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두두, 전투로 황폐화된 지역 위를 한 헬리콥터가 빠르게 지나갔다. 현우가 조심스럽게 가람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꽤 화난 표정이다. 매서운 눈초리로 절 죽일듯 노려보고 있어서 도로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헬기에 타기 전까지 줄창 들었던 청가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바락바락 고람을 치던 청가람. 마음대로 누가 내보내래?! 어련히 완성하면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허락도 없이 내 아이를 내보내고, 망가뜨리기까지 했잖아! 청가람은 항상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을 '자신의 아이'라고 불렀다. 땅이 점점 가까워진다. 투드드, 헬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현우가 닫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청가람이 현우와 군인을 밀고 앞으로 쏠랑 튀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저 사람한테는 꽤 중요한 거라서요..."
현우가 대신 사과했다. 군인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우는 가람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후우, 겨우 살 떨리는 분위기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지만 한숨부터 나온다.
손 위로 투명하게 비춰지는 위치추적기를 보면서 가람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짜증난다. 귀찮게 여기까지 와야 되고, 여기까지 와서 얻는 것이라고는 제 아이의 잔해 뿐이라니. 멍청한 현우 놈 때문이었다. 지 말로는 상부에서 압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하는데, 그래도 싫다. 그깟 이야기쯤 그냥 무시해버려도 될 일이잖아. 감히 내 일을 방해해서,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고. 가람이 이를 뿌득 갈았다. 자꾸 이렇게 하면 다시는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미 망가진 거, 중요한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은 듯 하니 가져가서 다시 만들어야겠어. 가람이 돌아가서 할 일을 가만히 생각했다. 일단 백업한거 살리고, 사실 손봐야 할 곳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것도 수정해서 새로 해야지. 두뇌회전을 순식간에 마친 가람이 다시 드는 속상함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삼아서 만든거라 완벽하게 하지 않아서 더 허망하게 망가진 것 같다.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가람이 절벽 앞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휘우웅, 뒤에서부터 부는 바람에 머리칼과 긴 하얀 가운이 휘날렸다. 저기 밑에 있는 것 같은데. 가람이 띠띠띠 잡히는 신호를 바라보고, 다시 밑을 쳐다보았다. 내려가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저 쪽에서 내리막길이 보였다.
저벅저벅, 간간히 부는 흙바람에 손으로 앞을 살짝 가리며 가람이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잘린 팔다리들이나 시체들, 망가진 채 버려진 총들과 수류탄의 잔해들이 널려있는게 보인다. 가람이 큰 돌들과 흙들로 쌓여있는 둔치 앞에 멈춰 섰다. 널부러진 부품들과 푸른 액체에 눈이 절로 찡그려진다. 아 몰라, 빨리 돌아가서 만들 거야. 가람이 몸을 쪼그리고 앉아 복잡한 전선들에 얽혀있는 조그만 물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필요없는 전선들을 똑똑 떼어내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러다가 가람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어. 눈에 들어온 물체를 가람이 외마디 소리를 냈다. 사람이었다.
얼굴과 몸은 흙투성이에다가 볼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덕지덕지, 너덜너덜해진 옷들과 목에 걸려있는 긴 줄과 이어진 카메라가 있었다. 가람이 빤히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져볼까, 하다가 너무 더러워 보여서 손을 거두었다. 난 더러운 거 싫어하는데. 지금도 몇개월만에 나온지도 모르는 세상이 솔직히 두렵다. 공기중에 어떤 더러운 물질이 자신에게 달라붙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죽은 건가? 가람이 그 사람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죽었어? 가람이 손을 천천히 가져가 낯선 사람의 볼을 찰싹 때렸다. 반응이 없다. 가람이 손을 내려 목에 대었다. 살아있네. 가람이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필요한 건 이미 찾았고. 이건 필요없는데, 두고 갈까? 가람의 눈이 남자의 손 위에 놓여있는 카메라로 향했다. 이건 왜 들고 있는 거지. 뒤에서 절 부르는 현우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가람이 결정을 내렸다. 이 낯선 사람을 주워가기로.
'너'와 '너'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Memorial Black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1.
종군 기자라는 직업은 위험하다. 전쟁터에 나가서 사진을 찍고, 총격전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포탄소리를 들으면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주은찬은 단 한번도 이 직업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들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전쟁터에 나가서 셔터를 누를 때야말로 살아있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매순간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이 미칠듯이 짜릿하고 좋았다. 전율하는 감각, 끔찍한 비명소리가 난무하지만 은찬에게는 일터이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어차피 전쟁터에 나갈 때 그날 여기서 죽는다고 마음먹고 나가기는 했지만, 은찬이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게 포탄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저에게 뭐라고 말하던 동료 같았는데. 은찬이 눈을 깜박였다. 흐릿하던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몰라 제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퍽퍽한 모래먼지가 날리고 전투가 이어지던 황무지였지, 이렇게 깔끔한 흰색으로 도배된 곳은 아니었단 말이다.
여기, 어디야. 은찬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댔다. 그러다가 문득 든 이상한 기분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헐? 은찬의 눈이 동그래졌다. 파편에 긁히고 쓰라렸던 상처들이 깔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붕대로 감겨져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듯이, 멀끔하게 나아 있었다. 뭐야?! 은찬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총알자국도 없어져 있고,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져보아도 쓰라린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오소소,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물론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좋긴 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신을 이렇게 멀끔히 치료해주었단 말인가?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적하고 깔끔한 공간. 과연 먼지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한 게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은찬이 걸어다니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딱 보기에도 복잡해보이는 전선들로 얽혀져 있는 반만 완성된 안드로이드,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기계더미들이 줄줄히 놓여 있었다. 여기 좀 섬뜩한데. 은찬이 팔을 문질렀다. 오한이 드는 것이, 수상하게 생긴 방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은찬이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이상해, 혹시 적군에게 잡혀서 끌려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멀끔하게 치료를 해주고 자유롭게 놔둘 리 없다. 잠시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은찬이 주저하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아무런 소리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 위로, 계단이 나타났다. 은찬이 계단 위를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모퉁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한 인영에 은찬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허,허억.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깜짝이야!"
선홍색 눈을 가진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화를 냈다. 누가 그렇게 조용하게 올라오래? 짜증나. 이쯤 일어날 때 됐다 싶어 막 내려가려고 그랬는데. 그냥 거기에 있지 그랬어? 어련히 내가 갈 거였는데. 따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은찬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한동안 쏘아붙이던 남자가 계속 주저앉아있는 은찬을 보고 어이없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뭐해, 멍청아. 안 일어나? 계속 죽치고 앉아있을 거야? 어, 어?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한다. 은찬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 보이는 얼굴인데,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일단은 일어나는 게 맞았기에 은찬이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흠, 일어난 은찬을 보고 남자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은찬이 남자보다 키가 약간 더 컸기 때문이다.
"괜히 주워왔나봐."
"응?"
"그냥 죽게 내버려둘걸."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리다가 남자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어디 아픈 데는? 쓰라린 데는? 움직이기 불편한 데 없지? 연거푸 쏟아지는 질문에 은찬이 정신을 놓고 있다가 하나하나 대답했다. 딱히, 없는데.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펴진다. 하긴, 있을리가 없지. 의기양양해진 남자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뭐지. 은찬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금 혼란스러운 제 상황을 조금 정리해줄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그쪽이 날 치료해준 거야?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내 아이 데려오려다 옆에 널부러져있는 너 가져왔어. 사람보고 '가져왔다'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절 치료해준 사람이라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찬이 약간 눈을 크게 뜬 채 정말?이라고 되물었다. 정말? 날 이렇게 멀끔하게 치료해줬다고? 무슨 수로? 어떻게 이렇게 한 거야? 이번에는 은찬 쪽에서 속사포로 쏟아지는 질문에 남자가 인상을 썼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그거 하나 못하면 바보게?"
남자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못하는 건 없어. 그냥 소독한 다음에 피부 조직을 덧입히는 것밖에 없는데, 숨쉬는 것보다 더 쉬운걸.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은찬이 멍하니 생각했다. 피부 조직을 덧입혀? 왜 자꾸 멍청하게 쳐다봐, 멍청아. 남자가 한심스럽게 말했다.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훅 가까워지는 얼굴에 은찬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흠, 이상은 없는 것 같고. 너 이름이 뭐야? 날아온 질문에 은찬이 대답했다. ...주은찬. 멍청한 이름이네. 남자가 은찬의 이름을 한 번 되뇌이고서는 중얼거렸다. 빠직, 은찬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괜시리 지는 기분에 은찬이 덩달아 물었다. 넌? 너는 뭔데? 나? 남자가 제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주변이 환해질만큼 하얗게 짓는 미소에, 은찬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안 알려줄건데?"
당당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은찬이 할 말을 잃었다. 이리 와봐. 질문을 무시하더니 이번에는 또 멋대로 끌고가려 한다.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보아하니 생명의 은인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맘대로서야... 왠지 앞으로의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았다. 뚜벅뚜벅, 은찬의 손을 잡고 걸어간 남자가 멈춰 섰다. 이거. 남자가 가리키는 손짓에 은찬이 몸을 빼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하얀 탁자 위에 놓여있는 물체를 본 순간 소리를 질렀다. 내 카메라!! 은찬이 남자의 손에서 손을 빼고 당장 달려서 덥석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카메라를 들어서 샅샅이 확인하는 은찬을 보고 가람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갑자기 황소처럼 힘차게 달려가더니 이리저리 둘러보고서는 또 변덕스럽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저거 왜 저래?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내....내 카메라. 듣기만 해도 안쓰러울 정도로 우울한 목소리다. 가람이 왜? 하고 물었다.
"카메라가....죽었어..."
은찬이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히 들고다니며 그보다 더 소중한 사진들을 찍어놓은 카메라다. 솔직히 일어났을 때부터 옆에 카메라가 옆는 것을 보고 잃어버렸거나 이렇게 되었지도 모른다고는 예상했었지만, 예상한 것과 실제로 확인사살을 받는 것은 충격의 차원이 다르다. 내새끼가 운명한 걸 알았더라면 차라리 영원히 안 깨어나는 게 나았을까...? 은찬이 공허하게 중얼댔다. 무슨 짓을 써서 되살리고 싶어도 그럴 가망성 조차 없다.
가람이 볼을 긁적였다. 사실, 주은찬을 주워올때부터 카메라가 망가져있긴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완벽하게 망가뜨려 놓은것은 제 실수가 조금 있기도 했다. 일단 의식을 잃은 은찬을 대충 치료해놓고 놔서, 카메라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좀 들여다보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미 한번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 카메라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말할 수 없지. 가람이 궁상을 떨고 있는 은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음. 음.. 나, 근데, 혹시 내용물이 궁금한거면 보여줄 수 있어. 은찬의 목이 홰액 돌아갔다.
"진짜?"
"으,응. 완벽하게는 못했지만 심심해서 백업 해놨어. 볼래?"
가람의 말에 은찬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보여주세요. 공손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진 가람이 손뼉을 짝짝 두 번 쳤다. 그러자 환했던 공간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스크린이 하나 떴다. 뭐야. 은찬이 나타난 모니터를 보고 입을 헤 벌렸다. 이런 마술같은 광경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람? 그러는 사이에 가람은 팔을 움직여가면서 백업 파일을 찾고 있었다. 파일을 찾아 한 번 터치하자 사진이 주르르륵 뜬다. 와. 은찬이 감탄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해놨잖아. 전쟁통에서 발로 뛰어다니며 찍어놨던 모든 사진이 그대로 들어있다. 한참동안이나 넘어가던 사진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은찬이 투명한 스크린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너무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제 카메라에 들어있던 사진들을 이토록 완벽하게 복구하고, 상처투성이던 제 몸을 완벽하게 치료한 거지?
"..대체 누구야?"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사진들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 가람이 도로 스크린을 종료하고 불을 켰다. 누구 같은데? 가람이 되물었다. 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 가람이 어깨를 들썩였다. 최소한 알아내려는 시도를 해 봐. 성의없게. 가람이 몸을 돌려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은찬을 바라보았다. 네가 내 마음에 드는 답변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절대 순순히 알려주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리기로 마음먹고,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걸어다녔다.
여기 어딘가에 단서가 있다는 거겠지. 궁금한것도 궁금한거지만 오기가 발동한 은찬이 세세히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계, 기계, 기계. 과학자인가? 방 끝을 돌아가자 어두운 긴 복도가 나타났다. 이놈의 구조는 어떻게 되먹은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은찬이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장에 cctv가 달려 있었다. 이런 게 달려있다는 걸 보면 자택은 아니겠군. 마음을 먹고 발을 내딛자 놀랍게도 불이 저절로 차례차례 켜졌다. 한없이 긴 복도 옆에는 수많은 문이 있다. 은찬이 걷다가 그중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방은, 은찬이 들어가자 순식간에 환해졌다.
인간의 형상을 한 인영이 보인다. 은찬이 그 물체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자 숨을 멈췄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곤히 잠들어 있지만, 하반신은 차가운 쇠붙이로 덮여 있다. 이건.
"맞아, 리멤브럴 돌(Remembral Doll) 이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은찬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따라온 건지도 몰랐다. 가람이 자박자박 걸어와 은찬의 옆에 서서 반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법 때문에 완성하지는 못했던 아이지.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리멤브럴 돌, 추억 인형.
현존했던 사람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안드로이드였다. 완벽한 인간의 흉내. 주문자가 요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입력된 메모리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피부나 머리카락도 사람과 거의 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죽은 사람을 그렇게나마라도 보고 싶어 절박한 사람들이 사곤 했던 것. 하지만 사람들의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위험의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얼마 못 가 불법으로 분류되고 말았다. 이미 시중에 팔려있던 리멤브럴 돌들은 모두 압수당해 폐기처분 당했고, 한때 잠깐 불었던 바람으로 빠르게 사라졌었다. 그것을 만든 곳이 어디였더라. 은찬이 기억을 더듬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로봇들로 유명한 HM컴퍼니였다. 그리고 이것을 만든 개발자는 아마도, 제 기억이 맞다면... 그 회사에 속한 한 천재 과학자. 하지만 알려진 건 거의 없는, 베일에 쌓인 과학자.
"..HM컴퍼니의, 천재 과학자..혹시..?"
가람이 예쁘게 눈을 접었다. 머리는 완전히 굳은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네. 맞아, 내가 바로 그 천재 과학자야. 영광으로 알아둬, 주은찬. 난 청가람이야. 그것이 과학자인 청가람과 종군 기자인 주은찬의 첫만남이었다. 조금은 색다른 만남, 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기억.
2.
인간보다는 기계들이 훨씬 더 낫다. 청가람은 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고, 여태껏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착실히 듣으며 그대로 행동해봤자 자신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 비해 과학은 들인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돌려주었다.
천재. 그것은 청가람에게 붙어진 수식어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재라는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이. 그중에서도 유독 가람은 과학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청가람을 괴물보듯 했다. 경외의 수준이 아닌, 두려움의 존재로 자리잡았다. 쟤는 인간이 아니야. 그것은 가람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빠. 나 이거 만들어왔어요. 이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칭찬 해 줘요. 부모님이 가람의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가 주저앉았다. 너무 뛰어날 필요는 없어. 제발,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행동해 줘.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왜요? 왜 내가 하고싶은거 다 하면 안 되는데요? 던져진 질문에 답은 없었다.
청가람은 열 네살까지 억지로 평범함을 강요받으며 살았다. 모르는 척 하고, 사실은 다 알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는 지금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그것들을 당장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 수가 없어. 왜 안 돼요? 그러던 어느 날, 가람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진짜요? 가람이 눈을 빛냈다. 진짜 다 해도 돼요? 더 이상, 안 숨겨도 돼요? 그래. 가람이 말했다. 좋아요, 갈래요!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엄마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부모님들은 간다는 청가람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럼, 가람 군은 앞으로 저희쪽에 주시는 겁니다. 네, 알아요. 그냥 빨리 데리고 가주세요. 저 아이가 무서워요, 난. 돈은 약속한 만큼 주는 거죠? 부모님은 자신을 버렸다.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로.
청가람은 자신을 낳은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사람을 믿는 것을 그만뒀다. 쫓겨나듯 도착한 곳은 HM컴퍼니였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 된단다. 가람은 넓게 펼쳐진 방들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어디서 만들면 돼요? 알려줘요, 거기로 갈래요. 가람은 수많은 시간을 혼자서 공부하고 수없이 만들어냈다. 딱히 이걸 만들어서 뭘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만들 뿐이었다, 만들고 싶었으니까. 맨 처음에 새파랗게 어린 가람을 탐탁치않게 생각한 연구원들은 그런 가람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저렇게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현대 과학 기술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지. 당연히 그들은 가람을 질투했고, 가람을 멀리 했다. 저 아이는 괴물이야. 가람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들은 다 그래. 가람이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자진해서 외톨이가 되었기에, 가람의 성격은 점점 더 비뚤어져갔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현실로 구현하고 싶었다. 유리병을 깨뜨려 치우려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에 피가 났다. 피가 나서 벌어진 상처를 보고 있던 가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낫고 아물테지만, 당장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방법은 없을까? 스프레이를 뿌려서 순식간에 피부 조직이 재생되는 것을 만들어냈다. 옷을 대충 입고 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렸다. 귀찮아서 그냥 시중에서 파는 약이나 먹을까 하다가, 먹으면 졸리다길래 졸리지 않는 감기약을 만들었다. 기사에서 잘린 손가락이 봉합할 수 있는 시간을 훨씬 지나 피부조직이 괴사해서 봉합을 못했다는 걸 보았다. 괴사한 조직을 되살려내 다시 봉합수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뭐 해요? 현우가 공중에 스크린을 띄워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가람의 뒤에 와서 물었다. 응, 뭐 해. 대답 성의없어요. 현우가 툴툴거렸다. 몇년간 알고지내왔는데, 한번도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준 적이 없잖아요.
'너한테는 안 해 줄래.'
'정말 너무하네요...'
현우가 가람의 앞에 서서, 빠르게 재생되는 텍스트와 입체영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봐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자신도 후에 이 회사를 이을 후계자이기에, 특수한 교육을 받고 자라 남들과는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긴, 천재인 청가람과 비교할 바는 못되겠지. 현우는 가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공자는 계속 여기 있으면 지겹지도 않아요? 응, 안 지겨워. 가람이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사람이 무서워요? 날아온 질문에 가람이 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징그러워. 망설임없이 떨어진 대답에 현우가 물었다. 저는요?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너는 덜 징그러워.
'왜 그렇게 사람을 싫어해요?'
청가람이 14살에 이곳에 온 이후, 줄곧 회사에 딸린 연구소 안에서 지내며 바깥 세상을 거의 접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만이라면 괜찮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물어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다. 설명해달라고 요청해도 대충대충, 이것도 모르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겠느냔 어투로. 청가람이 까칠하게 굴면서도 일일히 반응해주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청가람을 이 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와, 그 남자의 동생인 현우. 물론 현우는 가람에게 말 걸기 위해 몇 개월을 꾸준히 따라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제멋대로야. 내가 자기들의 기준 안에서만 행동하길 바라고, 통제 범위를 벗어나. 답이 명확하지 않고. 그와 반면에 과학은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아. 정확한 잣대가 있는 거잖아. 가람이 현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어. 그건 현우, 너도야. 단칼이네요. 그럼 이건 어때요? 현우가 턱을 괴었다.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거에요. 안드로이드, 말이에요. 가람이 눈을 굴렸다.
가람은 몇 년간 몰두해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냈다. 사람의 피부조직을 덧입히고, 인모를 심어서 부들거리는 머리칼도 만들었다. 가람이 스위치를 누르자 안드로이드가 눈을 떴다. 가람이 예쁘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나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좋아, 가람이 손을 들어 안드로이드를 쓰다듬었다. 가서 현우에게 자랑했다. 이것 봐. 내가 만든 아이야. 커지는 두 눈.
제 첫 작품인 인간의 형상을 한 안드로이드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폭발적인 반응이에요. 현우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어요. 마치 정말 인간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그런 것들을 원해요. 가람이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 아이들을 금전적인 도구로 사용한다는 게. 현우가 가람의 옆에 앉았다. 할 수 있잖아요, 해봐요. 가람이 단칼에 쳐냈다. 싫어, 팔아먹을 거잖아. 난 팔아먹으라고 내 아이들을 만든 게 아니야.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흥미가 생겨서 가람은 이것저것 더 만들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저장하는 기억들을 수치화해서, 데이터로 만들어서 안드로이드에게 집어넣었다. 내 아이들은 조금 더 인간에 가까워졌어, 가람이 웃었다. 가람이 다른 연구에 몰두하는 사이에 다은 연구진이 와서 그것들을 가져갔다. 왜, 왜 가져가? 그들은 엄청난 액수로 값이 매겨져서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런 천문한적인 액수에도 주문들이 줄줄이 밀려들어왔다. 이게 뭐야. 가람이 멍한 눈으로 주문서들을 바라보았다. 만들어주지 않으면, 앞으로의 지원을 일절 끊을 거래요. 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봐, 너도 똑같잖아.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징그러워.
3.
은찬이 가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물쩡하는 사이에 여길 나가야겠다고 말하겠다는 타이밍을 놓쳐서 그저 덩그러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절 구해줬다는 청가람은 이미 자신에게서 신경을 끈 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은찬이 연구소 안을 걸어다녔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귀신 그림자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인기척이 없다. 원래 연구소 안이라는 게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건가? 생각하던 연구소의 이미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반짝거리는 빛이 보여, 은찬이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띠링 하며 스크린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패스워드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깜짝이야. 은찬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뒤에서 가람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멍청아, 뭐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흥. 웃기고 있네."
투명한 스크린에 빽빽하게 공식을 채워넣고 있던 가람이 팔을 휘젓자 시스템이 종료된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가람이 은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람이 다가오자 패스워드 어쩌고 하면서 절 거부했던 잠금장치가 저절로 해제되었다. 세 개의 스크린이 공중에 떴고, 가람이 손으로 그것들을 앞으로 끌어오자 더 자세히 보였다. 은찬이 읽었다. 리멤브럴 돌.
은찬이 가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그거잖아? 맞아.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기 귀찮아서 안 지웠던 거야. 이슈가 되었던 그 자료가 지금 제 눈앞에 떠올라 있다. 은찬이 혹해서 열심히 쳐다보았으나 일반인인 제가 알아볼 리가 없었다. 가람이 비웃었다. 봐도 모르겠지? 멍청하니까. 은찬이 발끈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걸! 가람이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여기 있던 다른 인간들도 모르더라. 그러면서 왜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달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설명해줘도 입을 헤벌리면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화딱지 나서 한 방 갈겨주고 나왔지. 인간들은 멍청해. 멍청한 그들과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멍청이가 되고 말 거야.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말투, 심지어 약간 혐오스럽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는 청가람이었다. 왜? 은찬이 물었다.
"왜 그렇게 화내?"
"내가 뭘."
"화내고 있잖아."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넌 뭐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그냥 죽게 내버려둘 걸 그랬어. 너도 멍청이고 짜증나는 인간들 중 하나일 뿐인데. 가람이 은찬을 밀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덥석, 은찬이 가람의 손목을 잡았다. 가람이 은찬의 손을 쳐냈다. 잡지 마, 기분 나빠. 날카로운 말에 은찬이 손을 거두었다.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너,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인간들은 다 똑같아. 제멋대로 날 통제하려 해. 그에 비해 과학은 안 그래."
내가 원하는 만큼 돌려주고, 기대에 부응해주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줘. 가람이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난 내 아이들이 좋아, 난 평생 얘네들이랑 같이 살 거야. 가람이 예쁘게 웃었다. 은찬이 미간을 찡그렸다. 평생 같이 산다고? 은찬이 되물었다. 응.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에서 내 아이들이랑, 죽을때까지 재밌게 살 거야. 내 삶은 이 아이들로 인해 행복해. 가람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결혼은? 평생 혼자 살 거야? 가람이 대답했다. 난 과학이랑 이미 예전에 결혼했는데. 은찬이 가람에게 다가갔다. 절 바라보는 선홍색 눈빛. 무덤덤한 눈빛을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그게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응."
"아니야.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
"살아갈 수 있어."
"없어."
"있다니까!"
가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자꾸 시비걸어, 짜증나게. 자꾸 그러면 너 주워온 곳에다 다시 버리고 올 거야. 가람이 머리를 헝클며 협박했다. 하지만 은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렇게 매섭게 반응하는 청가람이, 자신의 눈에는 안쓰러워 보였다. 대체 어렸을 때 어떤 취급을 받으면서 자랐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외로운 사람같아 보여, 은찬이 천천히 가람에게 걸어갔다. 가람이 뒷걸음질쳤다. 은찬이 가람을 보며 생각했다. 상처받은 마음을 애써 꽁꽁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는 불쌍한 사람.
뒷걸음질치다가 벽에 등이 닿았다. 가람이 제 바로 앞에서 멈춘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올라오는 손에 가람이 질끈 눈을 감았다. 뭐 하려는 거지, 불안한 마음과는 다르게 따스한 온기가 볼에 닿아온다. 가람이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은찬의 손이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진지한 검은색 눈동자, 차분하게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이것 봐,
"이게 사람의 온기라는 거야."
".........."
"사람은 사람의 체온을 느끼면서 살아야 해."
그래야지 미쳐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거든. 은찬이 진지하게 말했다. 가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만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온기지? 온전히 자신을 향한 손길을 느꼈던 게 얼마만이지.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없는 가람을 물끄러미 보며 은찬이 생각했다. 이 사람, 내가 알려주고 싶어. 뿌리깊게 잡혀있는 사람간의 불신을 깨고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은찬이 가람의 볼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동그랗게 뜨인 선홍색 눈동자가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홍옥보다 더 선명한 보석, 매혹적인 끌림에 은찬이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4.
스크린에 이름이 떴다. 그것을 확인한 가람의 얼굴이 펴졌다. 주은찬이다. 가람이 신나는 손으로 재빨리 승인했다. 주은찬이 온다, 주은찬이 와. 가람이 손을 멈추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계단을 빠르게 걸어올라가 복도를 지나치고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 멍청한 얼굴을 보여주겠지. 난 여기서 기다릴 거야.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있으면 꼭 주은찬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것 같아 보이잖아? 아니, 지는 건 싫어.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어 고민하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주은찬이 절 찾아오겠지. 그러면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아이들을 손보고 있다가 무심하게 뒤돌면서 왔어? 느림보야. 하고 말할 거야. 아니야, 가람이 발을 멈추었다. 사실, 주은찬을 빨리 보고 싶은데. 어쩌지? 가람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다가 가람이 계단에 털썩 앉았다. 여기에 앉아 있어야지. 돌아가기도 싫고, 주은찬을 마주하러 나가는 건 지는 것 같아서 싫고. 가람이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숙였다. 1분 3초,4초,5초. 은찬이 절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가람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왜 여기에 앉아 있어?"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에 다가왔다. 가람이 고개를 든 채 은찬을 바라보았다. 늦게 왔어, 멍청아. 은찬이 미안, 하고 대답했다. 할 일이 좀 많이 밀려있어서. 가람이 툴툴거리며 은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니까짓 게 많아봤자 나보다 많아? 하여튼 꾸물대지. 가람이 핀잔을 주었다. 은찬의 손을 잡고 계단을 도로 올라가면서 계속 쫑알쫑알 말을 잇는다. 가람의 말을 듣고있던 은찬이 쉿, 하고 가람의 입에 검지손가락을 얹었다. 가람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내 말 듣기 싫다는 거야? 은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아닌데, 입 맞추고 싶어서.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건, 그냥 해도 돼. 정말? 정말. 가람이 끄덕이자, 은찬이 가람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주은찬의 혀가 익숙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렵다. 맨 처음에 제 입안에 혀를 밀어넣는 은찬을 느끼고 왜 이러냐고 물어봤었다. 그런 제 물음에 주은찬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생각나. 가람이 은찬의 목에 팔을 두르며 생각했다. 음,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입맞춤은 원래 이런 거래. 싫었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긴 한데, 싫은 정도는 아니었어. 다행이다. 네가 싫어할까봐 불안했거든. 마주안은 온기가 따스하다. 은찬이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의 입 사이에 은사가 살짝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맛있다."
"난 그냥 그런데."
"너라서 그런 거야, 청가람."
말은 잘하네. 가람이 팽하니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았다. 은찬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따라앉았다. 요새 넌 뭐 했어? 또 새로운 거 만들고 그래?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두뇌 만들고 있어.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거 만들어보려고. 여전하구나, 은찬이 미소지었다. 여전하다구?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일관적이어야지 자신다운 법이야.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은찬이 가람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가람이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나가고 싶지는 않은데. 난 여기가 충분히 마음에 들어. 나가서 스트레스 받기 싫어. 단호한 대답에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밖에는 아름다운 것들도 있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벚꽃잎들, 실제로 본 적 있어?"
"그런 것들은 다 여기 안에서 볼 수도 있잖아. 보여줄까?"
가람이 스크린을 띄워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흰 벽으로 둘러쌓여있던 방이 즉시 어두워지더니 두 사람은 벚꽃이 만개한 곳에 서 있었다. 살랑살랑 떨어지는 벚꽃잎들이 입체적으로 눈앞까지 다가와 마치 정말로 벚꽃나무 숲에 온 것 같았다. 가람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대단하지? 굳이 안 나가도 돼. 이렇게 여기 안에서 다 할 수 있거든. 은찬이 멍하니 가람을 바라보았다. 난 천재니까, 다 할 수 있어. 또 뭐 보고 싶어? 말만 해, 들어줄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은찬을 보고 있던 가람이 문득 생각난 무언가에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주은찬, 카메라 가져왔어? 응, 가져왔긴 한데. 줘 봐. 가람이 손을 활짝 피고 재촉했다. 주변에 휘날리는 가짜 벚꽃잎들을 뒤로 하고 은찬이 가방에서 애지중지하는 카메라를 꺼냈다. 건네받은 가람이 흠, 하고 턱을 괴더니 싱긋 웃었다.
"내가 더 근사하게 만들어줄게,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총총 계단 밑으로 사라진다. 은찬이 가람의 뒷모습을 한 번, 아직도 벚꽃잎이 날리는 풍경을 한 번 보다가 가람을 뒤쫓아내려갔다. 내려가니 가람은 카메라를 옆에 둔 채 서랍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찾고 있었다. 뭐를 하려고 하는 걸까. 청가람이 집중할 때는 말을 걸지 않는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자코 있으려고 했으나 궁금하긴 했다. 카메라, 망가뜨리지만 마. 은찬의 걱정스러운 말에 가람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망가뜨리다니, 내가 왜 그러겠어. 방해되니까 위로 가. 금방 해올테니.
금방 해온다더니, 벌써 한시간이 넘었다. 은찬이 소파에 멍청히 드러누운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쯤되면 슬슬 제 자식이 걱정되기 시작해서 은찬은 다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정말로 청가람이 자신의 카메라를 부숴먹었을리는 없겠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은찬이 몸을 일으키고 가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던 순간, 가람이 나타났다. 타이밍 좋네.
은찬에게 걸어온 가람이 카메라를 내밀었다. 순순히 받아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은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달라진 거 없어 보이는데? 가람이 싱긋 웃었다. 정말 그럴거 같아? 한 번 찍어봐, 아무거나. 그러면 알게 될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은찬이 흠,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셔터를 눌렀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한가운데에 스크린이 나타났다. 가람의 모습이 크게 올라와 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찍은 사진이었다. 이거 뭐야? 놀란 은찬의 말에 가람이 대답했다. 네가 사진을 찍으면 자동적으로 여기에 백업되도록 설정해 놨어. 혹시나 본체가 망가지더라도 데이터가 날아가버리는 일은 없도록.
"괜찮지?"
가람이 어서 칭찬해달라는 듯 꽃받침을 했다. 은찬이 스크린과 카메라에 뜬 가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지금 자신을 보고 재촉하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피식, 은찬이 미소를 지었다. 이럴려고 이거 가져오라고 한 거였어? 은찬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응, 좋아. 이러면 날려먹을 필요도 없겠어. 청가람. 으응? 가람이 머리를 기울였다. 사진 찍으러 가자. 은찬이 제안했다.
뭐? 가람이 얼굴을 굳혔다. 지금, 당장 같이 나가서 이 카메라로 사진찍고 오자. 그러고보니까, 우리 둘이서 찍은 사진 별로 없잖아. 은찬이 꼬드겼다. 가람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고민할 새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난 안 나갈래. 귀찮아, 싫어. 은찬이 가람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여기서 계속 박혀살잖아. 나간 적이 있긴 해? 자기를 무슨 은둔형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은찬의 발언에 가람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
"내가 그때 너 주워왔잖아!
"그 때가 마지막이지? 그 이후로 나간 적 없을 거 아냐, 솔직히 말해."
"이익...왜 그렇게 밖에 집착하는데! 여기서 찍어도 돼, 내가 예쁜 배경 띄워줄게, 여기 있자."
가람이 벚꽃 풍경을 다른 풍경으로 바꾸기 위해 명령어를 입력하려는 것을, 은찬이 저지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속삭였다. 정말, 안 나갈 거야? 은찬이 가람의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밖은 이 곳과 달라, 청가람. 아니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랑 같이 가면 다를 거야. 부드럽게 꾀어내는 목소리, 제 볼을 쓰다듬는 주은찬의 부드러운 손. 나가자. 가람의 눈이 흔들렸다.
5.
부아아앙, 한밤중의 고요한 정적을 뚫고 시원하게 울려퍼지는 오토바이 소리. 가람이 필사적으로 은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인용에 적합하게 만들어져있는 오토바이에 두명이 탑승하니 무게중심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많이 불안하다. 게다가 이런 속도로 달려가면 중간에 뒤집혀지지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주은찬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내리면 바로 돌아가자고 해야겠어. 물론 이런 부실한 기계 따위로 돌아가면 미친짓이니까 현우자식이나 불러내야지. 좋기는커녕 이게 뭐야, 눈도 못 뜨겠잖아. 두 눈을 꼭 감은 채 세찬 바람과 부앙거리는 소리만 들으며, 가람이 은찬의 허리를 더욱 꽉 잡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은찬이 드디어 속도를 천천히 줄여가며 한적한 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너한테 속았어."
"그래?"
가람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헬멧을 벗으며 은찬을 노려보았다. 헬멧을 건네받아 손잡이에 걸은 은찬이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은찬의 손을 노려보던 가람이 결국 손을 맞잡고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밤이라 주변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린 곳은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는 막다른 길이라 딱히 더 걸어갈 데도 없었다. 뭐야, 예쁜 거 보여준다더니. 거짓말쟁이. 가람이 불평했다. 은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는 아니고, 조금 더 걸어가야 해. 그리고 가람을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 가람이 팔짱을 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은찬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눈 감아, 청가람. 응? 가람이 삐끗한 소리를 냈다. 눈 감으라고, 내가 손잡고 이끌어 줄 테니까 눈 감고 따라와.
"눈 감고 걸으라고? 위험하잖아."
"날 믿어봐, 한 번만 더 속는 셈 치고."
은찬이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 가람이 떨떠름한 얼굴로 은찬의 손을 잡았다. 꽈악, 아프지는 않지만 힘있게 쥐어오는 손. 아직 눈을 뜨고 있으려니 연달아 주은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람아, 눈 감아. 가람은 다시 한번 속는 셈 치고 눈을 감기로 했다. 잘했어, 이제 가자. 내가 눈 뜨라고 하기 전까지는 눈뜨면 안 돼.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가람은 은찬의 손에만 의존한 채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주은찬, 잘 가고 있는 거야? 주변에 뭐 부딪힐 건 없는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간히 물어가면서.
발 조심해, 이제부터 내려가니깐. 가람이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떼었다. 내리막길이다, 그것도 포장되지 않은 길. 발목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났다. 으, 주은찬! 가람이 와락 소리치며 눈을 뜨려 했다. 조심조심 내려가면서도 혹시나 청가람이 눈을 뜰까 바라보던 은찬이 재빨리 손으로 가람의 눈을 가리고는 얼렀다. 보일 듯 말듯했던 시야가 다시 깜깜해진다. 별 거 아니야, 그냥 부러져있던 나뭇가지야. 별 거 아니긴 뭐가 별 거 아니야. 가람이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은찬의 손을 잡아내리려고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응? 은찬이 부드럽게 달랬다. 그 말에 풀어진 가람이 다시 한 걸음,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 걸음. 세 걸음, 열 걸음. 기울어진 언덕 같은 곳이 끝난 것 같았다.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고 평평한 땅이 밟혔으니 말이다.
향기. 여전히 눈은 은찬의 손에 가려진 채, 가람이 문득 속으로 중얼거렸다. 향긋한 꽃향기가 난다. 은찬이 발걸음을 멈추자, 가람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은찬이 가린 손을 치웠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눈 떠도 돼. 가람의 속눈썹이 슬며시 움직였다.
"......"
눈을 뜬 후, 보이는 풍경에 가람은 제자리에 붙박혀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 사방이 흩날리는 벚꽃잎들로 가득했다. 살랑 부는 바람에 보드랍게 날아오며 제 머리칼을 스치고 떨어지는 연약한 잎들. 두 사람이 지금 서있는 곳에는 벚꽃나무들로 가득했다. 은찬이 셔터를 눌렀다. 멍하니 제쪽을 보는 청가람의 모습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은찬이 가람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괜찮지? 바깥 세상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아?
은찬이 가까이 있는 벚꽃나무로 다가가 가지를 하나 꺾었다. 흔들, 바람에 움직이는 꽃잎을 가람의 귀 옆에 꽃아주었다.
"예쁘다, 잘 어울려."
주은찬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또 뒤로 몇 발자국 떨어져서 셔터를 눌렀다. 귀 옆에 꽂은 벚꽃과 그보다 더 예쁜 청가람이 어우러져 눈이 멀 듯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새하얀 달이 떠 있어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찬이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 안에 담기는 청가람의 모습, 저장되는 기억들. 가람이 자박거리며 은찬의 앞으로 걸어갔다. 점점 다가오는 가람의 모습이 카메라 속에 담겼다. 주은찬. 가람이 은찬의 손에서 카메라를 잡아내렸다. 언제까지 들고 있을 거야? 가람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은찬이 카메라를 가방 속에 넣고 땅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잘 했어. 까르르, 가람이 웃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소리에 은찬이 가람을 끌어안고 땅으로 쓰러졌다.
풀내음과 벚꽃향기와 밤공기가 어우러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괜찮네, 좋아. 가람이 은찬의 코 끝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중에서도 벚꽃 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진해서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아니다. 은찬이 가람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청가람의 체향에 홀려 있었던 거야.
6.
"예전과 비교해서 분위기가 달라져서 좋아요."
가람에게서 자료를 건네받으면서 현우가 말했다. 분위기? 가람이 되물었다. 네, 분위기 말이에요. 예전에는 공자 옆에만 가면 차가운 공기가 돌고 긴장되어있는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풀어진 느낌? 뭐라 표현하기에는 어려운데, 하여튼 느낌이 그래요. 가람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도 네가 뭐라는지 모르겠다.
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좋은 쪽으로 변한거니 됐어요. 아마도 이걸 바꾼 사람은 그 사람인가요? '그 사람'이라는 말에 가람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현우가 어깨를 으쓱 하고서는 이름을 내뱉었다. 주은찬, 이라고 했던가요. 공자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 같아서 맘대로 여기에 들락날락 해도 신경 안썼지만요. 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해요.
"이 세상에 '징그러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 이만 가볼게요, 쉬엄쉬엄 해요. 현우가 방을 나갔다.
주은찬이 날 바꿔놓았다구? 가람이 곰곰히 생각했다. 가람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조금 그런 것 같긴 해. 처음에 봤을 때, 사람은 사람의 체온을 느끼면서 살아야된다느니 말했었지. 모든 것을 다 아는, 천재인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주은찬의 행동에 화를 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들렸던 것은 따스한 목소리, 진심이 담긴 말. 주은찬을 알고 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주은찬, 주은찬, 세 글자를 말하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 난 청가람이라는 단어가 제일 좋아. ]
맞아, 나도 그런 것 같아, 주은찬. 가람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은 사람으로 치료받아야 해. 너 덕분에 새로운 공식을 하나 알았어. 가람이 스크린에 문장을 적어넣었다. 정말 그말대로 되었네. 주은찬, 네가 너무 좋아. 계속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 번 알고 나서는 놓을 수 없게 됐어. 나는 과학이 좋아. 하지만, 너도 좋아. 어쩌면 내 전부인 과학보다 소중한걸지도 몰라.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청가람에게 있어서는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든지 가까운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던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큰 이슈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니까. 연쇄살인마가 3번째 희생자를 냈다더라, 어느 공장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더라. 내 세계와 관련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이슈는 주은찬이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군기자, 주은찬.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바깥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을 졸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 가면 안 돼? 사실, 난 왜 니가 그런 죽는 직업을 좋아라하는지 모르겠어. 죽다니. 은찬의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죽어, 가람이 너랑 계속 즐겁게 살 건데 왜 죽겠어. 아직 하지 못한 것도, 알려주지 못한 것도 많이 남아있는데. 은찬이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도로 떼었다. 난 내 일이 좋아, 네가 과학을 좋아하는 것처럼. 정확히 청가람이 잘 알아듣게 알려주는 은찬의 말에 가람이 못미덥다는 얼굴이었지만 수긍했다. 알았어.
"알아줘서 고마워."
주은찬은 가람의 사소한 말에도 일일히 반응을 했다. 마음이 조금 안정된 가람이 물었다. 언제 떠나는데? 내일 모레. 가람이 잠시 생각했다. 그거 만드는 데 하루면 되지 뭐. 그리고 은찬에게 통보했다. 그럼, 내일 잠깐 여기 들렸다 가. 줄 거 있어.
은찬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가람이 목에 매달렸다. 진한 포옹에 당황했던 은찬은 곧 팔을 들어올려 가람을 힘있게 끌어안았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가람이 은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주먹크기보다 조금 작아보이는 쇠뭉치에 은찬이 물었다. 가람이 대답했다. 그거 절대로 몸에서 떼어놓지 마. 그게 너에게 날아올 수 있는 총알이랑 파편들을 막아줄 거야. 반경 1m이하로 들어오는 일정 크기와 일정 속도 이상이 되는 물체를 순식간에 분자 크기로 분해하는.... 가람이 대충 설명하려다 은찬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꿨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총이나 파편에 맞아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돼. 가람이 은찬의 손을 꼬옥 접어주며 말했다. 응. 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람이 준 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중, 가람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
"응,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돌아올게."
"돌아오자마자 여기로 와."
"응, 몰골이 꾀죄죄하다고 나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돼."
"...꼭이야."
가람이 은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보내는 사진들로 네가 어디쯤에서 뭐 하고 있는지 다 아니깐, 그러니깐. 가람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줘, 멀쩡하게 돌아올게. 은찬이 가람의 귀에 속삭였다. 쿵쿵, 일정하게 느껴지는 주은찬의 심장소리에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기다릴게. 가람이 중얼거렸다. 은찬은 가람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7.
주은찬이 전쟁터로 넘어간 지 한 달. 가람은 매일매일 은찬이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서 기다렸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그래서 주은찬이 제 옆으로 얼른 다시 돌아오기를. 혹시라도 다칠까봐 은찬의 손에 방어막을 쥐어주긴 했지만 안심이 되질 않는다. 이거 건강에 별로 안 좋은 걸지도 몰라. 가람이 더 이상 진전없이 멈추어진 복잡한 공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다음에 뭘 추가해야 하더라?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주은찬의 카메라에서 이 곳으로 매일 보내어지는 사진들에, 한 장 이상은 주은찬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가람은 스크린에 나타나있는 초록색 점을 보았다. 카메라에서부터 발신되는 위치표시였다. 주은찬은 항상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니, 저 표시가 뜨고 있는 곳은 은찬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다치지 마. 가람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멍청하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돌아와. 그 때, 가람이 벌떡 일어났다.
현우! 가람이 현우가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현우도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모니터 가득 재생되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하게 달리던 가람의 발이 영상을 보고 우뚝 멈추었다. 인질을 붙잡았다고, 당장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인질을 한 명씩 차례대로 죽이겠다는 경고 영상. 지지직거리는 영상이었지만 한 사람만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가람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저..거, 저거.. 주은찬이지?"
가람이 떨리는 손으로 영상 안의 사람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주은찬이잖아, 맞잖아. 영상의 질이 좋지 않아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보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주은찬이라는 것은 더 명확하게 알고 있다. 왜 쟤가 저기 잡혀있어? 가람이 현우의 멱살을 잡았다. 야, 왜 주은찬이 저기 가 있냐고. 가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 나갈래. 가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현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가람이 영상 속에 담겨있는 은찬에게 눈을 고정하면서, 여전히 현우의 옷을 붙든 채 반복했다. 날 보내줘. 응? 그때처럼 해줄 수 있잖아. 현우의 멱살을 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가람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나갈래. 나가고 싶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주은찬이라는 세 글자밖에 들어있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도 주은찬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아서. 인질들이 잡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람이 안절부절 못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찌나 세게, 계속 물어뜯었던지 피가 뚝뚝 나올 지경이었다. 현우가 그런 가람의 손을 잡아내렸다. 그러지 마요. 주은찬은 괜찮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가람이 생각했다. 맞아, 그럴 거지만 그래도. 아 제발, 제발. 가람이 간절히 기도했다. 영상에서는 이미 두 명이 죽었다.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다. 기계음이 공중을 웅웅 떠돌아다닌다. 한 기의 제트기가 착륙하고 가람이 뛰어내렸다. 모래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검은동굴 안. 거기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곧이어 제트기 두 대가 더 착륙했다. 용병들이 지시하는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현우가 제 손이 닿는 범위에서 사라진 가람을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자, 위험해요!
위험하지 않아. 가람이 엎어질듯 엎어지지 않을 듯 휘청거리며 달렸다. 보초를 서고 있던 괴한들이 나오며 총을 겨눈다. 불꽃을 내뿜으며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된다. 하지만 청가람에게 향하는 총알들은 가람을 맞추지 못하고 어느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뭐야?! 뭐야!!괴이한 현상에 적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기들끼리 빠르게 주고받다가 멀리서 날아오는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가람이 헉헉거리며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둡다, 어둡네. 네 붉은 머리칼도 안 보이겠어. 저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청가람에게 달려들려던 사내가 뒤에서부터 날아온 총알에 맞아 픽 고꾸라졌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지나친다, 피냄새가 나는 곳을 지나, 주은찬이 있을 곳으로. 가람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이름을 불렀다.
"주은찬?"
하지만 그곳에 주은찬은 없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은찬의 카메라와, 피웅덩이 속에 남아있는 잘려나간 누군가의 왼팔 뿐이었다. 눈앞이 빨갛다. 아찔, 현기증이 난다.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다잡았다. 잘못 보고 있는 건가? 가람이 비척거리며 다가가 피웅덩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흰 옷이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가람이 잘려진 팔을 집어들었다. 차갑다. 1시간은 족히 된 것 같다. 주은찬의 팔이다. 왜 팔만 있지? 주은찬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게 뭘까,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천재인 자신의 두뇌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돌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용병들 중 하나가 동굴벽에 붙여져있는 자그마한 폭탄을 발견했다. 폭탄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빨리 피해야 돼요! 급박한 목소리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시끄럽게 웅웅거린다. 사라진 가람을 찾아 안으로 들어온 현우가 잘려진 왼팔을 들고 멍하니 있는 가람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 없어요, 가야 돼요! 싫어, 싫어. 시간이 멈춘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청가람이 발버둥쳤다. 공자, 빨리 나가야 돼요. 여기서 죽고 싶어요?! 현우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가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멍청아, 놔! 가람이 손을 탁 뿌리쳤다. 붉은 눈이 번뜩거렸다.
"나가고 싶으면 너나 나가."
다급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2분 14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우가 아예 가람을 들쳐업고 일어났다. 가람의 옷에 번져있던 진득한 혈액이 현우의 옷까지 번졌다. 내려줘, 미친놈아. 가람이 현우의 등을 퍽퍽 때렸다. 내려줘, 내려줘. 가람이 울었다. 주은찬이 여기에 있을 거란 말이야. 현우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동굴안에서부터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충격에 현우가 엎어졌다. 그 바람에 가람도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잘려있던 왼팔도 옆으로 떨어졌다. 이글이글 불타는 열기. 차마 동굴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못했던 세 명의 용병들의 비명소리가 폭발음에 섞여나왔다. 윽, 얼굴이 화끈거리며 아려온다. 손등도, 다리도 아려온다. 가람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몇 분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있었던 동굴 안으로. 흐윽. 처참하게 변해버린 흔적을 보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잖아.."
청가람이 울먹거렸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주은찬. 왜 내 말을 안 들어.
가람이 울부짖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처절한 울음소리. 멍청아, 가지, 말라고, 했잖아. 꼭, 내 곁에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오열하는 가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우가 일어서지 않으려는 가람을 다시 억지로 일으켜서 태우고 갈 때까지.
8.
가람이 피폐해진 눈을 들어 복잡한 분자모형들로 가득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가람이 스크린을 껐다. 방이 어두워진다. 가람이 계단을 내려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유리상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신체에서 잘려나간 왼팔. 복잡한 선들에 이어진 은찬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가람은 기억을 떠올렸다. 멀쩡하게 내 옆으로 돌아온다더니. 지금 옆에 있는 것은 저 팔 뿐이다. 그 때 그곳에서 저 팔을 집어왔을 때는 아직 주은찬은 반드시 살아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나중에 말끔하게 이어붙여주려고 신경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절단된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처리하고, 정맥과 모세혈관을 일일히 연결해서 외부로부터 혈액을 순환시켜서, 저 손을 만지면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났다. 새롭게 들리는 소식은 없었다. 주은찬 때문에 듣지 않는 외부의 소식도 매일 듣는다. 하지만 자신이 제일 간절하게 원하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과학도 하기 싫었다. 가람은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주은찬은 죽었,겠지. 가람이 처음으로 은찬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대입했다. 숨이 막혀온다. 괜찮아, 숨 쉬자. 흐려지려는 시야를 애써 손등으로 훔쳤다. 가람은 이제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심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다. 이런 날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잖아, 주은찬. 날 안고 등을 쓸어내려주면서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해줘야 하잖아. 가람이 은찬의 왼팔을 만졌다. 따스한 온기가 만져진다. 가람이 은찬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내가 다시 살려내줄게. 널, 내가 다시 만들어줄게. 네가 다시 눈을 뜨면 그 입으로, 그 손으로 날 잡아주면서 달콤하게 내 이름을 불러줘.
청가람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혼자서 온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 말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HM연구소 내부의 시스템을 조정했다. 일방적으로 뭐라뭐라 말하려는 현우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밤낮없이 휘갈기며 공식을 써내려갔다. 스크린이 가득 차고 그것을 다시 옮기고 빈 스크린에 미친듯이 다시 써내려갔다. 사람을, 주은찬을 만드려면. 혈관을 일일히 만들어서 연결하고, 숨을 쉴 수 있는 폐도 만들고,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도, 흑진주보다 아름답고 귀한 검은색 눈동자도, 내가 좋아하는 멍청한 얼굴도. 항상 내 생각도 해야 해. 뼈대에 근육이 입혀지고 살이 입혀지고, '그것'은 점차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람이 눈을 감은 채 기계장치에 매달려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인간의 살결과 똑같고, 따뜻함도 느껴지고, 심장도 뛰고, 스스로 생각도 하고. 가람의 시선이 비어있는 왼쪽 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터에서 들고온 은찬의 잘린 팔을 연결했다. 우리들이 함께한 기억을 데이터화시켜서 입력하고, 넌 이제 주은찬이 된 거야. 가람이 조그맣게 은찬의 이름을 불렀다.
"...주은찬."
'은찬'이 천천히 눈을 떴다.
9.
몇개월간 위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무시하고 제 할일에만 몰두하던 가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벌컥,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온 가람을 보고 현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 왠일입니까? 가람이 웃고 있었다. 아주 환하게. 그런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소름이 돋았다. 설마, 미쳐버린 건가? 주은찬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기지 못해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환하게 웃을 리가 없었다. 현우야. 가람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현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청가람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너, 은찬이랑 한번도 인사한 적 없지?
"인사해, 주은찬이야."
뭐라고요? 현우가 미간을 좁혔다. 스윽, 가람이 뒤를 돌아보며 사랑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도 돼. 한 인영이 방으로 들어왔다. 현우는 가람의 뒤에서 나타난 한 사람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붉은 머리카락, 생기있는 검은 눈, 피가 돌고있는 것을 알 수 있는 피부빛. 은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될까? 은찬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현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입장에서 나는 가끔 도둑처럼 슬금 들어왔다가 사라지기만 했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인사하라고 하니 기분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가람이 그런 은찬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앞으로는 도둑처럼 들어오지 않게 해주려고 인사시킨 거야, 멍청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현우가 으득, 이를 갈며 씹어뱉었다.
"...공자, 당신 진짜 미쳤군요."
성큼성큼, 가람의 앞으로 걸어간 현우가 망설임없이 손바닥으로 가람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짜악, 큰 소리가 나며 가람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지금 뭐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현우의 행동에 은찬이 불같이 화를 내며 가람의 볼을 한번 더 내리치려는 손목을 잡았다. 현우가 그런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잡힌 손의 느낌이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차가운 안드로이드의 느낌이 아닌,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사람의 온기다.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그 모든 것이 인간인 주은찬과 똑같았다. 현우가 소름끼치도록 낮아진 말로 볼을 감싸쥔 가람에게 내뱉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완전히, 그 사람이잖습니까!!"
그동안 저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조용히 있었던 게, 이렬려고 그런 거였습니까? 현우가 무섭게 화를 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긴 해요?! 현우가 가람을 노려보고 크게 소리쳤다. 은찬이 낮게 협박했다. 너, 청가람에게 그러지 마. 현우가 제 손목을 잡고있는 은찬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하는 행동도. 전과 같이 법으로 금지당한 '리멤브럴 돌'과는 다르다. 동기화된 데이터를 가지고 일정한 패턴으로만 반응하는 인형이 아니다.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가람이 조용히 중얼댔다. 맞아, 주은찬이야. 뭐라고 했습니까? 가람이 부어오른 볼에서 손을 떼고 현우를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글자 힘있게 뱉었다.
"주은찬이, 돌아온, 거야."
현우가 입을 다물었다. 가람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돌아온 거야, 살아온 거라고. 가람이 우는 것을 본 은찬이 당황하며 현우의 손을 놓고 가람의 옆으로 다가왔다. 가람아, 왜 울어. 멈칫거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볼을 어루만지며 달랜다. 가람이 계속 울었다. 물기가 일렁거리는 선홍색 눈이 현우를 향했다. 한번만 눈 감아줘, 내가 불쌍해보인다면. 제발, 상부에 보고하지 마.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눈감아줘.
은찬이 가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울지 마. 다 괜찮을 거야.
10.
"뭐해?"
은찬의 목소리에 가람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뭐 하는 것 같아? 은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가람이 수긍했다. 맞아, 넌 모를거야. 왜냐하면 넌 멍청이니까. 깎아내리는 가람의 발언에 은찬이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막 대하는 거야 가람아? 나 이러면 삐져서 네가 불러도 안 올지도 몰라. 가람이 픽 웃었다. 절대 안 그럴거 알아, 주은찬. 신빙성없는 말 그만해.
"안 넘어오네."
은찬이 민망한 표정을 짓다가 가람의 허리를 붙잡은 채 뒤로 잡아끌었다. 어어? 땅바닥으로 볼품없이 추락할 것 같은 불안함에 가람이 은찬을 덥석 잡았다.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응, 뭐 하는 거야. 되도않는 말로 대답한 은찬이 쪽 하고 가람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에 가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또 수작이지. 은찬이 웃는다. 그래 보여? 충분히. 가람이 은찬의 목에 팔을 둘렀다. 더 해줘. 가람의 말에, 은찬이 대답했다.
"기꺼이."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은찬이 한 손으로는 가람의 허리를 받쳐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람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으응, 가람의 숨결이 훅 끼쳐온다. 자연스레 눈을 감고 청가람의 입을 열고 들어갔다. 하아, 달아오른 숨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제 등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몇 분간의 진한 키스가 이어진 후, 가람이 감았던 눈을 떴다. 주은찬의 검은 눈이 바로 앞에서 보였다. 넌 언제봐도 항상 예쁘다. 당연한 말을 내뱉는 은찬의 말에 가람이 새침하게 입을 비죽 내밀었다. 영광으로 알아, 천재인데다가 예쁘기까지 한 나를 가졌으니까. 은찬이 제 코를 가람의 코에 살짝 맞댔다. 묘한 느낌에 가람이 눈을 조금 찡그렸다. 미묘한 가람의 표정에 은찬이 놀리듯이 말했다. 미천한 제가 감히 손을 대서 기분이 나쁘진 않으실까 걱정되네요. 그 말에 가람이 머리로 은찬의 이마를 살짝 쳤다. 아야, 은찬이 눈을 찡그렸다. 가람이 몸을 바로 일으키고서는 말을 던졌다.
"아시면서, 충분히 그러시고 계시잖아요?"
가람이 입꼬리를 올렸다.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웃음에 홀려 잠시 주은찬이 멍을 때리는 사이 가람이 은찬의 품에서 벗어나 방을 나가고 있었다. 뭐 해,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은찬이 서둘러 가람의 곁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 안의 불이 저절로 꺼졌다.
엘레베이터가 올라간다. 띵, 경쾌하게 들리는 기계음소리가 나고 엘레베이터가 열렸다. 하암, 가람이 작게 하품을 하며 은찬의 왼손을 잡았다. 졸려? 은찬이 하품하는 가람을 바라보곤 물었다. 응, 졸리긴 하네. 3일간 통틀어서 4시간밖에 못 잤어. 은찬이 기겁했다. 그렇게 자면 몸 망가져. 빨리 자.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고 수면실로 이끌었다. 푹신한 침대에 가람이 걸터앉았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었는데 여기오니까 급격히 졸리는 것 같아. 은찬이 가람을 눕혀주었다. 그러니까 얼른 자. 응. 가람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가람이 반쯤 감긴 눈으로 잠에 취한 채 은찬을 보며 당부했다. 어디 가지 마. 가면 안 돼. 짧게 푹 자고 일어날테니까, 계속 여기에 있어줘야 해.
"응, 계속 네 옆에 있을게."
은찬이 대답했다. 가람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은찬의 왼손을 꼭 잡은 채 잠들었다.
은찬은 잠든 가람을 바라보았다. 보드라운 살결, 따스한 입술, 아름다운 머리카락, 자신을 향한 선홍색 눈동자. 은찬은 오른손으로 잠든 가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으음, 가람이 살짝 뒤척이다가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청가람은 왠지는 모르지만 제 신체부위중에서 왼손을 제일 좋아했다. 걸어가며 손을 잡을 때도 왼손, 이렇게 잠을 잘 때도 왼손을 꼭 붙잡고 잠을 잤다. 이유는 모르지만 가람이 좋아해서 그런지 은찬도 자신의 신체부위중에서 왼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은찬이 자고있는 가람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네가 너무나도 소중해, 청가람.
11.
띠링, 외부의 승인으로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가람은 스크린 가득 공식을 채워넣고 있었고, 주은찬은 한 쪽 구석에서 의자에 앉은 채 그동안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은찬을 바라보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표시였다. 현우가 다시 가람에게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귀찮게 왜 왔어, 부탁했던 건 넘겨줬을 텐데? 방해하지 마. 가람이 현우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도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람이 공식을 써놓고 컴퓨터로 데이터를 옮겼다. 가람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왜 아무말도 안 하는 거지?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놔도 바득바득 방해하면서 제 할말만 하던 현우놈이다. 궁금하네. 가람이 입을 열었다. 뭐야?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나가. 나 바쁘니까. 사진을 살펴보고 있던 은찬이 두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느껴지는 주은찬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현우가 입을 떼었다. 중요한 거에요, 공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소식.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니까. 내 아까운 시간이나 뺏지 말고. 가람이 짜증을 냈다. 후. 현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 사람, 살아있습니다."
뭐래는 거야? 앞뒤 다 잘라먹은 현우의 말에 가람이 인상을 구겼다. 그 사람. 현우가 반복했다. 자신의 뒤로 시선을 주었다가 주먹을 쥔다. 그런 현우의 행동을 지켜보던 가람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는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가람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현우가 마지막으로 말을 전달했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온 겁니다.
오랜만에 본 바깥 세상은 또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따위는 어찌되든지 좋았다. 가람은 양 손을 꼭 붙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울부짖으면서 연구소 안으로 돌아온 이후로 네가 죽었다고 믿으며 2년 반을 보냈다. 현우의 뒤를 따라 가람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기억속에 남아있던 너는 온전히 죽은 사람이고, 나는 너의 자리를 대신할 아이를 만들어냈지만.
네가 정말로 살아있다니.
가람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침상 위에 앉아있는 사람을 본 순간 가람이 입을 막았다. 더 이상은 말라서 나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가람이 넘어지려는 다리를 이끌고 엎어질 듯 달려가 은찬을 와락 껴안았다. 주, 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람아...."
부서져라 가람을 꼭 껴안으며 은찬이 계속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청가람, 가람아. 내 가람이.
미쳤나봐, 이거 꿈은 아니겠지. 눈물샘이 고장난 듯 끝없이 쏟아져내린다. 하지만 꿈이 아니다. 절 마주안아주고 있는 온기는 기억속에 잠들어있던 유일한 온기였다. 미안해, 늦게 와서. 은찬이 사과했다.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가람이 눈물범벅 된 상태로 얼굴을 떼서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푸 웃었다. 어떡하지, 나 진짜 제대로 콩깍지가 씌였나 봐.
"눈물범벅이 된 네 얼굴도 정말 예뻐....."
은찬의 눈에서 물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다시 가람을 껴안았다. 사랑해, 청가람.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청가람. 흐윽. 가람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난 너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과학도 집중할 수 없었어. 가람의 말에 은찬이 웃음기가 섞여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정말 듣기 좋은 말인데.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보려 품에서 잠시 떼어놓았다. 울지 마, 가람아. 은찬이 오른손으로 가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야 말로. 가람이 질세라 맞받아치며 은찬의 눈물을 닦았다.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어 지금에서야 은찬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조잡한 로봇팔로 대신 움직이는 왼팔. 은찬이 그런 시선을 읽고 가람을 달랬다. 이건 어쩔 수 없어...그 때 당했던 거거든. 그래도 어떤 고마운 분이 이 팔을 대신 달아주셔서, 이젠 익숙해. 그리고 네가 이보다 더 좋은 팔을 달아주면 되지. 은찬이 미소지었다.
하지만 가람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건 차가운 기계로 된 왼팔. 그러나 연구소 안에 남아있을 '주은찬'에 달려있는 건 따스한 왼팔이다.
12.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될지 모르겠다. 가람은 연구소에 돌아온 후, 절 반갑게 맞이하는 은찬을 보고 흠칫했다. 어디갔다 왔어? 걱정했잖아. 음, 별 거 아니었어. ..나 급하게 처리할 게 있어서 가볼게. 가람이 당황하며 자리를 피했다. 은찬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라지는 가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2주가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 말은 역시 그만큼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인간인' 은찬을 위해 제가 생각했던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말과 똑같았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살아돌아온 은찬이 있으니, 제가 만든 주은찬은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내 손으로 어떻게 저 주은찬을 죽일 수 있지? '죽인다'? 가람이 손을 멈췄다. 작동을 중지시키는 게 아니라,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 살아있는 인간인 주은찬을 대하듯이 애정을 주었다. 감정을 주고, 사랑을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차마 잔인하게 내칠 수가 없어 '은찬'을 피해다녔다.
가람아, 요새 왜 나 피해? 나 뭐 잘못했어? 물어오는 은찬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가람이 말을 흐렸다. 그리고 은찬이 절 붙잡을새라 재빨리 몸을 피했다. 청가람!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양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 동안 저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더더욱 혼란스럽고 슬프다. 네 왼팔을 떼어서 주은찬에게 붙여줘야 하는데, 라고 말해줘야 되는거야? 너는 네가 인간인 줄로만 알고 있잖아. 내가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말해준 후에도, 네가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주은찬이 살아돌아왔어, 원래부터 인간이었던 은찬이 말이야. 이제 죽어줄래?
가람이 멍하니 있다가 손을 베었다. 피가 똑똑,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가람!"
은찬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가람의 손을 지혈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집중도 안 하고, 상처만 내고! 가람이 은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게, 넌 가서 네 일 해도 돼. 가람이 은찬을 밀어냈다.
청가람, 요새 왜 자꾸 날 피해? 전처럼 환하게 웃어주지도 않잖아. 말해줘, 나는 네 웃음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어. 가람아, 청가람.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가 무겁다. 왜 가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로지 3주 전, 갑자기 절 남겨두고 현우와 같이 사라졌던 날 이후로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 때, 눈앞에 스크린이 떴다. 보안장치가 걸린 기밀 문서였다. 이게 갑자기 왜 제 앞에 뜬 걸까.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은찬이 스크린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비어있던 암호장치에 자동적으로 비밀번호가 입력되었다. 뭐지? 은찬이 눈을 찡그렸다. 빨간불이던 창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은찬이 승인창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나타났다. 은찬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방안 가득 찬 문서와 안드로이드 기반 3D 입체 영상, 여러가지 기술에 관한 자료들이 비친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은찬이 홀린 듯이 그것들을 읽어내려갔다. 한 창을 끝내고, 뒤에 떠있는 창을 앞으로 끌고와 읽고 다시 옆으로 옮겨가면서. 자료를 읽어가면서 은찬은 한 가지 중요하고도 슬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인 주은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왜 자신이 만들어졌는지, 존재 이유를. 그리고 폭발에 휩쓸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은찬이 살아있다는 사실도. 왼팔은 없는 상태 그대로.
은찬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왜 청가람이 자신을 보고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없는지, 왜 가람이 계속해서 자신을 피해다니는지. 왜 지금은 자신을 '은찬'이라고 불러주지 않는지. 그리고, 왜 왼손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는지. 은찬이 자신의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13.
어두운 연구실 안에 들어온 가람은 불이 켜지고, 아무도 없을 방 안에서 누군가가 앉아있던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누ㄱ, 너....? 여기에 왜. 가람이 놀란 눈으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의자에 앉은 채 동그랗게 눈을 뜬 가람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가람아, 나 왜 네가 날 피하는지 알게 됐어. 네 입으로 말하기는 그랬던 거지? 슬픈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날아온다. 가람이 흔들거리는 눈으로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은찬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은찬이 사과했다. 그리고 제 왼팔을 바라본다. 아아,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주은찬'이 그 사실을 알았구나.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짐작가는 사람은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같이 자라온 사람. 은찬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제자리에 붙박혀있는 가람의 앞에 섰다. 가람이 고개를 살짝 올려 그런 은찬을 바라보았다. 풍부한 표정. 슬픔이 가득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가람아, 청가람. 그리고, 정말로 슬픔을 아는 목소리다.
은찬은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는 왼손으로 가람의 오른손을 잡았다. 청가람은 그런 은찬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말없이 은찬은 가람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엄지, 검지, 중지, 그리고 약지까지 하나하나 손가락을 다. 손 끝에 있을 지문도 꼭 매만졌다.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이, 마지막이라서 더 기억하고 싶다는 듯이.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눈동자다. 이미 결심을 내린 듯해 보였다. 아,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답답하지. 저도 모르게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지 마, 예쁜 입에 상처 나잖아."
은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아, 하지 마. 그러지 마. 가람이 고개를 숙였다.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그 때의 나에게 돌아가서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만들었는지, 왜 주은찬과 널 아주 비슷하게, 아니 완전히 똑같이 만들어놔서 지금 이토록 힘들게 하는 건지. 너는 왜 정말로, 인간 같아? 내가 만들었지만 넌 왜 정말로 인간인 주은찬 같아, 왜, 어째서. 왜. 가람이 물었다.
"네 앞에서니까."
은찬이 부드럽게 웃었다. 네 앞에서니까, 네 앞이라서 그런 거야. 은찬이 잡은 왼손에서 힘을 풀었다. 네가 날 인간으로 대해주었으니까, 나도 네 앞에서만큼은 인간이었던 거야.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괜찮아. 은찬이 팔을 들어 가람의 눈을 부드럽게 감겼다. 스윽, 마지막인 만큼 경건하게, 진심을 담아서. 은찬이 가람의 감긴 눈커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살포시 내려앉는 마지막 키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입맞춤.
짭잘한 맛이 느껴진다. 넌 왜 또 울어, 생명이 없는 나인데, 왜 울어줘. 울지 마. 은찬이 말했다. 앞으로 '내'앞에서 울지 마. 가람이 덜덜 떨었다. 은찬이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둬,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가람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은찬은 웃고 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야. 은찬이 왼팔을 흔들었다. 가서, 나에게 이 팔을 붙여줘. 내가 잘 보관하고 있었으니, 이제 원래 주인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은찬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안녕, 청가람."
14.
너만이 나의 주인이고, 원하면 내 목숨을 거둘 수 있고, 나는 그런 네게 기꺼이 바칠게.
생각을 해, 너를 원망하는 생각을. 왜 나에게 온전한 주은찬의 기억을 준 거니. 왜 나에게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거야. 하지만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나'도 '나'처럼 널 사랑했었어, 청가람.
'주은찬'이 작동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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