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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피아니스트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를 매끄럽게 춤추자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퍼졌다. 가람은 옆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그가 연주하는 곡을 감상했다. 청가람이 주은찬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것은 은찬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음색, 흘러나오는 선율은 피아노라는 사물을 통한 것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있는 주은찬의 감정. 주은찬의 연주는 그를 닮았다. 가람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서 은찬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건반을 치는 주은찬. 흔들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아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 가람이 속으로 생각했다. 주은찬은 피아노를 칠 때면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러던 사이에 연주가 끝났다. 은찬이 가람에게로 고개를 향하며 물었다.

 

 

"어땠어?"

 

 

날아오는 질문에 가람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좋았어. 가람의 말에 은찬이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네가 좋아할까 많이 고민했거든. 가람이 피식 웃었다. 네가 치는 곡은 다 좋아. 그런데 이건 처음 듣는 건데? 가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은찬이 피아노 덮개를 덮고 그 위에다 턱을 괴었다. 아마 맞을걸, 널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니까. 뜻밖의 말에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별로야? 가람의 반응에 은찬이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아니아니. 가람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좀? 은찬이 따라했다.

 

 

"...놀랐어."

"감동받았어?"

 

 

은찬이 웃으며 물었다. 가람이 훅 콧김을 뿜으며 팔짱을 꼈다. 내가 왜? 그깟 피아노 좀 쳐줬다고 감동할 줄 알아? 멍청한 주은찬, 칭찬 좀 해줬거니 바로 우쭐하지 말란 말이야. 새빨개진 귀를 한 채 가람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걸 보면서 은찬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감동받았구나. 말과는 다른 청가람의 얼굴을 보고 어느 쪽이 진심인지 확실히 잘 알 수 있었다.

 

피식피식 웃는 주은찬의 얼굴을 보고 계속 반론하던 가람이 말을 뚝 멈추곤 자리에서 홱 일어났다. 주은찬 저거 또 나 놀리지. 왠지 부끄럽고 속이 끓는 기분에 가람이 일어나서 은찬을 째려보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은찬이 움찔했다. ㅇ,왜? 하찮은 주은찬, 멍청한 주은찬. 바보, 똥개. 가람이 은찬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방을 걸어나갔다. 말도 없이 갑작스레 나가는 가람의 모습에 은찬이 당황하며 따라 일어섰다. 가, 가람아! 후닥닥 따라가서 닫힌 문을 잽싸게 연 은찬이 가람의 팔을 잡았다.

 

 

"뭐야, 이거. 안 놔?"

 

 

덥석 잡는 은찬의 손에 가람이 화를 내며 쏘아붙이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닿아오는 입술에 말은 도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1.

 

주은찬은 천재였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다른 또래애들이 놀이방에서 철없이 놀 때 은찬은 피아노를 쳤다. 한 번 콩쿠르에 나갔다 하면 대상을 탔으며,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미래의 유망주였다. 기사에도 몇 번 이름이 났다. 어린 피아니스트. 은찬은 그런 자신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은찬은 그런 기대들을 부담스러워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아노를 치면 자유롭다는 게 느껴져서 쳤을 뿐이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받아서. 사람들은 어린 피아니스트인 은찬을 추켜세웠고, 은찬은 어깨가 점점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꼈다. 피아노는 은찬의 모든 것인 동시에 그를 압박하는 존재가 되었다.



주은찬은 피아노를 칠 때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된다. 가람이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이 맨 처음에 주은찬을 본 곳은 피아노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었던 것'이지만. 볼 일이 있어서 음대를 방문한 가람은 걷다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었다. 뭐지? 가람은 의문을 가졌다. 찾아야할 사람은 이미 찾아 물건을 전해준 뒤였으므로 가람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계단을 한 층 내려가 복도를 걸으니 아까전보다 더 또렷하고 맑게 들려왔다. 복잡하고 빠르게 이어지는 피아노소리.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다, 그것을 듣자 가람은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피아노소리는 다시 느려졌다, 부드럽게 또 아름다운 선율로.

가람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머리를 한 사람이었다. 가람이 서서 계속 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건지 가람이 들어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가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붉은 머리 남자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원래부터 음악 분야에는 그닥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이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 때였다. 꽝. 큰 불협화음이 났다. 가람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남자가 주먹으로 피아노 건반을 내려치자 방금전까지 이어지던 천상의 선율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름끼치는 음만이 주변으로 뭉실뭉실 퍼져나갔다. 띠디딩. 남자가 건반 위로 팔을 올려놓았다. 후우우, 크게 들리는 한숨 소리. 가람이 입을 열었다.



"잘 치던데 왜 그래?"

"?!"



자신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없어야 할 음악실에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서 얽히는 시선. 남자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고 가람이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지나가다가 피아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들려봤어. 진짜 잘 치더라.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뭐가 안 풀려서 그래?"

"......"



남자가 말없이 가람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지쳐보이는 얼굴이다. 가람이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절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에 빨려들어갈것만 같았다. 남자가 피아노 위에 올렸던 팔을 내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남자가 가람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뭘 알아."



차갑고 지친 목소리였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보다 조금밖에 키가 크지 않았지만, 풍겨나오는 분위기가 무거워서 그런지 한없이 크고 위압적으로만 보였다. 가람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가람을 쳐다보던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보는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이야. 신경 긁지 말고 나가. 그래도 가람이 나가지 않자 남자가 이를 까드득 갈더니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고 가람을 휙 지나쳐서 방을 나갔다. 가람이 멍하게 서있다가 방금 전 남자가 나간 문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참견한 잘못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말대로 처음보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들어야 하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에 가람이 주먹을 꽉 쥐었다. 피아노만 잘 치면 뭐해, 저렇게 사람에게 막 대하는데. 짜증이 났다. 재수가 없으려니, 다음부터는 다시 오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가람의 다짐은 이주일 뒤에 깨어지고 말았다. 



왜 내가 여길 또 왔었어야 되느냔 말이야. 가람이 한숨을 쉬었다. 그 교수님도 너무하다, 자신이 그저 심부름시키기 쉬운 학생으로밖에 안보이나? 가람이 터벅터벅 음대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숨길 수 없었다. 피아노 선율에 반해 저도 모르게 걸어들어가서 괜히 말 한번 걸었다가 재수없는 인간에게 독설을 듣고 난 이후로는 특히나 그랬다. 혹시 모르니까 그 쪽으로는 가지 말아야지. 가람이 다짐했다. 교수님께 이걸 전해드리고 바로 나오면 뭐, 괜찮을거야.

가람이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똑똑 노크했다. 손에 든 서류가 조금 궁금했지만 가람은 얌전히 호기심을 접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가 받은 것을 전해줄 교수는 누군가와 막 대화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길 바란다, 은찬아."



아, 방해했나. 가람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인기척을 들은 교수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음? 못 보던 얼굴인데. 아, 다름이 아니라 ㅇㅇ교수님이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가람이 용건을 말하자 알겠다는 듯이 교수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거기에 놓고 가주면 되네. 그리고 교수는 앉아있던 사람에게 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만 가도 좋아.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가람이 앉아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저번에, 피아노를 치던 그사람이었다. 가람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람과 똑같이 크게 뜨이는 눈.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에게서 휙 고개를 돌린 가람이 교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람이 몸을 돌려 방을 휑하니 나갔다. 당황한 듯이 가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은찬이 한 텀 늦게 가람의 뒤를 쫓았다.



"....기, 잠깐만!!"



뒤에서 절 부르는 소리에도 전혀 멈추지 않은 채 가람은 발걸음을 재차 빠르게 했다. 어쩐지 조금 낌새가 안좋다고 했더니만, 그 인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가람이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복도를 지나갔다. 짜증이 났다. 저번에는 쌀쌀맞게 대한 주제에, 지금 생각하니까 저도 찔렸나 보지?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던 가람의 팔을, 누군가가 덥석 잡았다.



"잠깐....!"

"뭐야?"



가람이 홱 쏘아붙였다. 꽤 당황한 얼굴로 절 잡아끈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 잡힌 팔을 바라보다가 눈쌀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제 갈길을 가려고 했다, 재차 절 잡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가람의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남자가 가람이 뿌리치기 전에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그 때는 내가 잘못했어."



감정적으로 지쳐있었는데, 그걸 너에게 화풀이해서 미안.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미안해. 진심어린 사과의 목소리였다. 정말, 미안해. 다시 사과가 떨어졌다. 가람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난번과는 다른 눈동자다. 어딘가 지쳐보이는 것은 여전했지만, 냉기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 변화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달라보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서, 이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서. 피아노소리에 끌려서 저절로 이끌어 들어간 자신에게, 처음 본 저에게 그렇게 말했던 지난 차가웠던 말이 귀에 맴돌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이렇게 사과할 거면서....왜 처음에는....."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괜시리 뜨거워지는 게 이상했다. 처음으로 이끌린 선율의 주인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게 새삼 서러워졌고, 그랬던 걸 사과를 받으니 괜히 다시 짜증이 났다. 그런데도 크게 화를 낼 수 없는 것은 그때 들었던 아름다운 피아노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람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에 은찬이 당황했다. 아, 이건 뭐지. 당황스러웠다. 그저 저번에 화풀이해서 미안했던 상대를 찾아 그저 사과만 하고 깔끔하게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물을 보이면. 은찬의 손이 조금 올라갔다 다시 내려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은찬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는 사이에 약간 젖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난, 단순히 네 연주가 좋아서 그랬을 뿐인데......"



가람의 볼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헐, 진짜 운다. 은찬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 인데. 나쁜.....가람이 웅얼웅얼거리며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눈물섞인 말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은찬이 입을 달싹였다. 미....안. 은찬이 재차 사과했다. 처음봤는데 그렇게......대해서 미안.



2.


"그런데 그때 왜 그랬던 거야?"



어느 새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손에 들린 캔을 한 모금 마시던 은찬이 가람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울어서 빨개진 눈가. 은찬이 가람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힘들었거든. 뭐가? 가람이 되물었다. 은찬이 손에 들린 캔을 내려놓았다. 내가 피아노를 정말로 좋아하는지 확신히 들지 않았어.



"예전에는 피아노가 그저 좋았어. 내가 원하는 대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끄집어내주니까."



은찬이 손을 맞잡았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어릴때부터 피아노를 쳐왔어.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었지. 그래도 내가 좋아하니 괜찮았어. 사람들이 내 연주를 좋아해주니 좋았어. 은찬이 말을 잠시 끊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 왜 나에게 그렇게 기대를 거는지 모르겠어....은찬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이제 확신이 안 가.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건넬 게 생각나지 않아서 그저 한 손으로 은찬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전처럼 즐겁지가 않아, 나혼자 겉으로 도는 느낌이야. 가람이 바람에 쓸려가는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널 잘 알지 못해. 당연히 네가 가지고 있는 걱정이 뭔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가람이 말을 골랐다. 그때 내가 본 너는, 빛이 났는걸. 네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빛날 수도 없었다고 생각해. 가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넌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으니까. 은찬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청가람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네 연주가."



은찬이 멍하니 가람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가면 갈수록 '네 연주가 좋다'는 말은 자신에게 짐을 지워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너는 피아노를 칠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야. 네가 그만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넌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을 거야. 귀에 박히는 목소리.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얼마만에 진심으로 하는 감사의 말인지 모르겠다, 고 은찬이 생각했다.

 

 

3. 


가람이 부루퉁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서 은찬을 기다렸다. 벌써 날이 거의 저물어가고 있는데, 주은찬 이 굼팅이는 뭘 하느라 이렇게 늦는 건지. 가람이 팔짱을 낀 채 발로는 땅을 탁탁 쳤다. 주은찬 너 나오면 그 못생긴 얼굴을 한 대 쳐버릴거야. 가만히 생각하다가 가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안 된다. 생각해보니 한 대 쳤다가 더 못생겨지면 어떡해? 그 얼굴에서 더 못생겨진다면 답도 없다. 그럼 뭘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던 가람은 저 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람아!"



가람이 제 앞에 와서 헉헉대고 있는 은찬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바보야, 뭐 하다가 이렇게 늦게 나왔어? 교수님이 또 붙잡고 널 안 보내주디? 하여튼 그 교수님 너 너무 잡아둔다니까. 은찬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으응... 가람이 푹 한숨을 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까 네가 밥 사. 그리고 횅하니 앞서가는 가람의 모습에 은찬이 버벅거리다가 곧이어 따라갔다.


늦어서 미안해, 삐쳤어? 누가 삐쳤다고 그래! 미안, 다음부터는 절대 안 늦을게. 너, 그 말 저번에도 한 거 알아? 그랬나. 날카로운 가람의 지적에 은찬이 머뭇거렸다. 그러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서는 짧게 뽀뽀하곤 떨어졌다.



"너어.....!!"



가람이 빨개진 얼굴로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봤다. 미쳤어,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도 안 봤어. 그리고 누가 보면 어때? 주은찬의 뻔뻔한 말에 가람이 씩씩거리다가 은찬의 옆구리를 한 대 쳤다. 윽, 급작스럽게 가해진 충격에 은찬이 몸을 굽혔다. 가람이 툴툴거렸다. 하여튼 주은찬 꼼수부리는 건 여전해. 그렇게 하면 화 풀 줄 알고? 그러면서도 저에게 말없이 내미는 손에 은찬이 피식 웃었다. 꼼수부려서 죄송합니다...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았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예전처럼 다시 즐거워졌다. 은찬이 편한 얼굴을 하며 건반위에서 손을 놀렸다. 그렇게 만들어준 것은 청가람. 자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심어주고, 옆에서 이끌어준 사람이었다. 은찬이 연주를 멈췄다. 큰 박수갈채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이 한 곳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중에서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 가람이 피식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지만, 그 중에서도 단 한사람을 위해 친다. 은찬이 환하게 웃었다.


많이 좋아해, 청가람.



4.


왜 불행은 항상 예고없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는 걸까.

가람이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사방은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가람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왼팔이 무거운 느낌에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링겔이 꽃혀 있었다. 보아하니 병원 안 같은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여기를 들어온 기억은 없는데. 가람이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내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주은찬과 같이 놀러간 날이었다. 오랜만의 데이트, 그 덕분인지 날씨는 화창했다. 가람이 난간에 몸을 기대곤 은찬을 불렀다. 주은찬! 여기 너 닮은 애 있어. 마실 것을 사오던 은찬이 절 부르는 가람의 손짓에 그 곳으로 향했다. 자, 저기 봐. 가람이 손끝으로 칠면조를 가리켰다. 가람이 은찬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음료를 받아들며 덧붙였다. 여기 너 엄청 많아. 너 몇쌍둥이였어? 짖궂게 올라가는 입꼬리. 은찬이 웃었다. 청가람, 맞아볼래? 가람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와, 이제는 폭력까지 쓰는 거야? 진짜 못됐다 너. 못된 게 누구신데요. 은찬이 난간에 몸을 기대며 가람을 쳐다보았다. 샐쭉하니 웃는 청가람. 선홍색 눈이 햇빛을 받아 유난히 더 선명하고 보석같이 빛났다. 콜록, 사레가 들린 은찬이 기침을 해댔다. 가람이 한심하다는 어투로 중얼거리며 은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누가 허당 아니랄까 봐. 왜 그랬어?'



이 몸이 좀 예쁘긴 하지? 은찬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조용히 해. 어쭈? 이게 누구보며 조용히 하래? 가람이 발끈했다. 은찬이 가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에 가람이 발끈하려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뭐야, 주은찬. 가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가람의 얼굴이 빨개졌다. 부들거리고 있던 가람이 새빨개진 얼굴로 저 앞에서 걸어가는 은찬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자신을 향해 입모양으로 말했던, 주은찬의 말은. '알면 좀 자제해줘.'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동안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서로가 있는 시간만을 생각했다. 가람이 하품을 했다. 가람을 따라 하품하던 은찬이 푸 웃으며 물었다. 난 오늘 재밌었는데. 넌 어때? 가람이 조금 피곤한 얼굴로 주은찬을 쳐다보았다. 뭐, 나도....좋았어. 버스 창문 밖으로 어두워진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폐장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놀아놓고 뭘 더 놀려고? 가람이 쏘아붙였다. 양아치 다 됐구나, 주은찬. 버스가 덜컹거렸다. 은찬이 가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깨를 들썩이는 주은찬.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은찬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말에 가람이 떽떽거렸다. 이게 진짜.....! 그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뭐....! 사방에서 놀란 승객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받고 버스가 옆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쿵, 쿵. 제 몸을 확 끌어안는 주은찬의 체온이 느껴졌다. 우지끈, 나무가 부러지며 버스는 사정없이 굴렀다. 아파, 주은찬, 네 머리에서 피 나....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주은찬....!!"



가람이 링겔을 뽑아냈다. 갑작스럽게 뽑은 가람의 행동에 피가 흘렀다. 때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간호사가 가람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다가왔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안정을 취해야 되는데....! 



"어딨어요?!"



간호사의 말을 끊어먹고선 가람이 다급하게 물었다. 붉은 머리를 가진, 저와 같은 또래 어디있냐고요!! 가람이 악을 썼다. 어딨어, 주은찬. 왜 내 옆에 없는 거야. 혹시, 아니겠지. 가람이 미친듯이 달렸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오로지 주은찬을 보는 것만에 급급했다. 가람이 뛰던 발걸음을 멈췄다.



"......주은찬..."



가람이 멍하니 은찬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은찬은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보기에도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이리저리 매여있는 붕대. 가람이 은찬을 내려다보았다. 왜 자신은 경상만을 입었고 주은찬은 중상을 입었는지 알았다. 주은찬이 저를 감싸주고, 그 자신은 온몸으로 충격을 저 대신 막아주었기 때문에. 네가 왜 이렇게까지 했어. 어? 가람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선 끝에는 붕대로 감겨진 손이 눈에 띄였다. 주은찬, 왜 그랬어..... 가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5.


몇 달이 지난 후 은찬은 사고나기 전으로 돌아왔다. 단 하나, 왼손 세번째와 네번째, 다섯번째 손가락을 제외하고서는.

불협화음이 공기중으로 울려퍼졌다. 소음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불협화음, 또 반복, 반복. 은찬이 손을 떼고서는 물끄러미 말을 듣지 않는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사고의 후유증. 손가락이 전처럼 움직여주질 않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손만 조금 불편할 뿐, 그런 대형 사고에도 다시 멀쩡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했겠지만, 은찬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저에게는 손이 생명인데, 그만큼 손이 중요한데.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은찬."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찬의 손을 잡았다. 말없이 가람을 보던 은찬이 천천히 팔을 뺐다. 스르륵,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체온의 느낌에 가람이 상처받은 눈길로 은찬을 쳐다보았다.



"은찬아,"

"...말하지 마."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재활치료 열심히 받으면 괜찮아질 거....."

"그럴 것 같아 보여? 정말로?"



은찬이 가람의 말을 잘라먹고선 물었다. 청가람, 직관적으로 생각해봐.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가람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능해! 가능하다고... 내가 도와줄게, 내가 도와줄게. 가람이 열심히 반복했다.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주은찬.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난 믿어. 전처럼 자유자재로 연주하고, 다시 내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줄 거잖아? 저를 향한 가람의 시선에 은찬이 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에 가람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조차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네 말대로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 말이야, 청가람! 그래, 너한테는 쉽겠지. 그렇지?"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안 된단 말이야!! 네가 뭘 알아!! 아무리 애쓰고 기도를 해봐도 전처럼 칠 수 가 없다고! 나에게 희망이 사라졌단 말이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 이해하는 척, 위로하지 마!! 은찬이 흠칫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람의 눈가에 고인 물기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에게 날카로운 말을 꺼낸 주은찬, 화를 낸 주은찬. 그러면.....그러면.



"차라리 날 감싸지 말았을걸, 이라고 후회하고 있지, 지금?"



가람이 물기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미안하게 됐네, 내가 네 앞길을 망쳐버려서!! 그때 날 감싸지 않았으면 넌 지금쯤 멀쩡하게 피아노를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맞지!!아니야?! 은찬이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서 있었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청가람, 바닥으로 눈물방울이 또옥똑 떨어졌다. 


아니, 아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청가람을 감싼 걸 후회한 적은 없다. 그때 가람을 감싸서 멀쩡한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후회한 적은 맹세코 없다. 그래, 안다. 그저 이건 오갈 데 없는 화가 청가람을 향한 것이라는 걸. 잘못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은찬이 가람에게 손을 뻗었다. 탁, 가람이 매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마, 주은찬. 꼴 보기 싫어. 거절의 말에 은찬이 잠시동안 가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잡아끌었다.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 가람의 얼굴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붙잡은 은찬이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싫어, 하지마. 가람이 은찬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은찬은 무시한 채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얽히는 두 시선. 무척이나 절박하고 절절한 눈동자다. 그 눈에 은찬을 밀치던 가람의 손이 천천히 멈추었다.


은찬이 가람의 눈에 맺혀있는 눈물방울을 바라보았다. 깜박, 가람의 눈꺼풀이 움직이자 눈물이 흘러내린다. 조금은 짠 키스가 이어졌다. 은찬이 입술을 슬며시 뗐다. 아무 말 없이 흐르는 눈물만을 단 채 자신을 바라보는 청가람. 은찬이 손을 들어 가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람은 그런 은찬의 팔을 밀쳐내지 않았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날 도와줘야 해, 가람아."



네가 날 도와줘야 해. 내가 힘들어할 때, 잘 이끌어 줘야 해. 은찬이 가람에게서 다짐을 받아내겠다는 듯이 그렇게 내뱉었다. 가람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눈물이 짙게 달라붙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6.


많은 인파가 쏟아져나왔다. 가람은 편하게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이 자식은 왜이렇게 안 나와. 가람이 시계를 흘끗거렸다. 이쯤이면 나올 때도 됐는데. 가람의 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웅성웅성이며 들려왔다. 나 그렇게 아름다운 연주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나도, 그런데 그 피아니스트 얼굴 봤어? 봤어! 잘생겼지 않아? 여자친구 있겠지? 부럽다. 그런 남자를 남자친구로 둔 여자는 매일 연주를 들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로맨틱하다. 가람이 대화하는 여자들을 노려보았다. 저 못난이들이, 감히 누굴 넘봐. 다음부터 주은찬의 얼굴에 '애인 있음'이라고 대자보를 붙인 후에 들여보내야지 안되겠다. 날파리들이 많이 꼬이겠는걸.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새 옷을 갈아입은 은찬이 가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여유를 부려, 빨리 안 와?"



가람이 으르렁거렸다. 은찬이 앗 하는 표정을 지으곤 재빨리 가람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미안, 관계자들과 좀 대화하느라. 은찬이 가람에게 물었다. 내 연주 어땠어? 가람이 은찬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기대한 채 제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는 주은찬. 실실거리는 게 바보 같다. 가람이 툭하니 내뱉었다. 별로야. 엑. 예상밖의 대답에 은찬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가람이 눈썹을 흘끗 들어올렸다.



"누가 여자들 꼬시래?"

"내가 언제....."

"변명 그만."



차가운 가람의 말에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흥. 주은찬 너는 너무 잘 쳐서 탈이야, 못생겨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연주로 여자들을 반하게 만들고 하고 말이야.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 성공이니까 네가 한 턱 쏴. 돌려말하는 가람의 칭찬에 은찬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래, 뭐 먹고싶은데? 은찬이 왼손으로 부드럽게 가람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가람이 대답했다. 가람의 대답을 듣고서 은찬이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집에서 자고 가는 거지? 가람이 은찬을 한 대 쳤다. 윽, 매서운 주먹에 은찬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가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맘대로 해, 이 색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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