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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Another chance

"청룡이 되지 않겠다고 하면, 필요없지."

 

 

저벅저벅, 갈라진 땅을 딛는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려퍼졌다. 청룡의 푸른 긴 머리가 그 주변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렸다. 은찬이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쿨럭, 토해낸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제발. 은찬이 간절한 눈으로 저쪽에 축 늘어져있는 청가람을 바라보았다. 제발. 은찬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긁어내며 가람에게 중얼거렸다. 쇳소리, 목구멍을 박박 긁어 새어나오는 피를 담아, 염원을 담아 말하는 목소리. 제발, 청가람. 도망쳐... 청룡의 서슬퍼렇고 잔인한 푸른 눈동자가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청룡이 되지 않겠다면, 처분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겠지. 네가 사라지면 청룡의 증표가 다른 이에게 나타날 거다. 소름돋는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청룡의 주위에 떠있는 여의주가 위협적으로 파직거렸다. 아, 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 개자식아. 청룡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단 한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는 제 자식의 마지막이나마, 제대로 봐주겠다는 듯이. 청룡이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잿빛 먹구름으로 잔뜩 뒤덮인 하늘에서 번개가 꽝 하고 땅으로, 청가람에게로 내리쳤다.

 

 

한없이 어둡기만 하던 먹구름이 드디어 걷혔다. 조금 전까지 옴싹달싹 못할 정도로 위압적인 힘을 내뿜던 청룡 또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은찬이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윽, 은찬은 이미 너덜거리는 입술을 더 세게 깨물고 고통을 내지르는 몸의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비척비척 일어나 조금전까지 청가람이 있던 자리, 아니 이제는 시커먼 재가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하늘에서 내리꽂힌 번개를 맞고 새카만 재가 되어버린 청가람.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검은 재로 향했다. 이게 뭐야? 은찬이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잿더미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은찬이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한 웅큼 집어올렸다. 내 손바닥 안에 있는 이게 대체 뭘까. 은찬이 약간의 재를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하나하나씩 손가락을 폈다. 사르르, 검디검은 재가 손안에서 곱게 사라진다. 아, 아아. 은찬이 허망한 눈으로 흩어지는 검은 재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은찬이 손바닥에 늘러붙은 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은찬이 손등 너머 남아있는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재가 날려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단 한마디조차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이게 뭘까, 아침까지 조금 까칠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러주고, 핀잔을 주고, 선홍색 눈을 깜박이던 네가, 지금은? 은찬이 숨을 멈췄다.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다. 네가 죽어버렸다는 사실. 내가 알던 청룡 후계자, 청가람은 이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

 

 

 

 

만일, 다시 널 볼 수만 있다면

 

ANOTHER CHANCE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을게.​

 

 

 

 

1.

 

중앙은 침울했다. 처참하고 볼썽사납게 무너져있던 중앙이 원상복귀되고, 현 청룡과 대치하는 도중에서 심각한 외상과 내상을 입었던 사신 후계자들의 몸 또한 다 회복된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에는 어두운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현우, 백건, 주은찬 이 세 사람 사이에서는 사소한 농담의 말조차 오가지 않았다. 한 자리가 비어었는 탓이다. 청룡 후계자의 자리. 현 청룡, 제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한 청가람의 자리. 너무도 강력한 벼락에 시커멓게 타 버려, 재가 되어버린 시체를 수습할 틈도 없이 바람에 날려가 장사를 지내지도 못한 청가람의 자리.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후계자가 들어와야 할 자리.

 

하지만 이상하게도, 청룡의 징표를 가진 후계자는 새로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이다. 청룡 가문에 청가람을 대신해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의 징표인, 여의주는 그 누구한테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번 대 청룡 후계자는...이렇게 공석으로 남는 걸까요.. 기억속에 남아있는 현우의 먹먹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은찬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못된 생각이지만 정말로 계속 비어있었으면 한다. 비록 계속 공석인 청룡 후계자의 자리를 보면 마음은 미어질 듯 아프겠지만​, 최소한 그 자리를 대신 꿰어차고 있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청가람을 대신해 앉아있는 다른 후계자를 보면 정말로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때리고, 욕하고 왜 네가 청가람 대신 여기 있냐고 고함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주은찬은 공석인 청룡 후계자 자리에 대해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매화장에 솟아있는 나무등치들 위로 올라가 두어번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있던 은찬은 저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은찬아, 잠시 밖에 다녀올 텐데 혹시 뭐 필요한 거 있느냐?"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은찬이 눈을 깜박거렸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먹을 게 다 떨어져서 말이다. 쌀도 바닥난 것 같고, 양파랑 계란이랑... 줄줄이 이어지는 음식목록을 듣고 있던 은찬이 푹 한숨을 내쉬고서는 입을 열었다. 제가 갔다올게요, 필요한 게 그게 다에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땅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괜찮겠느냐? 그런 은찬의 모습을 보던 할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어 번 손을 탁탁 턴 은찬이 대답했다. 괜찮죠, 이 나이 먹고서 혼자서 장을 못보면 그게 더 이상한걸요.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할머니의 말에 숨겨진 진짜 질문을, 은찬은 꿀꺽 삼켰다. 그럼, 갔다올게요. 주인 할머니는 중앙을 나가는 은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길이다. 은찬이 눈을 깜박였다. 청가람과 같이 장을 보러가곤 하던 길. 한 손에는 멍걸이의 목줄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사온 물품들을 들고 걸어오던 길. 주은찬, 똑바로 들어 그러다가 다 깨지겠어. 환청이 들린다. 어딜 보는 거야? 멍청아. 환영도 보인다. 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은찬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가람을 외면했다. 아니, 넌 죽고 없다. 은찬이 맥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람아, 청가람. 잊을 수 없을, 그리고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그 날, 만일 내가 강했더라면 넌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은찬은 혼자 있을때면 줄곧 생각했다. 내가 널 구할 수 없었던 건 정말 불가피한 일이었을지. 몇 번이고 재생되는 악몽, 쓰러지는 청가람에게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말을 내뱉는 청룡. 그리고 하늘에서 번쩍 내리치던 번개.

 

은찬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뜨문뜨문하지만 다소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과 자신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흰색 승용차가 지나갔다. 그 순간, 쾅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횡단보도 정중앙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어? 은찬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어디서 나타난 사람이지? 제대로 못 걷는 듯, 비틀거리는 소년. 저 쪽에서 끼이이이익 소름끼치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차가 소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은찬은 더 생각할 것 없이 몸을 날려 재빠르게 비틀대는 의문스러운 소년을 낚아채고 반대편 보도로 엎어졌다.

 

윽, 쓰러지는 한 사람분의 무게와 함께 딱딱한 보도에 등이 부딪혔다. 척추를 타고 찡 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미간을 살풋 찡그린 은찬과 소년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괜찮아요? 어휴 학생 용감하네. 그런데 저 애는 어디서 나타난 거람? 말소리들이 웅웅거린다. 몸을 반쯤 일으킨 은찬이 자신이 구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은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잠깐만. 이 머리색, 많이 봤는데. ....설마. 갑자기 심장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은찬이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 눈으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은찬의 숨이 멎었다. 흐릿하게 감기는 선홍색 눈동자, 분홍기가 도는 피부, 앳된 얼굴.

 

청가람이었다.

 

 

2.

 

"벌써 온 게야?"

 

 

익숙한 발소리에 주인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대신 사가지고 온다고 나간 지 이십분도 안 지났던 것 같은데, 벌써 온 게냐?라고 이어지려던 말은 은찬이 업고오는 한 사람의 모습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이고메야, 세상에야. 할머니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찬이 그런 할머니를 지나쳤다. 공자, 뭘 업고 오시는 겁...ㄴ.... 말을 하던 현우의 입이 멈췄다. 뭘 보고 저러는거야, 멍청아. 현우에게 핀잔을 주려던 백건의 입도 멈췄다. 은찬은 방에 들어가 정신을 잃은 가람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멍한 손길로 가람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은찬의 뒤로 세 사람이 황급히 따라들어왔다. 

 

 

"주,주은찬. 이게 뭐야?"

"청룡 공자입니까....?"

"은찬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목소리가 섞여 웅웅거렸다. 은찬은 그저 잠들어있는 가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후, 백건이 욕을 중얼거렸다. 미친, 진짜야? 백건이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었다. 은찬이 손을 움직여 가람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약간 미열이 있는 듯한, 하지만 진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다. 꿈이 아니다. 진짜다, 청가람이 살아돌아온 것이다. 은찬이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다섯 사람으로 비좁은 방 안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할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찬아, 어디서 발견한 게냐. 은찬이 입을 떼었다. ...장보러 가는 길에요.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나더니... 나타났어요.

 

 

"갑자기 나타났다고?"

"응. 공중에서, 갑자기." 

 

 

백건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ㅁ...... 그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 누구도 다시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봤다. 미쳐날뛰는 청룡이 청가람을,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직접 태워죽이는 걸 봤다.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시커먼 재가 된 청가람을 봤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완벽하게 똑같았다.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과 피부, 코, 입,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백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발, 난 모르겠다. 당황한 음색으로 그렇게 백건이 방을 나갔다. 현우와 은찬, 할머니 이렇게 세 명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단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사람이 정말로 청룡공자가 맞는지는...그때가면 알겠죠."

 

 

현우가 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찬은 한시도 누워있는 가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람아, 청가람. 주인없이 공허하게 떠돌아다니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이름의 주인이, 다시 생겼다. 가람아. 은찬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청가람. 가린 손바닥에 물기가 축축히 배어나왔다. 

 

 

3.

 

음. 가람은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 한없이 펼쳐져있는 검은 길. 여기가 어딜까, 생각하는 가람의 눈 앞으로 문득 파란 구슬이 포로롱 하고 떠올랐다. 이게 뭐지? 가람이 눈을 한번 끔벅였다. 그러자 구슬이 사라지고, 학교 안이 나타났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속에 홀로 서있는 자신. 저 쪽에서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같은 과 동기인 백건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많은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주은찬이 보였다. 재밌겠다, 다들. 가람이 눈을 돌렸다. 자신은 저 애들처럼은 될 수 없다. 가람은 홀로 가방을 챙겼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학생들과 자신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었다. 가람이 생각했다. 오늘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가야 된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쉴 날도 없이 매일매일. 자신과 아버지를 남기고 도망가버린 어머니때문에 남들처럼 즐거운 청춘을 누릴 수 없다. 집에 남아있는 아버지는 술꾼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너도 니 어미처럼 한번 도망가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술꾼. 차라리 완전히 연을 끊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람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도 언제쯤이면 남들처럼 웃고, 친구도 사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새벽 2시,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가람이 생각했다. 나도 남들처럼 막 대할 수 있는 친구도 사귀고 같이 놀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이 초라해졌다. 바닥만을 보고 걸어가던 가람은 옆에 푸른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뭘까? 가람이 발걸음을 멈춘 채 공중에 떠 있는 푸른 구슬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가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이거 떠 있는 거야? 순수한 놀라움에 가람의 눈이 커졌다. 신기하다. 가람이 손을 뻗으려다 멈추었다.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푸르게 타오르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의심이 가는 거에는 손을 대면 안 되겠지...가람이 구슬을 무시하기로 결정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긴 하지만, 기분이 꺼림칙해. 

 

...대체 뭐지. 가람이 눈을 깜박이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구슬이 쫑쫑쫑 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떠 있어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하여튼 기분상으로는 그랬다. 가람이 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구슬도 멈췄다. 가람이 구슬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몇 걸음 내딛었다. 구슬이 빙글 돌더니 가람을 쫓아왔다. 가람이 우뚝 서곤 구슬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왜 나 따라와.'

 

무생물에다 대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웃길 테지만 가람은 진지했다. 왜이래, 내가 뭘했다고 이러는 거야? 푸른 구슬이 빙그르르 돌았다. 어떻게 하라고? 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했다. 구슬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예쁘다. 가람이 생각했다. 만져보고 싶다, 가람이 손을 뻗었다. 구슬이 바로 그거라는 듯 더욱 환한 빛을 냈다. ...널 만져보라는 거야? 가람이 물었다. 다시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흠. 가람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구슬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온몸이 구슬 쪽으로 휙 쏠리는 느낌이 나더니 머리가 미칠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고통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아. 가람은 후회했다. 잡지 말걸, 애꿎은 호기심에 이렇게 죽는구나...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멍해진 귀로 끼이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저를 잡아채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지고, 그 다음에는...

 

 

 

".....아."

 

 

가람이 멍하니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깜박깜박, 흐릿한 시야에 적응하느라 몇 번 눈을 깜박이던 가람이 느껴지는 시선에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놀란 얼굴로 눈을 뜬 자신에게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는거야, 가람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시야가 선명해지자 가람은 제 눈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은찬? 뭐야, 너.

 

 

"가람아, 괜찮아?" 

 

 

은찬이 당황하며 가람이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정말 청가람, 너야? 너지?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그래, 그때 그건 착각일 뿐이었어. 대체 어디갔다 온 거야? 한참동안이나. 걱정했잖아.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얘가 지금 왜 이런 소리를 하는건지 전혀 모르겠다. 주은찬과 자신은 단 한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고, 서로 제대로 본 적조차 없는 사이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머리가 찡 울려서 아프다. 몸이 아프다보니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뭐야, 너. 왜 나한테 아는척해?

 

 

"학교에서 아는 척 한번도 한 적 없으면서. 아니, 그전에 너 나 모르지 않아?"

"....? 무슨 소리야?"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데, 내 눈앞에 왜 네가 있고, 왜 그런 말을 내뱉는건지 모르겠어."

"....청가람?"

"그래, 청가람이야. 주은찬, 넌 뭔데 갑자기 아는척하는데?"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어? 이상하다. 대화가 어긋나고 있었다. 같은 걸 생각하다가 약간씩 어긋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을 청가람도 느꼈던 건지, 가람도 입을 다물었다. 가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원목으로 된 서랍이 벽의 모서리부근에 놓여져있고, 바닥에 깔고 자는 이불과 베개, 한옥식의 구조. 가람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가람을 자연스럽게 부축하려는 은찬의 손을 거절한 채, 가람이 마루로 걸어나갔다. 

 

맨발로 홀린 듯이 걸음을 옮기며 가람은 처음보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큰 마당, 길을 돌아 자그맣게 나있는 길. 걸어가다보면 수없이 많은 나무등치들이 땅에 단단히 박혀있는 곳이. 등을 돌리고 서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있는 청가람을 보고 놀라며 다가왔다. ..공자, 정말 공자가 맞습니까? 몰라, 공자는 누구고...넌 누구야. 가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올렸다. 많은 나무등치들의 위에 올라가있는 한 사람. 흰색 머리카락. 가람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재빨리 땅으로 뛰어내렸다. 백건.

 

 

"청룡, 너....."

"청룡?"

 

 

가람이 따라했다. 난 청가람이야. 쐐기박듯이 말하는 가람의 말에, 백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것도 맞지. 뭐야 이게. 가람이 뒷걸음질쳤다. 아는 얼굴 두 개와 모르는 얼굴 하나. 그렇지만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하나같이 절 아는듯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 뭐야, 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왜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야. 청룡, 그게 뭔데?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저에게 손을 뻗는 백건이 보인다. 가람이 손을 탁 뿌리쳤다. 머리아파, 무슨 상황인지 누가 알려줬으면. 가람의 심정이 한없이 복잡해져갔다. ....너.. 뭐라고 물어보려 입을 열던 백건이 도로 입을 닫았다. 퐁, 가람의 옆으로 떠오른 여의주 탓이다. 파직파직 전류를 흘리는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던 백건이 이를 뿌득 갈았다.  

 

 

"맞잖아, 왜 아닌척해."

 

 

백건이 으르렁거렸다. 여의주가 바로 앞에 있잖아, 청가람. 청룡! 무슨 거짓말을 하는 거야? 백건이 화를 냈다. 죽은줄만 알았던 청가람이 살아돌아온 현실에 혼란스러운데, 겉모습, 목소리가 완전히 청가람인데, 계속 왜 자신들을 모르는 척 하는건지 짜증이 났다. 어디서 연기를 하는 거야, 청가람!! 몰라! 가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여의주가 뭐야! 그런 거 난 몰라!!"

 

 

난 그냥 파랑색 구슬을 만져본 것 뿐이라고! 너네는 왜 그러는데?! 왜 갑자기 나한테 아는척 하고 난리야! 가람이 고함을 질렀다. 짜증나, 짜증난다구. 짜증나....진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계속 몰아붙이는 백건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말없이 절 쳐다보기만 하는 주은찬과, 이름을 모르는 검은머리 남자도. 구슬이 날 집어삼켰어, 눈을 뜨니까......

 

 

"눈을....뜨니까..."

 

 

가람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순간 이 미묘한 상황이 이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람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희들. 대학생이...아니야? 정적 끝에, 은찬이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들은 대학생이 아니야, 사신 후계자지. 너도'일걸'. 청가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4.

 

"여의주가 가람 공자를 데리고 와줘서 참 다행입니다."

 

 

현우가 군고구마를 한 입 가득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공자가 아니였으면 저희들은 굶어죽었을지도 몰라요. 매일 먹는거라고는 주인 할머니의 이상한 죽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작공자의 흉물스러운 음식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가람이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그래? 고마워할줄 안다니 다행이네. 가람이 은찬에게도 껍질을 깐 고구마를 건넸다. 자, 먹어. 은찬이 가람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고구마를 받아들었다.

 

 

청가람이 원래 살던 세계에서 사신 후계자들이 존재하는 이쪽 세계로 넘어온지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공간을 넘어서 이동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우가 눈을 반짝였다. 공자앞에 이게 나타났다고 하셨죠? 응. 가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현우가 턱을 괴고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며칠 동안 생각한 건데, 아무래도 이 여의주가 공자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신의 힘이 깃든 물건이니, 차원이동쯤이야 가능한지도 몰라요.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원래 이 곳에 있을 '나'는 어디간 건데?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가람이 옅게 웃었다. 알았어, 안 물을게.

 

은찬, 백건, 현우 이 세명과 주인 할머니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새로 나타난 청가람에게 여기에 있었던 너는 죽었다는 말을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죽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은찬이 가람의 옆에 떠다니는 여의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청가람이 재가 되었을 때, 같이 사라졌던 여의주다. 또르르르 가람의 옆에서 재롱을 떠는 듯 움직이는 여의주, 은찬이 눈을 깜박거렸다. 만일, 저것에도 의지가 있다면? 주인을 버리고 다른 주인을 선택할 수 없어서, 다른 곳에 있는 주인을 직접 이끌고 온 거면? ...지금 중앙에 있는 청가람은 원래 사신 후계자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민첩하고 유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무술은커녕 힘도 약한 참이다. 하지만, 은찬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다시 널 보게 되었으니, 그걸로 족해.

 

 

은찬이 고구마를 우물거리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뭘 봐? 톡 쏘아붙이는 말에 은찬이 턱을 괴고 웃었다. 저거저거, 또 저렇게 멍청하게 웃지. 가람이 은찬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윽, 은찬이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가람아, 나 아파.... 아파? 잘됐네. 가람이 예쁘게 눈초리를 휘었다. 아프라고 때린 거야. 노닥거리는 두명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백건이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여의주 다룰 줄은 알아?"

"여의주?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가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망했네. 백건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가람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게 배고프다고 먹을거 내놓으라는 말에 고구마 구워줬더니만 뭐라는거야? 가람이 씩씩거렸다. 은찬이 씩씩거리는 가람을 진정시켰다. 하하, 가람아 너무 화내지 마. 그러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근데 진짜 모르는 건 아니지?

 

 

"이것들이 진짜!"

 

 

가람이 고구마를 홱 집어던졌다. 악! 날아간 고구마에 이마를 맞은 현우가 억소리를 냈다. 야, 자꾸 잊어버리나 본데, 나 다른데서 온 사람이거든?! 아 말하니까 좀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난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건 좀 곤란한데요, 현우가 중얼거렸다. ㅇ,엉? 공자, 공자 여의주 못다루면 말짱 꽝입니다. 은찬이 물었다. 그,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여의주 모양을 변하게 하거나.. 그럴 순 없는 거야?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음...가람이 여의주를 꺼냈다. 세 쌍의 눈들이 자신에게 집중된다. 조금 부담스러운 것을 느끼면서 가람이 여의주를 바라보았다. 이걸...어떻게 바꾸지? 그냥 이렇게 하면 되려나.....? 가람이 대충 손을 휘저었다. 다음순간, 펑 하고 큰 소리가 나면서 주변이 시커멓게 타올랐다. 켈록켈록, 네 명이 사이좋게 기침을 해댔다. 엄청나군.

 

 

"....그래, 잘 알겠다.."

 

 

백건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구마 아깝다, 숯덩이가 됐네. 민망한 기분에 가람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했잖아, 돼지들아!! 가람이 빼액 소리쳤다. 짜증나, 나쁜자식들. 가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갔다. 쟤 또 왜저래? 백건 니가 핀잔줘서 그렇잖아. 은찬이 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 시비야? 잘못한건 청가람인데. 백건의 항의는 듣지 않은 채 은찬이 가람이 나간 곳을 향해 따라나갔다. 나가는 주은찬의 뒷모습을 보고 백건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진짜 다룰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하라고. 괜시리 울컥한 기분에 가람이 발로 땅을 걷어찼다. 사신 후계자니 뭐니 아직 익숙하지 않다. 여기에 온 뒤에 한것이라고는 가만히 앉아서 세 명이 수련하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것들이 정말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날렵하면서도 위협적이고 깔끔한 동작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도 이제 그렇게 해야 하나. 원래 살고있던 세계가 너무 괴로웠기에 미련은 거의 없었지만 저렇게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급격하게 돌아가고 싶어졌다. 뭐,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람이 포로롱 여의주를 꺼냈다. 너도 짜증나. 가람이 여의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나한테 망신을 주다니.

 

 

"연습하려고?"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가람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넌 또 왜 왔어? 나 놀리려고? 아니아니. 은찬이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아냐. 난 가람이 네가 침울해있을까 싶어서...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안 침울하거든?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쳇. 가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보는 눈이 줄어있으니 잘 될것 같기도 하고... 가람이 은찬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치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보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은찬. 흥. 가람이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비슷하게, 이번에는 그저 전류만 튈 뿐이었다. 아이씨, 왜 안 돼?! 가람이 짜증을 냈다. 가람이 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은찬이 조언했다.

 

 

"전에 하는 거 보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거기서 막 창도 꺼내고, 검도 꺼내고 그랬다고?"

"뭐? 그게 가능해?"

"응. 청룡의 증표니까."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람에게 다가갔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내가 다룰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려나? 가람이 픽 웃었다. 그게 뭐야, 너무 웃겨. 은찬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여튼, 할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여의주가 택했으니까 말이야. 자신감을 가져봐. 가람이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곧은 눈길, 진지한 말투. 왜 그런 말을 들으니 할 수 있을것만 같지. 가람이 여의주에 집중했다. 도르르, 여의주가 빙글 돌았다. 창, 창이라..... 가람이 손바닥을 활짝 폈다.

 

 

"!"

 

 

하얀 연기를 이끌며 긴 창이 나타났다. 가람이 어벙벙한 얼굴로 공중에 나타난 창을 얼른 잡았다. 묵직한 느낌, 가람이 멍하니 은찬을 바라보았다. 돼,됐어...! 주은찬이 입을 멍청하게 벌리고 있다가 웃었다. 그것 봐, 너는 당연히 쉽게 된다니까! 가람이 창을 바꿔들었다. 흠, 쇠붙이라 꽤 무거울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네. 그런데 이 다음에는 뭐하면 돼?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이거가지고 찌르기라도 하면 되는 거야? 가람이 생각없이 공중에 내질렀다. 아, 은찬이 옆으로 슬쩍 물러나며 가람이 하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저거, 나는 주술가지만 헛점이 다 보이는데. 은찬이 가람의 뒤로 가 섰다.

 

 

"어....?"

"그렇게 쥐는 게 아니야, 이렇게."

 

 

은찬이 가람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 정확한 위치를 짚어주었다. 그렇게 잡으면 얼마있지 않아서 어깨에 무리가 갈 걸. 주은찬이 지나치게 가까워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분 이상해...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를 이끄는 은찬을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찌르고 한 번 돌려서 저렇게. 가볍고도 절도있게 창을 내질렀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내내 붙어있었다. 은찬이 어느순간 멈추고서는 입을 열었다.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오늘은 여기까지, 내가 앞으로 찬찬히 알려줄게. 가람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러자 정통으로 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가깝다, 가람의 얼굴이 확 불타올랐다. 왠지 모르겠지만 민망해....! 가람이 창을 집어넣고 은찬에게서 떨어졌다.

 

 

"그...그래! 난 힘들어서 좀 쉴테니까 오지마!"

 

 

가람이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쿵쾅거리며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뭐지. 은찬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사라진 가람의 뒤를 쫓았다. 홍시처럼 달아오른 얼굴, 왜 저런 표정.....아! 자신이 한 행동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은찬의 얼굴또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까는 몰랐는데, 자각하고 나니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청가람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몸을 밀착하고 귓가에 대고 말하고, 얼마나 야살스러운 상황이었나. 은찬이 제자리에 쪼그려앉았다.

 

하, 가람아 어떡하지.... 네가 너무 귀여워.

 

 

5.

 

주은찬, 주은찬. 주은찬. 날 부르는 네 그리운 목소리가 아직도 가슴에 울린다. 자꾸 백건이 자는데 발로 차. 짜증나 죽겠어. 넌 대체 저거랑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던 거야? 갑자기 네가 다르게 보이는걸. 

매화장을 다 부셔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난 어차피 청룡따위 안 할거니까 니네들이 알아서 원상태로 돌려놔. 아니면 밥 없어. 주은찬, 가끔 보면 신기해. 어쩜 그렇게 주술도 못하고, 무술도 못하는 거야?

어, 저기 봐봐. 하늘문이 열렸어.

 

 

알고 있다. 예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청가람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고, 너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같은 사람이다. 네 행동이, 말투가, 날 대하는 너의 모습이 날 설레게 해. 은찬이 눈을 감았다. 이건 어쩌면 또다른 기회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미처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는 기회.

 

 

「 의지를 불태우기에는 너무 순탄하게 흘러가서요. 」

 

 

너는 약해, 내가 알고 있던 청가람이 아니야. 너는 작고 여려, 내가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다. 은찬이 눈을 떴다. 저 앞쪽에 서있는 가람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다시 되찾은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더 강해질거야. 가람아, 나의 청가람. 은찬의 손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해. 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리고 네 입술에 입을 맞추고, 널 안고 싶어. 은찬이 주먹을 쥐어 불꽃을 껐다.

 

 

6.

 

휙휙, 가람이 가볍게 나무등치를 건너밟으며 은찬을 공격했다. 그런 가람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은찬이 한 손을 짚고 휘릭 뒤로 돌아 가람의 뒤를 노렸다. 어느 새...! 가람이 재빨리 간격을 벌렸다. 은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찬의 발이 가람의 옆구리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막아낸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저거, 진심이지. 아쭈, 한번 해보자 이거야? 약간 열이 뻗친 가람이 여의주를 꺼내들었다. 어어? 은찬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청가람, 반칙....!

 

 

"문답무용."

 

 

가람이 생긋 웃었다. 망했다, 은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꽈광, 번개가 내리쳤다.

 

가람이 폴짝 뛰어내려 쓰러져있는 은찬에게로 다가갔다. 주은찬, 뭐해? 하지만 은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람이 재차 불렀다. 주은찬? 그래도 말이 없다. 윽, 심했나. 가람의 얼굴이 살풋 찡그려졌다. 주은찬이 꼼수쓴게 화나서 조금 따끔하게 해줄려고 여의주를 부른 건데, 너무 강도가 셌나 보다. 가람이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인 은찬에게 다가갔다. 야, 주은찬. 가람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은 순간, 미동도 않던 은찬이 확 일어나 가람을 엎어뜨렸다. 윽, 순식간에 뒤집힌 위치에 가람이 눈을 찡그렸다.

 

 

"끝까지 방심하면 안 돼."

"이런 사기꾼아...!"

 

 

가람의 얼굴에 핏발이 섰다. 이젠 아주 연기까지 하시겠다 이거세요? 빈정거리는 가람의 말에 은찬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경험이라고 쳐, 경험. 갈수록 늘어가는 주은찬의 말발에 가람이 혀를 찼다. 비켜, 무거워. 그 말에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람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흥. 고개를 돌리는 가람의 얼굴이 매섭다. 어...조금 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람아, 화 났어? 이따가 반찬으로 화풀이하거나..그런 건 아니지? 움찔, 가람의 어깨가 흠칫했다. 은찬이 말을 이었다. 난 가람이 네가 절대 그렇지 않을거라고 믿어. 혹시나하는 마음에 은찬이 밑밥을 깔았다. 그리고 가람의 볼에 한 번 쪽. 이게 꼼수만....! 가람이 풍 콧김을 내뿜으며 은찬을 밀었다. 됐어, 화 안났거든? 아씨, 주은찬 저게 미리 깔아놓으니까 뭘로 복수해야될지 모르겠잖아?! 가람이 또르르 머리를 굴리다가 내뱉었다.

 

 

"넌 들어가서 마늘이나 까!"

"에엑!"

"안 까면 밥 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팽 하니 들어가는 가람의 뒷모습을 보며, 은찬은 자책했다. 괜히 했나. 하지만 약간 붉어진 가람의 귀를 보니 꼭 잘못한것만은 아닌 듯했다. 좋으면 됐지 뭐, 은찬은 흔쾌히 마늘을 까기로 했다. 청가람이 이쪽으로 온 지 거의 1년, 그리고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지는 세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너를 좋아해.'

 

밤공기를 뚫고 고요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람이 놀라 은찬을 바라보았다. 주은찬이 진지한 얼굴로 절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해, 가람아. 간질거리는 목소리였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말없는 가람의 얼굴을 보며, 은찬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널 좋아해왔어. 네 목소리, 네 웃는 얼굴, 너의 손가락.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아올렸다.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고 은찬이 절절하게 고백했다. 네가 너무 좋아, 청가람. 주은찬의 말에 가람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주은찬이? 날? 나를 좋아한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머릿속에서 방금 들은 문장들이 떠돌아다녔다. 아, 문득 미친 생각에 가람이 은찬에게 잡힌 제 손을 빼냈다. 가람아? 어딘가 차가운 모습에 은찬이 그를 불렀다.

 

'웃기지마, 네가 좋아하는 건 지금의 '나'가 아니라 원래 여기에 있었던 '나'겠지.'

 

말 안해줘도 대충은 알아. 여기있는 내가 무슨 이유로 죽어버렸던 거겠지? 그래서 처음 봤을때 그렇게 다들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던 거고. 주은찬 니가 나에게서 나의 그림자를 찾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비참해져갔다. 왜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인지. 그리고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지. 은찬이 멍한 눈동자로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난 싫어, 싫단 말이야. ...아냐, 가람아. 뭐가 아냐! 가람이 소리쳤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쨍하고 울려퍼졌다. 은찬이 말없이 일어나 가람의 손목을 내리잡고 강하게 키스했다. 뭐야, 멍청ㅇ,읏. 가람의 말을 먹어가면서 간절하게 키스하던 은찬이 입술을 떼고 천천히, 대답했다.

 

'난, 지금의 네가 좋아.'

 

은찬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지금의 네가 좋아, 가람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너 가끔보면, 멍걸이를 더 잘 챙기는 것 같아."

"으응?"

 

 

가람이 제 옆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멍걸이를 흘겨보았다. 뭔소린지 못알아듣고 바보같이 웃는 주은찬. 저걸 진짜 때려 말아? 가람이 고민했다. 하지만 좋다고 웃는 멍청이를 보니 때릴 수가 없다. 가람이 할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중앙에는 식충이들이 너무 많다니까. 그렇지? 백건이 거의 거덜내는 것 같아. 너도 포함이야, 주은찬. 가람이 단칼에 끊었다. 너무하다....은찬이 가람에게 항의했다. 나는 그래도 이렇게...짐꾼이 되어주는데...시끄러. 굶고 싶어? 협박에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흐흥, 기분좋아진 가람이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나갔다. 괜시리 조금전까지 눈엣가시였던 멍걸이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멍걸아, 배고프지? 오빠가 가서 맛있는 간식 줄게.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오빠, 라니. 비록 저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간질간질한 단어다.

 

저 앞에서 중앙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서 청소좀 하고, 멍걸이 간식 주고... 중앙으로 열 걸음.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름칙한 기분이 들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나쁜 느낌에 은찬이 팔을 쓸어내렸다. 이상해, 뭔가 아주 안좋은 기분이 든다. 주은찬 표정이 왜 그래? 가람의 말에 별거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다시 열 걸음.

아, 잊고있던 감각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은데. 다 왔네. 가서 일단 그거 냉장고에 넣어놔! 은찬이 중앙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은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들고있던 비닐봉투를 놓았다. 떼구르르, 음료수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파란색으로 된 한복을 입은 채 뒤돌아선 남자, 그리고 그 남자 앞에 대치한 두 명의 사신후계자. 어?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인가봐. 가람의 목소리에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잊을 수 없던 끔찍한 얼굴, 청룡, 아냐, 가람아, 아니야 손님이 아니야, 가람아. 가람아!! 가람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세요? 찻집을 찾아오신거면 저쪽이에요."

 

 

7.

 

..청가람?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그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벅저벅, 가람에게로 다가오는 청룡을 보고 은찬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주작 후계자. 청룡이 눈을 가늘게 떠 은찬의 뒤에 서있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무슨 상황인지 조금 궁금하군. 분명히 저건 죽었을 텐데, 살아있다라?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은찬이 이를 뿌득 갈았다.

 

 

"알 것 없습니다, 돌아가주시죠."

"그 태도는 상당히 건방진데."

"당신은 그런 말할 자격이 없어."

 

 

참지 못하고 은찬이 씹어뱉었다. 금방 주위가 얼어붙고 흉흉한 분위기에 살이 베일 것 같았다. 가람은 입을 꼭 다문채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주은찬이 왜 저 사람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것인가. 가람이 뒤에 서있는 두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청가람, 멍청이같이 뭐해, 거기서 떨어져! 항상 귀찮아하면서 절 괴롭히던 백건답지 않게 일그러지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공자, 안 돼요. 현우가 소리쳤다. 대체 뭐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저 사람이 뭐길래? 가람이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찬이 손을 더듬어 가람을 제 뒤로 바싹 끌어당겼다. 윽, 강한 손아귀 힘에 가람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주은찬, 왜 이래. 나 불안해. 왜이러는 거야.

 

 

"...완전히 똑같아."

 

 

청룡이 가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야, 가람이 움칠거리며 은찬의 뒤에 바싹 달라붙었다. 저 남자, 너무 무섭다. 몸이 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보는 사람인데 왜이렇게 무서운 거야, 울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고 맞잡은 은찬과의 손을 세게 잡았다. 덜덜덜,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가람의 떨림에 은찬이 더욱 강하게 잡아주었다. 무서워하지마, 이번에는 내가 꼭 지켜줄게.

 

 

"필요없어서 죽였더니, 또 나타났군."

 

 

청룡이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더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저래서야 청룡강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걸. 난 빨리 내 자리를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해. 은찬이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딱히 별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청룡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주작 후계자, 비켜라. 싫습니다. 파직, 파지지직, 청룡의 옆에 떠 있는 여의주가 매우 위협적으로 파직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청룡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람의 멱살이 청룡의 손에 잡혔다. 어찌나 빨랐던지 언제 주은찬을 공격하고 절 잡아올린건지 볼 수 없었다. 콱 막혀오는 옷자락에 숨이 막힌다. 가람이 인상을 찡그리며 절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음에 안 들어."

"큭...."

"너도 청가람인가? 청룡 후계자? 웃기는군."

 

 

청룡이 반복했다. 아주 웃겨. 청룡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힌다. 가람이 여의주를 꺼내들었다. 이제 마치 원래부터 제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진 여의주를 써서 청룡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켈록켈록, 가람이 연달아 기침을 했다. 청룡이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의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중앙 위로 삽시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하늘거리는 긴 푸른 머리, 그 뒤에 나부끼는 용의 모습. 청룡이 손을 뻗자 여의주가 검으로 변했다. 토막내주지. 청룡이 음산하게 내뱉었다.

저걸 상대할 수 있을까. 가람이 속으로 생각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알 것 같아.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 곳에 있던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은찬아.

 

안 돼. 은찬이 이를 으득 갈았다. 되살아나는 1년 전의 기억, 겹쳐지는 그 때의 청가람, 산산조각난 중앙. 바람에 날려가는 검은 재, 절대 안 돼.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 은찬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불나방이 끼어들 자리를 모르고 마구 날아드는군. 내가 저번처럼 봐줄거라 생각하지 마라. 청룡이 망설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은찬도 움직였다.   

 

 

8.

 

온 몸이 마구 비명을 질렀다. 다시 엉망이 되어버린 중앙이 눈에 들어왔다. 1년 전과 같은 풍경이다. 바뀌지 않는다, 지독하게도. 쓰러져있는 청가람, 다가가는 현 청룡. 죽음의 사신이다. 죽음의 사신이 다시 청가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너를 지키지 못하는 걸까.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피에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은찬이 제 손을 까득 깨물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살점이 떨어져나간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일어나야 해, 청가람을 지키러 가야해.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시간 없어, 주은찬.

 

 

청 가람다 시는 나타날수없도 록 만들 어 주지 몇번이 고 죽이 면그만이 다

 

 

이상한 말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무슨 말일까? 은찬이 멍하게 생각했다. 청가람에게 하면 안되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은찬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가람아. 시선의 끝에 있을 가람을 찾았다. 너는 그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무력하게 앉아있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애쓰며 너를 구하려고 하겠지. 그리고 또다시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널 구하지 못한 나 자신을 저주하며 또 인형처럼 살아가고, 네가 살아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대하고, 하지만, 기적은 반복되지 않겠지.

 

그 때, 가람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주,은찬. 은찬아, 찬아.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은찬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은찬아, 고마,워. 좋,아해.

청룡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저에게 속삭여주는 청가람의 목소리 뿐. 아, 은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지를 불태우기에는 너무 순탄하게, 흘러가

지 않네요.

 

 

또옥, 손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넘실거리는 불길이 공기중으로 터졌다. 막 가람을 내리치려던 청룡의 검은 어떠한 힘에 막혀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신성하고도 강력한 힘에 청룡이 눈을 찌푸렸다. 가람은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살랑, 목 부근부터 하나로 묶인 긴 붉은 머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은찬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옅은 주홍색 눈, 일렁거리는 불의 그림자. 주작강림이었다.

 

 

9.

  

널 다시 만났어, 울었어, 너무 기뻐서.

 

그 날, 내가 너를 처음 보았던 날. 급작스럽게 차도에 나타난 너. 네가 있던 세계의, 널 알고 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영원히 이 세계에 남아주길 바라. 그리고 너와 함께 수련을 하고, 널 도와서, 네가 처음으로 사신강림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같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싶어. 너와 같은 시간을 살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고, 네가 들이쉬는 숨결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살아가고 싶어.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널 보았을 때, 멈춰있던 내 시간도 흐르기 시작한 거야.


청가람, 널 다시는 잃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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