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초
1.
"....."
은찬은 매우 지친 눈으로 하릴없이 공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공중에서 무언가가 퐁 하고 나타나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하는 듯이. 비즈니스 석은 꽤 쾌적한 편이었다. 그리고 또 조용하고 한적하다. 콩나물 시루에 콕 박혀있는 듯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한참을 불편하게 날아가야 하는 이코노미 석과는 차원이 다르다. 스튜어디스들이 조금 더 친절하기도 하고 말이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옆으로 열린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직도 구름 위인 듯했다. 자신이 떠있는 비행기는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아까는 바다 위였는데, 지금도 바다 위일까. 몇 시간을 바다 위를 비행하며 날아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런 것쯤은 영원히 상관없었다. 은찬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4시. 비행기가 비행을 시작한지 약 2시간이 지난 후였다. 로스엔젤레스까지 도착하기에는 9시간 정도가 더 남았지만 실제로는 10분정도만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은찬은 자신이 타고 있는 이 비행기가 앞으로 7분 38초 뒤면 폭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도,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 갇힌 시간, 그리고 반복되는 몇십 번의 똑같은 장면. 은찬은 32분 17초간의 반복되는 시간을 현재, 174번째 겪고 있었다.
주은찬은 처음, 1시 45분에 한국을 떠나는 로스엔젤레스행 비행기를 탔다. 가방을 윗 칸에 넣고서는 비즈니즈 석에 앉아서 비행기가 이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끄라는 기내방송이 나오기 전에 미리 끄고 두 손을 얌전히 깍지낀 채 앉아있었다. 11시간의 비행은 꽤나 지루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루함을 대비하기 위한 책 두 권이 가방 속에 들어있었지만, 솔직히 저 책을 과연 읽을지는 잘 몰랐다. 아무튼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를 떠났고, 이륙하면서 기체가 조금 기울어지는 듯 하더니 몇 분뒤 다시 평형을 되찾으며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표시가 떴다. 기나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단은 지난밤에 부족했던 수면보충을 위해 은찬은 잠시 눈을 붙였다. 그 때 시각은 2시 3분이었다.
약 한시간 반 뒤, 은찬은 눈을 떴다. 3시 34분. 그다지 길게 잔 것도 아닌데 그냥 눈이 떠졌다. 몇 시간쯤은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별로 지나있지 않아서 은찬은 한숨을 쉬었다. 막 자서 그런지 바로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은찬은 고개를 살짝 돌려 창가에 앉은 사람 옆으로 보이는 조그만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은찬은 턱을 괸 채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관찰했다. 안경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남자.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것을 바라보니 그래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금융쪽 사람인가. 기체가 약간 덜컹거렸다. 남자의 펜이 옆으로 톡 털어졌다. 은찬은 고개를 돌려 이제 제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은 채 소매를 약간 걷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넣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지나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은찬이 아니요, 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물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문득 목이 타서 은찬은 그렇게 부탁했다. 스튜어디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몇 분 뒤, 생수를 가져다주었다. 은찬은 목을 축인 후 뚜껑을 돌려 닫고 간이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은찬이 다시 몸을 뒤로 빼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오랫동안 여행해야 하는데 이코노미 석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겠다. 그곳은 자리도 좁아서 맘대로 다리를 뻗지도,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어 시끄러울 테니 휴식을 푹 취하기도 어려울 텐데. 은찬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4시 7분. 아직도 멀었군.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면 시차가 있을 테니.. 시간을 맞추는 건 그때 해야겠다. 옆자리 남자는 이제 책을 읽고 있었다. 은찬이 그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끗 들여다보다가 눈을 돌렸다. 다시 잘까. 고민하는 사이에,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불어닥쳤다.
2.
헉!
은찬이 눈을 번쩍 떴다. 은찬이 발작적인 행동을 취하자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은찬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옆자리 사람이 그러든지 말든간에 은찬은 지금 매우 혼란스러웠다. 뭐야, 뭐야. 비행기가 터졌던 것 같았는데. 꿈이었나? 은찬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3시 39분. 은찬의 얼굴이 굳었다. 왜? 투욱, 무언가가 희미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찬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쓰며 노트북을 바라보던 남자가 떨어진 펜을 주워들었다. 은찬이 고개를 돌렸다. 앞의 손님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스튜어디스가 보였다. 아까 보았던 광경이다. 은찬이 왼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소매를 걷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넣고 있던 남자가 은찬의 행동에 살짝 눈을 들어올리더니 코끝을 찡그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은찬이 제 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3시 43분. 왜 나는 과거로 돌아와 있는 거지? 스튜디어스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은찬에게 다가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은찬은 스튜어디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머리를 틀어올린 여자, 저 얼굴, 저 말. 아까 분명히 들었던 말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손님?"
스튜어디스가 재차 물었다. 은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은찬의 말에 스튜어디스가 그럼 혹시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하고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갔다. 4시, 4시 7분, 4시 10분, 4시 10분 5초, 4시 10분 10초... 그리고 다시 비행기가 폭발했다.
은찬이 네 번째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시계는 3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의 반복된 시간을 통해, 비행기가 4시 10분 17초가 되면 폭발한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리고 폭발한 후 눈을 뜨면 3시 38분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눈을 뜨면 옆자리에서 남자가 펜을 떨어뜨리고, 앞자리에 스튜어디스가 손님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와 필요한게 있냐고 질문을 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시 10분이 조금 지나면, 비행기는 상공에서 터진다.
여기서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서 비행기가 폭발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폭발물이 분명 어디엔가 실려있을 것이었다. 째깍째각, 소름끼치도록 정확한 시곗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어쩌면 비행기가 폭발하지 않는다면 이 반복되는 시간이 끝날지도 모른다.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승객들이 앉아있는 사이사이를 다 뒤지고 다녔다. 비즈니스석을 먼저 찾고, 심지어 조종석도 마구잡이로 가보고, 사람들로 가득찬 이코노미 석도 갔다. 뭐라 항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을 폭발물을 찾는 사이에 다시 비행기가 터지고, 다시 시간이 되돌아가 눈을 뜨면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짐들, 바닥, 사이사이를 뒤지고 다녔다. 어차피 반복되는 시간이라 다시 눈을 뜨면, 이 모든 것들은 없던 일이 된다.
은찬은 맘 놓고 헤집었다. 그 와중에는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아서 비행기가 폭발할 때까지 묶인 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고, 싸움이 붙어 이가 몇 개 나간 때도 있었다. 여자화장실에 폭발물이 있을까 해서 들어갈 때는 변태로 오인받았었기도 했다. 그렇게, 비행기가 몇십 번 폭발하고.
"저기요, 당신!"
짐들을 내팽겨치며 폭발물을 찾는 은찬의 행동에 사람들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폭발하고.
56번째, 89번째, 133번째. 은찬은 반복해서 눈을 떴다. 이제 찾아볼 구역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폭발물을 찾아내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일단 하지 않기로 했다. 밖으로 던져버리나? 하여튼 그것은 찾은 후에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은찬이 복도를 걸어다녔다. 기체가 약하게 흔들렸다. 째각, 초침이 움직이고 비행기가 149번째 폭발했다.
찾을 곳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159번째로 비행기가 폭발했을 때, 은찬은 가설을 세웠다. 이 비행기 '안에'는 폭발물이 없다고. 그럼 어디에 있을까? 비행기 동체 윗부분에 붙어있을지 몰랐다. 아니면 날개 뒤에 붙어있던가. 그것도 아니면? 하여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비행기가 171번째 폭발했다. 은찬은 이제 그냥 끈을 놓기로 했다. 째각, 시간이 흘러갔다. 비행기 어딘가에 있을 폭발물이 터졌다. 173번째로 비행기가 폭발했다.
3.
다시, 처음으로. 주은찬은 174번째 눈을 떴다. 은찬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지쳤다. 아주 지쳐서 이제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차피 32분 후에는 죽을 것이다. 뭔 짓을 해도 바꿀 수가 없고, 제 힘으로도 이 비행기를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은찬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다 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을 작정이었다.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은찬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넣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은찬은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책의 제목을 본 은찬이 말을 걸었다.
"그거, 읽나봐요?"
남자가 은찬의 목소리에 책을 피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 턱끝으로 책을 가리켰다. [개미]. 책 표지에 턱하니 적혀있는 단어를 보면서 은찬이 입을 비죽였다. 그 책 되게 재미없는데. 이 현실이 너무 짜증나고 절망그러워서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고 싶었다. 은찬은 그렇게 옆자리 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거 읽는 건 순전히 시간낭비에요, 그렇지 않나요?
"전 괜찮던데요."
남자가 조금 톡 하고 쏘아붙였다. 시간낭비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은찬을 무시한 채 책을 펼쳐들었다. 팔랑팔랑, 자신이 표시해놓은 곳까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은찬이 턱을 괸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갈색 머리, 오똑하게 솟은 콧날, 깜박이는 선홍색 눈동자. 남자가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은찬은 그냥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장 더 넘기며 읽던 남자는 이번에도 페이지를 넘기려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결국 은찬의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쳐다보는 것 좀 그만둬 주실래요?"
짜증이 가득 섞여나오는 두 쌍의 선홍색 눈동자가 은찬을 향했다. 은찬이 아무생각없이 뱉었다. 왜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요, 라뇨. 신경쓰여요. 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요. 은찬이 남자의 말을 듣다가 대답했다. 그럼 집중하지 마요. 예?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말을 따다다 쏘아붙였다. 한낱 책일 뿐인데, 집중해서 어디다가 써먹으려고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시간낭비에요, 그런 쓰레기같은 책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남자가 은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
남자가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주은찬에게 고정하면서. 지금 그쪽, 나한테 화풀이 하는것 같은데요.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지금 여기 비행기 안에서 처음 봤고, 따라서 당신에게 어떤 잘못을 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내가 그쪽의 화를 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지금도 내가 그쪽과 말하는 이유도 순전히 당신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죠, 시비거는 말로.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생각해봐요. 무엇이 문제인 건지. 만일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면 화낼 필요가 전혀 없어요. 화풀이할 필요도 없고요."
그게 무슨일이던 간에, 반드시 해결될 테니까요. 길게 말을 끝낸 남자가 은찬을 쳐다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은찬은 그저 선홍색 눈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책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은찬은 그 이후로 남자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흘러가, 비행기가 폭발할 때까지 남자도 다시는 은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4.
또다시 노트북을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던 남자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은찬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은찬은 이제 저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청가람. 은찬은 가람이 가방속에서 책을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팔랑 팔랑, 책장이 넘어갔다. 스튜어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은찬이 고개를 돌려 미소지으며 부탁했다. 물 좀 주시겠어요?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가람은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안 만나는 게 나을 걸요."
그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몇달동안 있다가 질린다고 재차 당신 곁을 떠나겠죠. 그렇게 상처를 주고 떠나고, 옆구리가 시리면 다시 연락할거에요. 그저 당신을 가지고 다니기 편한 장식품 쯤으로 취급하는 거죠.
저 말이 맞다. 현우는 원래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부드러운 척'하는 것일 뿐이다. 조금 외롭다고, 그러는 것이다. 만나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 말을 듣고 결심이 섰다. 그러다 가람이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뚜껑을 돌려 생수통을 간이탁상 위에 올려놓은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물통을 들어보였다. 왜요? 물 마실래요? 가람이 입을 열었다.
"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뭐를요?"
"그니까...지금 말한 거."
"현우,라는 남자 이야기요?"
가람의 눈이 깜박였다. ...어떻게 이름도 알고 있는 거죠? 가람은 경악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어떻게, 라면. ..그쪽이 먼저 알려주었으니까? 뒤에는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가람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가람이 날선 목소리로 부정했다. 내가요? 그런적이 없는데요? 난 지금 이 대화가 처음이라고요. 지금 그쪽과 처음 하는 대화인데 어떻게 내가 하는 생각을 알아맞추고, 또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은찬이 가람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쪽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 대화가 처음이겠죠. 하지만 나에게는 이 대화가....벌써 200번이 다 되어가요. 가람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미친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 그쪽 이름도 알고 있어요. 청가람이죠? 가람이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은찬이 허리를 숙여 떨어진 책을 주워주었다. 은찬이 가람에게 책을 내밀었다. 하지만 가람은 그 책을 받지 않았다. 가람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당신, 스토커야?"
"아니라니까요."
은찬이 씁쓸하게 웃으며 가람의 무릎 위에 책을 올려주었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잠깐 이야기해줄게요. 은찬이 입을 열었다. 이 비행기는 4시 10분을 지나면 폭발해요. 은찬이 친절하게 시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리고 그 후에 눈을 뜨면, 나는 폭발 32분전인, 3시 38분으로 돌아와 있죠.
저기 옆에 안경을 쓴 남자 보여요? 은찬이 소근거렸다. 지금 곧, 안경을 벗고 머리를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길거에요. 가람이 은찬이 가리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랬다. 남자가 한숨을 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은찬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위에 놓인 가방을 찾아요. 다시, 은찬의 말이 맞아들어갔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찾았다.
"나는 다 알고 있어요."
조금만 더 지나면 비행기가 폭발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렇게 놀란 표정 하지 말아요, 어차피 가람씨는 모를 테니까. 이 대화조차 기억하지 못하죠. 난, 그전의 청가람씨에게 똑같은 말을 몇번이고 했어요. 지금 내가 가람씨에게 말한 모든 것을요. 가람씨는 지금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죠. 폭발물을 찾지 못했냐고요? 네, 찾지 못했어요. 기내 안에는 없더라고요. 아마 외부에 있겠죠, 예를 들면 지금 우리 머리 위에요. 어리석다고요? 승무원에게는 알렸어야 된다고요? 알려봤자 뭐하겠어요, 믿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설사 믿는다고 해도 어떻게 할 건데요? 그저 죽는 여행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는데. 우리들은 모두 항해를 하고 있죠, 몇백 번 산산조각나고 다시 죽음의 항해를 하고.
"이 비행기는 영원히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지 못해요."
은찬은 지쳐 보였다. 가람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하는 말들은 진실이 아닐 것임이 확실했다. 혼자서만 반복된 시간을 살고 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는가, 말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믿고 싶은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표정을 보면 알겠네요. 내 말, 안 믿고 있죠? 은찬이 힘없이 웃었다. 저번에 가람씨가 내게 말했어요, 내 말을 믿도록 만들고 싶으면 현우에 대한 이름을 언급해보라고.
"그런데도 믿지 않잖아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난,"
가람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쪽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은찬이 하 하고 웃었다. 가람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4시 5분. 그래요, 당신의 말을 믿는다고 칠게요. 가람이 은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난 기억하지 못할 테니, 내 질문에 대답해봐요. 가람이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은찬에게 물었다.
"왜 내가 당신의 말을 믿어주길 원하는 거죠?"
만일 그게 사실이라고 치면, 더더욱 필요없는 것이지 않나요? 나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시간낭비에요, 그쪽은 계속 똑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야 되니까요. 난 당신이 말하는 것들을 단 한개도 기억하지 못해요. 나에게 아무리 설명해봤자, 나에게는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째각, 시간이 흘러갔다. 은찬이 눈을 깜박였다. 왜, 내가 당신의 말을 믿어주길 원하는 거죠? 대답해봐요.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왜냐면..... 은찬이 입을 움직였다.
가람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고 또 잠시후에 쾅, 비행기가 터졌다.
5.
"왜 그렇게 자꾸 절 보시는 거죠?"
빤히 바라보는 은찬의 시선에 결국 가람이 책을 덮고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실실 웃었다. 그냥요. 아리송한 대답에 가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몇백 번의 수없이 반복되는 1937초 동안, 은찬은 점점 가람에게 관심이 갔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읽고있는 책이 뭐냐고 접근하다가 자연스럽게 다른 대화로 흘러가기도 하고, 아니면 처음부터 가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한 다음에 말을 진행하기도 하고. 아무튼 반복되는 시간 동안 은찬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하면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있을까.
은찬은 가람을 보았다. 살짝 혈색이 도는 투명한 입술, 분홍기가 도는 피부. 그리고 보드랍게 손에 감길 것만 같은 갈색 머리카락. 그와 잘 어울리는 하늘색 와이셔츠. 자신은 반복되는 시간동안, 아주 오랫동안 가람을 보았고 그만큼 가람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람이 은찬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을 살풋 찡그렸다. 저기요. 가람이 물었다. 네? 은찬이 대답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혹시나 은찬이 오해할까봐 걱정된 가람이 재빨리 덧붙였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쪽을 어디서 본 기분이 들어서요.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찬이 고개를 가람 쪽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느껴져요? 가까워진 은찬의 얼굴에 가람이 몸을 가볍게 뒤로 뺐다. 아니면 말고요. 가람이 책을 펼쳐들었다. 아뇨, 은찬이 손을 뻗어 책을 도로 닫았다. 그쪽 말대로, 언제 만났던 적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디서 살았는데요? 은찬이 말문을 텄다. 가람이 은찬을 보고 선홍색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지금 작업 거는 거에요?"
"그래 보여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시죠. 가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래, 어차피 같은 지루함을 견딜 사이인데 뭐 어때요. 궁금한 게 그것 뿐이에요? 내가 어디에서 살았는지? 은찬이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에 시선을 주었다가, 가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청가람 당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이미 난 알고 있어요, 그저 모르는 척 하는 것일 뿐이죠. 은찬이 말을 삼키고 대답했다.
아뇨. 은찬이 흘러가는 초침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더 많은데, 일단 차근차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은찬의 말에 언뜻, 가람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도 같았다.
노트북을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던 남자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은찬은 눈을 뜨자마자 가람을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가람도 은찬을 보고 있었다. 사실, 눈을 뜨자마자 절 바라보는 가람의 시선이 느껴졌었다.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 절 쳐다보고 있던 청가람. 가람이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저 아세요?
"분명히 처음 보는데,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요?"
은찬이 받아쳤다. 전생에서 만났던 사이가 아닐까요? 그리고 웃었다. 가람이 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은찬이 물었다. 정말, 처음 본 사이가 맞아요? 정말 저 처음 봐요? 은찬이 미소를 지웠다. 난 아닌 것 같거든요, 정말. 가람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조금 빨라지고 있었다. 어딘가...봤어요, 분명히. 가람이 말을 바꿨다.
"난 그쪽을 본 적이 있어요."
그 눈이요, 익숙해요. 시간이 똑딱똑딱 흘러갔다. 그리고 그 붉은 머리도, 익숙해요.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은찬의 눈이 가만히 깜박였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스튜어디스가 앞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은찬은 가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람의 책은 꺼내져있지도 않았다. 가람은 그저 가끔 웃으며 은찬의 말에 대답하고, 또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나가고 있었다. ....었어요. 가람이 말을 끝마쳤다. 그리고 은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은찬은 턱을 괴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재미없고 형편없는 사람이네요, 그 사람. 그렇죠? 가람이 은찬의 말에 동의했다. 그냥 시간낭비였을 뿐이죠, 차라리 그시간에 다른 사람을 만날걸. 은찬이 입을 열었다.
"난 재미있는 사람인데, 나는 어때요?"
"...잘 모르겠는데요."
가람이 입술을 비죽 올렸다. 그냥 오지랖이 넓은 사람 아닌가요? 조금 톡 쏘는 말이었다. 은찬이 너무하다는 듯 짧게 신음을 흘렸다. 가람이 가볍게 웃었다. 알았어요, 정정할게요. 난 원래 처음보는 사람하고는 이야기 안하거든요. 그런데 그쪽과는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네요. 이야기하는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좋아요. 가람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은찬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4시 8분. 저기요, 있잖아요.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한번만, 키스해봐도 돼요?"
가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은찬이 가람에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엇을 하던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은찬이 엄지손가락으로 가람의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키스해도 돼요? 4시 9분. 가람이 은찬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 정적이 흘렀다. 가람이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30초, 29초, 28초. 시간이 흘러갔다. 은찬이 가람에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은찬이 가람의 머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가람은 눈을 뜬 채 은찬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르륵 하고 선홍색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익숙한 굉음 소리와 함께 시야가 불타올랐다.
6.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안내음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은찬이 천천히 눈을 떴다. 비행기 안이 아니었다. 은찬이 멍하니 눈을 뜬 채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32분 동안의 제한시간 속에서 죽음을 반복했던 그 끔찍한 비즈니스 클래스 안이 아니었다. 은찬의 눈앞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은 여자아이가 조그만 인형을 들고 걸어갔다. 엄마, 우리 하늘 나는거야? 까르르 웃는 아이의 목소리. 은찬은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바쁘게 캐리어를 끌며 이동하는 스튜어디스들도 보였다. 공항 안인가...? 정신이 멍해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13시 45분 로스엔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실 승객분들은 지금 게이트 8번으로...]
13시 45분행? 자신이 탄 비행기였다. 하지만 저 말이 들린다는 것은.... 은찬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있는 곳은 비행기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을 위한 공항 의자였다. 하하, 은찬이 웃었다. 은찬이 두 손으로 찬찬히 입을 막았다. 온몸을 감고있던 긴장이 탁 하고 풀리며 힘이 빠졌다.
돌아왔다. 드디어 그 반복하던 장면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수백번 겪었던 일은 꿈이었을까? 그 모든게 꿈이었고, 자신은 비행기를 처음부터 타지 않았다는 말일까. 비즈니스 석에 앉아서 겪었던 모든 기억들은.....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은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걸어오는 사람을 보는 순간, 은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크로스백을 멘 남자가 조금 찜찜한 얼굴로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는 발걸음을 멈춘채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듯. 남자가 한숨을 쉬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공항 의자에 앉아서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주은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걸어오는 은찬을 그저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찬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남자 대신 꺼주었다. 현우, 라고 적힌 이름이 액정 위에서 사라졌다. 있잖아요, 은찬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행기 타지 마요."
남자가 멍한 얼굴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부드러운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와이셔츠, 선홍색 눈동자, 끊임없이 반복되던 시간속에서 알게 된 한 사람. 남자가 표정을 풀고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저 비행기를 안 타면 나는 할 게 없는데요. 은찬이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남자는 조금 즐거운 얼굴로 은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은찬이 제안했다. 커피나 한 잔 하러 갈래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그 곳이 제격이죠. 남자가 웃으며 다시금 울리는 핸드폰의 전원을 완전히 분리했다. 좋아요.
뚜벅뚜벅, 두 사람은 게이트 8번쪽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공항을 가로질렀다. 수많은 발자국 소리들 사이에서도 두 명분의 발걸음은 뚜렷하게 들렸다. 은찬이 공항을 나오며 문득 말을 걸었다. 저기, 그쪽 이름이 뭐에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은찬은 그렇게 물었다. 남자의 맑은 웃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웃음을 멈춘 후, 은찬의 질문에 대답했다.
청가람이에요, 청가람. 주은찬씨. 내 이름 불러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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