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은찬은 유난히 존재감이 강했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키를 가졌음에도 은찬은 남들의 눈에 잘 띄였다.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 은찬이 숨어있더라도, 존재감이 큰 탓에 주변 사람들은 은찬을 단시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리 날 빨리 찾아왔어? 하는 은찬의 물음에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냥 네가 눈에 확 띄더라, 하고 대답했다. 주은찬의 이미지만 놓고 본다면 왠지 눈에 잘 띄지 않을 것 같고, 평범한 사람중의 평범한 사람이라 옆에 있어도 모를 것 같다고 주변인들은 입을 모아 답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주은찬은 존재감이 강한 사람들 중에서도 강한 편이었다.
청가람은 유난히 존재감이 약했다. 딱히 애써서 자신을 감추고 다니는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람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가람을 바라보면 청가람은 남들과 구별되는 톡 튀는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게 되면 가람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난히 튀는 사람인데도 그랬다. 주변인들은 그냥 청가람의 이미지만 놓고 본다면 어딜 가서든지 눈에 쉽게 띌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친구들은 너는 왜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찾기가 어렵냐고 투덜댔다. 가람은 그런 말을 듣고 그저 피식 웃어보일 뿐이었다.
주은찬은 남달리 청가람을 잘 찾아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을 상황에서도, 반대로 웬만한 사람은 생각치도 못한 장소에 가 있는 청가람이라고 해도, 주은찬은 가람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은찬의 귀신같은 능력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청가람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수많은 군중 사이에 파묻혀있는 가람을 단시간에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쩜 그렇게 너는 청가람을 잘 찾아내느냐, 라고 물어도 은찬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2.
세상은 수없이 많은, 다양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풍이 들 때의 붉은색,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는 푸른색, 싱그러운 풀들이 자라나는 초록색 등등으로. 하지만 한 사람, 주은찬에게만은 다양한 색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은찬에게 세상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잿빛 세계였다. 은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마치 예전에 존재하던 흑백 티비에 나오는 사물들과 유사했다.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주은찬 혼자만 색이 있다는 것이었다. 은찬이 알고 있는 색이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은찬의 머리색이 빨간색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상한 색이 '빨간색'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의 색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으나 알 방법은 없었다. 살색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으나 그 살색이라는 것이 여러가지의 다양한 색으로 모두 불린다는 것을 알고 혼란스러워졌다. 살구색이라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었으나, 역시 그것 또한 은찬에게는 살구라는 것이 회색으로 보였기에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은찬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색은 '빨간색 뿐'이었다. 그렇기에 주은찬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뒤바뀔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청가람은 주은찬이 알고 있는 유일한 '색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청가람만이 다른 사람들처럼 회색 인간이 아니고, 자신처럼 생기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가람을 처음 보았던 때는 대학교 입학식때였다. 우글우글 몰려있는 학생들 사이로,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자 은찬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 난 후, 다시 그쪽을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은찬은 제 눈이 잘못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저 사람이 자신처럼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입학식 내내 은찬은 자신처럼 찬란한 색을 가진 사람이 앉아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애에게 달려가 넌 대체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마지막 말이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찬은 그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앉아있는 그대로 그사람이 앉아 있는 쪽을 계속 쳐다보았다. 혹시나 놓칠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회색들 사이로 보이는 밝은 색이 그 애가 여전히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4분의 3정도가 빠져나갔을 때쯤에야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강당을 빠져나가 그 사람을 찾았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뒤에서 누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은찬은 빛나는 사람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할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까. 저기, 잠시만. 그쪽은 남들과 좀 다른 것 같은데...잠시 시간 내줄 수 있어? 이렇게 시작할까? 은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들과 달라서 뭐 어쩌라고. 도를 믿습니까? 같다. 대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좋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도 부질없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은찬이 그 애의 어깨를 잡아챈 순간이었다. 저기, 잠시ㅁ....
약간 놀란 시선이 자신을 돌아보아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잡아챈 순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온갖 색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회색 세계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다양한 색을 가진 세계가 눈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에 은찬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당황한 남자가 은찬을 잡아챘다.
"괜찮아?"
차갑지만 조금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찬이 머리를 작게 흔들며 대답했다. 아, 미안..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만. 은찬은 자신을 잡아챈 남자의 손을 떼어냈다. 그와 동시에, 세계는 다시 잿빛이 되었다. 은찬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어딘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얼굴 한가득 하고 있는 남자. 여전히 그 사람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있었지만, 그와 자신을 제외하고서는 세상은 잿빛인 채였다. 좀 전은 뭐지? 은찬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계속 있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은찬이 입을 열었다.
"혹시 학생식당이 어딘지 아나 해서..."
입에서 나온 말은 처음보는 사람을 굳이 불러서 물어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도 자신과 같은 신입생이니, 알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은찬은 변명거리로 그말을 택했다. 주은찬의 물음에 남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미안, 나도 잘 모르는지라...신입생이어서. 은찬은 남자의 말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아, 나도 신입생인데! 그러면 같이 학생식당 찾으러 갈래? 점심시간이라 같이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은찬의 말에 남자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은찬은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 모르는 얼굴들이라, 우리 지금부터 친해져보자! 은찬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은찬의 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며 답했다. 그래, 그러지 뭐. 두 손이 맞닿았다. 다시 주은찬의 세계는 온갖 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주은찬이라고 해. 이름이 뭐야?
청가람.
3.
은찬은 가람에게 스킨십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가람의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입학식날부터 친해진 둘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다녔다. 과 담당 교수들은 은찬이 혼자서 수업을 듣거나, 가람이 혼자서 수업을 듣고 있는 경우에는 네 파트너는 어디다가 놓고 왔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것은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두명은 지겹도록 붙어다녔다. 강의실과 강의실을 옮겨가는 와중에도 은찬은 끊임없이 가람에게 스킨십을 했다. 가람아, 저기로 가야되는 거 같은데. 은찬은 손목을 붙잡고 가람을 끌고 갔다. 가람은 얌전히 은찬에게 끌려다녔다. 손을 잡은 채로 걷기도 했다.
첫인상과는 달리 청가람은 꽤나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활발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또한 우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가람도 은찬과 같은 기숙사 방을 썼다. 가끔 주은찬이 끝없는 과제를 하다가 깜박 잠이 들면, 가람은 책상에 켜진 스탠드 불을 끄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조용하지만 여유롭게 흘러가는 학기생활, 그리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색채의 세계.
어느 날, 가람은 은찬에게 물었다. 주은찬, 왜 이렇게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해? 은찬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마음이 편해져서. 가람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냥 문득 생각나서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가람도 은찬이 제 손을 잡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주은찬의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만큼 포근하고, 단단했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가람은 은찬의 손을 잡을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은찬이 먼저 손을 잡지 않아도, 제가 먼저 손을 잡기도 했다. 아무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존재감이 미약한 가람이 은찬의 옆에 붙어서였을까. 그래서 둘은 굳이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있잖아, 청가람."
"응, 왜?"
은찬의 말에 가람은 앞에 두던 시선을 돌려 은찬을 쳐다보았다. 청가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잿빛 세계였다. 왜 그런 걸까?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을 알아내지 못한 은찬은 가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조용히 바라보던 은찬이 대뜸 가람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은찬의 세계가 다시 물들었다. 아, 역시 모르겠어. 예쁘게 물든 세상이 아름답다.
"역시 그 때 널 잡길 잘했어."
은찬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제 옆모습을 바라보는 가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은찬은 다시 가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청가람도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은찬은 교수가 말하는 것을 필기하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청가람을 만난 건 기적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세계를 죽을 때까지 볼 수가 없었을테니까.
주은찬에게 청가람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랬다. 왜냐하면 가람은 자신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청가람은 주은찬에게 가치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매개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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