽃송이들이 사르르 피어났다. 주은찬, 주은찬, 주은찬 내 소중한 사람, 주은찬. 원망해? 누구를. 주술을 걸어 내 기억을 지운 현우를? 그에 동조했던 백건과 선대 주작을? 아니, 그것보다는. 후회해? 지금 이 순간을? 아니, 전을 후회해. 조금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네가 살아 숨쉬는 공기를 들이쉴 수 있었더라면. 아니,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우연히 마주쳤던 너에게 어떤 말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주은찬. 은찬아, 라고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았을 것을.

가람이 목놓아 울었다. 눈물이 끝없이 펑펑 흘러내렸다. 가람의 슬픈 울음소리를 따라 나무들도 울었다. 아름답게 피어있던 벚꽃들이 하나둘씩 나무에서 떨어져 날아와 가람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름답지만 슬픈 광경. 너는 이제 더이상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너의 숨결도 이미 공기중으로 숨어버린 지 오래라 느낄 수 없고, 너의 육신도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버린 지 오래라 느낄 수가 없다.

주은찬, 은찬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작은 새가 되어 내가 있는 하늘나라로 와줄 수 있니.

가람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손에 들려있는 편지가 너덜거렸다.

 

 

9.

청가람에게.

 

가람아, 안녕. 주은찬이야. 이렇게 편지로 너에게 말을 전하려니 어색하네. 오랫동안 너에게 말을 하지 않다가, 말을 하려니 조금 어색해. 그래도 이제 너에게 내 목소리를 전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 편지로 남겨.

그 때, 너희들이 사신강림을 해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를 기억하고 있니? 어쩌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신이 된 후에는 분명히 할 일이 매우 많아서, 그런 사소한 것을 일일히 기억하고 있기에는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난 그때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아주 생생하게,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사실, 난 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그 모습이 마지막인 줄 알았어.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나는 네가 나를 바라보며 지었던 표정을 아주 잘 기억해. 하늘문이 닫힌 후, 내가 주작 후계자의 징표를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동안.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동안, 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어. 그래서 11년 전에, 중앙에서 마주친 너를 보고 매우 놀랐어. 설마, 살아 생전에 너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너는 그 모습 그대로더라. 나는 나이를 먹고, 조금씩 세월에 끌려가는데. 

재미없겠지만, 내 이야기를 조금 해 보자면, 나는 너를 닮은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어. 내 아이는 너도 본 적이 있을 거야, 네 푸른 옷자락을 잡아당겼던 아이지.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나는 사신으로서 화려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들 하잖아. 하하, 이거 네가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 그래, 사신의 일은 차원이 다르게 힘들겠지. 그래도 너는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해.

하나 더, 말할 게 있어. 나는 곧 죽을 거야. 암이라는 선고를 받았거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대.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이건 벌일지도 몰라. 너에게서 기억을 지웠지만, 나는 너를 생각하며 계속 살아가는 한 이기주의자에게 주어지는 벌. 그리고 그 이기주의자에게 희생당한 내 아내와, 많은 사람들이 내린 벌.

이 편지가 불태워지면, 네가 살고있을 청룡궁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 목소리를 담은 새가 날아가 너의 귓가에 지저귀며 나의 마지막을 알려줄 수 있을까. 몇십 년을 거짓말로 점철하며 살아왔으니까. 마지막은, 솔직해야겠지? 미안해, 여보. 가람아, 너를.

 

 

죽어서까지도 사랑해.

'찬가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가람] 1937초  (2) 2014.12.07
[찬가람] side memory  (0) 2014.11.30
[찬가람] 잿빛 세계(둥차 전력60분)  (0) 2014.11.22
[찬가람] 스트로베리 키스  (0) 2014.11.21
[찬가람] 잃어버린 시간  (0) 201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