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없이 가도 돼?"
내심 마음에 걸려 가람이 뒤를 흘끔거리다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은찬에게 말했다. 괜찮아, 은찬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람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오전에 나갔으니 오후는 자유시간인걸! 가람이 미심쩍은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너혼자 그렇게 정한거잖아, 라고 받아치려다가 그냥 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며 은찬의 뒤를 따라 산길을 올라갔다. 자박자박, 발걸음소리가 조용한 산길에 종종 들렸다. 가람이 숨을 들이쉬었다. 우거진 나무의 냄새와 신선한 공기가 폐로 들어온다. 올라오니까 좋긴 하네. 가람은 신선을 데리고 마을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고생하고 있을 백건과 현우 두 사람을 떠올리고, 오전에 있었던 자신들의 똑같은 상황을 상기하고서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잠시쯤의 산책은 아침에 그 망할 신선에게 시달린 보상이라고 해도 되겠지. 가람은 아까전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둘이서만 놀러가자는 주은찬의 말에 응? 이라고 되물었다. 막 백건과 현우에게 신선을 떠넘기고 자유로워진 가람은 속삭이는 은찬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얘가 뭐래는 거야. 가람이 입을 열어 쏘아붙였다. 나 할일 많아. 빨래도 해야 하고, 장도 보러 가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줄줄이 집안일 목록을 읊어대는 것을 보고 은찬이 가람의 입을 막았다. 읍, 이거 안 치워? 가람의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은찬이 한숨을 내쉬곤 가람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거 하루쯤 안해도 괜찮아, 그런것들보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걸? 은찬이 살살 가람을 꼬여내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가자, 단둘이. 검은색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까는 신선 할아버지가 있어서 데이트도 아니었잖아, 응?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꼬여내는 주은찬의 말에 청가람은 그렇게 홀려넘어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은데, 다 때려치우고 주은찬의 뒤를 쫓아나섰다.
가람이 은찬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산을 거의 다 올라온 것 같았다. 오르막길이 나오지 않고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나무들이 빽빽히 서 있는 곳을 지나가면서 은찬이 가람에게 말을 건넸다. 너 중앙에 와서 한 번도 여기 올라온 적 없지? 그러는 사이에 저 앞에서 탁 트인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악, 덤불을 스쳐지나간 은찬이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어때?"
은찬이 짠 하는 소리를 내며 가람을 앞으로 끌었다. 가람이 서서 눈을 깜박였다. 쏴아아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두 사람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탁 트인 정상 밑으로 아기자기한 마을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였다. 저 쪽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중앙도 조그맣지만 보이고 있었다. 좋긴 하네... 주은찬의 설득에 사실 한 번 져주는 척 하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따라올라왔건만, 풍경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가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가람의 표정을 눈치챈 은찬의 얼굴도 밝아졌다. 보여주겠다고 끌고오긴 했지만 가람의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하고 조금 고민했는데 저 표정을 보니까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흐응, 가람이 콧소리를 흘렸다.
"너도 가끔은 마음에 드는 짓 하네."
"하하.."
인색한 가람의 칭찬에도 은찬은 좋아했다. 가람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은찬은 조금 옆에 떨어져서 가람의 옆모습을 흘깃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청가람의 모습도 신기하고 또 예뻤다. 저런 청가람과 사귀고 있다니. 다시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행복이었다. 나,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은찬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작 후계자로 태어난 게 잘한 것 같아. 암암, 그렇고말고. 은찬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람을 따라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 갑자기 쿠구궁 거리는 진동음이 울려펴졌다. 덩달아 땅도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윽, 뭐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가람이 비틀거렸다. 그것은 주은찬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지진? 산사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땅 뿐만이 아니었다. 공간이 이상하게 조각조각으로 깨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깨어지는 유리창처럼, 챙강. 이게 뭐지. 가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지금 이 곳을 둘러보았다. 청가람! 당황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주은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은찬이 서있는 쪽의 땅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주은찬!! 가람이 다급하게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
은찬이 손을 뻗었다. 가람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바로 은찬이 발을 딛고 서 있던 땅이 푹 하고 꺼졌다. 주은찬의 손가락이 제 손끝을 스쳐지나간다. 어? 가람이 멍청하게 말을 흘렸다. 깊게 꺼지는 검은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면서, 동그랗게 두 눈을 뜬 채 작아져가는 저를 올려다보는 주은찬의 얼굴.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은찬의 목소리가 사그러간다. 그리고 곧이어 가람이 서 있는 땅 또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닿을 곳이 아무데도 없어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콰르르릉, 가람이 손으로 얼굴로 들이치려는 작은 돌들과 흙더미들을 막았다. 한없이 떨어진다. 멈추지 않고 더 빨리, 빠르게. 중압감과 속도가 붙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기는 눈을 버티려고 애쓰는 것 뿐이었다. 세상이 하얗게, 더 하얗게 변하는 듯 싶더니, 마침내 깜깜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꿈을 꾸며
잃어버린 시간
Lost time, Turn back
네가 오기만을 기다려.
1.
오른쪽 날갯죽지 부근이 불에 타고있는 듯 한없이 뜨겁다. 으윽, 가람이 이를 아득 깨물며 뒤틀었다. 아악, 윽. 너무 아파 눈도 제대로 뜰수가 없었다. 가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티셔츠를 헤치고 뜨거운 부근에 가져다댔다. 손에 불이 옮겨붙는 듯한 착각에 가람이 재빨리 손을 떼어 그보다는 차가운 땅으로 쳐박았다. 상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몸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체 뭐지, 가람이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고통을 견뎌냈다. 지지는 고통에 몸을 뒤틀자 볼을 긁는 조그만 나뭇가지의 느낌이 났다. 그리고 땅 냄새, 진득한 풀잎들의 냄새도. 한동안 불타오르던 날갯죽지 부위의 열이 사라지자 가람이 그제서야 눈을 파르르 떴다. 얼얼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나도 이상했다. 자신은 숲 한가운데에 뒹굴며 누워 있었다.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발목 부근까지 오는 풀잎들.
"아..."
머리가 깨질정도로 웅웅 울려와 가람이 양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아픈 와중에도 정신을 되살려 아까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무너져내리던 땅, 이상하게 부서져가던 공간들, 제 손을 놓친 채 어둠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던 주은찬, 그리고 곧이어 떨어지던 자신. 두통이 가시자, 가람이 손을 내렸다. 주은찬도 같이 떨어져내렸으니, 이 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가람이 눈을 도로 떴다. 좀 전과는 달리 조금 차분해진 눈빛이었다. 가람이 무릎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솨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들이 스산하게 울려퍼졌다.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여기가 어딘지 잘 몰랐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냥 평화로운 숲처럼 보이지만 아닌 것 같았다. 조금씩 들리는 이상한 소리들에 가람이 귀를 세웠다.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자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사이에, 쐐액 하고 빠르게 날아오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이다...! 가람이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화살이 가람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두두두두,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땅이 조금씩 울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또 지진인가 긴장했지만 지진이라면 이렇게 일정한 속도로 들려올 리가 없다. 뭐지? 다시 쐐애액 거리며 화살이 날아왔다. 위험하다, 공격하는 건 누구지?! 감이 통 잡히지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다면 위험한건 확실했다.
가람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고 여의주를 꺼내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던 화살들이 긴 칼로 변한 여의주에 맥없이 잘려 땅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파악하려고 하는 사이 땅을 울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이어 사방 곳곳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뭐야?! 가람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뒤에는 활시위를 겨누는 손들이 있어 피할 수가 없었다. 윽. 쏟아지는 화살비를 간신히 피한 가람이 여의주로 몸을 가릴 수 있을만큼 짙은 안개를 황급히 만들어냈다. 안개다! 당황한 목소리들이 우왕좌왕 울려퍼졌다. 검은 말 위에 타고있던 사내가 흩어지는 안개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가람이 안개속을 휘저으며 말에 올라타있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땅으로 메다꽂았다. 휙휙, 작고 날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말에 올라타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혹여나 같은 편을 맞출까 섣불리 공격하지도 못한 채, 다들 청가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람이 남자의 얼굴을 꾹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파지직, 여의주가 긴 창으로 변하며 가람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의 칼날을 반동강냈다. 가람이 몸을 잽싸게 돌려 남자를 걷어찼다. 말이 놀라 떨어진 남자를 뒷굽으로 짓밟았다. 으악! 우두둑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 놈을 생포해라."
죽여서는 안 된다. 날 뭐? 죽여? 가람이 허 하고 정신없는 눈을 돌려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려고 했다. 가람이 달려드는 병사를 체중을 실어 땅에 내팽겨쳤다. 위압감이 있는 목소리가 들린 후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좀 진정이 된 듯 침착하게 가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와 달리 가람은 점점 침착함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처음 느꼈던 것은 불타오르는 어깨의 느낌이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서, 주은찬을 찾아야 되는데 찾지도 못하고, 찾아나서려고 일어나니 화살이 날아오고 자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무장한 사람들이 절 잡으려 들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가람의 이마 옆으로 땀이 흘렀다. 잠시 방심을 한 사이에 주술에 걸렸다. 악! 가람이 몸을 뒤틀며 무릎을 끓었다. 숨이 턱하고 막혀와 공격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누군가가 절 걷어찼다. 윽. 가람이 입술을 짓씹었다. 곧이어 양 팔이 결박당하고 억지로 고개가 숙여졌다.
검은 말이 다그닥거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가람의 앞으로 길게 그늘이 졌다. 흠, 용족은 더이상 없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보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이 목소리는....? 가람이 멍하니 생각했다. 가람이 슬쩍 고개를 들어 저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 했다. 아직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람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남자가 말에서 내려 가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모습이 점차 드러나며, 남자가 가람의 앞에 멈춰섰다. 가람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눈을 찌푸렸다. 현우? 가람이 문득 이름을 내뱉자 곧바로 자신을 걷어차는 발에 힘없이 얼굴이 땅으로 콱 쳐박아졌다. 감히 저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퉷, 가람이 입 안에 들어온 흙을 뱉으며 현우를 올려다보려 애썼다. 저하? 뭔 개소리야, 저게 현우지 누구야. 하지만 남자는 가람을 모르는 듯 했다. 흐응, 검은머리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를 아는가봅니다?"
"뭐야 그 말투는.. 어디서 재미없는 농담질이야?"
현우가 가람의 앞에 무릎을 끓어 손끝으로 가람의 턱을 들어올렸다. 제 얼굴을 샅샅이 흝는 검은 눈이 날카롭다. 가람이 얼굴을 뒤로 빼려고 애썼지만 손아귀 힘이 세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농담질?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족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서 말이죠. 이미 다 지상세계를 떠난 줄 알았는데,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아있었군. 현우의 눈꼬리가 길게 휘어진다. 이런 희귀한 걸 놓칠 수는 없지....
오싹, 갑자기 드는 오한에 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잘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현우,와 똑같이 생겼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현우가 아닌 사람이 명했다. 이 자를 궁으로 데리고 가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 날 뭐로 취급하려는.....! 소리치려던 가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지러운 향이 코끝을 통해 들어온다. 아, 안 돼. 가람이 다시 흐려져가는 의식속으로 생각했다. 날 어디로 끌고가려는거야, 안 돼. 난 주은찬을 찾아야 한단 말이야. 그러나 몸은 가람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었다. 가람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가더니, 결국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2.
"....!"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며 저 쪽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슴을 맞추려던 은찬이 움찔 하며 활을 거두었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신지? 은찬의 옆으로 다그닥거리며 다가온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찬이 잠시 텀을 두고 아니다, 됐다 하고 말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어 명했다. 오늘 사냥은 이것으로 끝이다. 은찬이 말머리를 돌렸다. 말의 탐스러운 갈색 갈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와 맞추어 은찬의 긴 붉은색 머리도 흔들거렸다.
은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좀 전, 왼쪽 어깨죽지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후로, 두 번째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제 몸에 표식이 생기느라 그런 것이었다지만, 지금은. 기대감에 은찬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건, 어쩌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백건이 은찬의 옆으로 말을 가까이 몰며 슬쩍 물어왔다. ...혹시, 그 표식입니까? 공적인 자리라 백건은 자신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은찬이 백건에게 시선을 주곤 희미하게 웃었다. 긍정의 표시였다. 백건의 눈썹이 올라갔다. 은찬이 발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히히힝, 말이 크게 울며 빠르게 앞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궁으로 가자. 은찬이 눈을 깜박였다.
청가람이 드디어 왔다. 4년만에 처음으로 청가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서로 떨어진 시간이 어긋나 평생 만나지 못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 채 외롭게 타지에서 홀로 죽음을 맞아야 되나 싶었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쿵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은찬은 처음으로 이 낯선 세계에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청가람을 데리고 중앙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을 때 생겼던 기이한 현상, 갑자기 무너져내리던 땅의 감각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놓쳐버리고 충격받은 표정을 짓던 청가람의 얼굴도, 멀어져가는 가람을 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도. 한없이 추락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꽤 긴 시간동안 의식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은찬은 몸이 타버릴듯한 열기 때문에 눈을 떴다. 왼쪽 날갯죽지 부근이 미친듯이 뜨거웠다. 이 고통을 식혀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은찬이 이를 아득 악물며 버텼다. 물, 물. 이걸 식혀줄 물....!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행히 마침 은찬의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은찬은 강에 뛰어들었다. 풍덩 하고 닿아오는 차가운 강물 덕분에 불타오르는 감각은 더뎌지고 있었다. 몇분쯤 강 속에 있었을까,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찬이 제대로 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주변은 캄캄했다. 고요한 한밤중이었고 새하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 보았던 하늘은 밝았었는데, 달이 떠있다니.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나....? 은찬이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깊게 추락했는데도 아무런 곳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난 게 너무 신기했다. 은찬이 강물에서 찰박거리며 걸어나왔다. 열기가 가시자 차가운 밤공기에 이제는 조금 춥게 느껴졌다. 고통도 가시자 청가람이 생각난다. 같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살아있으니, 저보다 훨씬 강한 청가람은 분명히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은찬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청가람, 가람아. 하지만 주변은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은찬이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은 끝없이 길게 뻗어 있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서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가 은찬이 재채기를 했다. 에취! 은찬이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추워서 콧물까지 나온다. 어떻게 하지. 옷을 벗어야 되나,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은찬은 일단 무겁기만 한 웃옷을 벗었다. 털썩, 물을 먹어 무거워진 옷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벗으니 낫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한다? 삼매진화로 옷을 말릴 수 있을까...... 은찬이 축축한 옷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러다가 말리기는 커녕 태워먹을 것 같은데. 하지만 옷을 입어야지 청가람을 찾아나서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기분에,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숲 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누구? 알 수 없는 그림자에 은찬이 긴장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고 달빛 아래에 나온 사람을 본 순간 은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건?'
은찬의 목소리에 백건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 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당한 줄 알았잖아. 무슨 소리지, 그리고 백건인 듯 백건이 아닌 듯 이상하다. 입고 있는 옷이 한복처럼 나풀거리기는 하는데, 한복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은찬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걸 둘러. 백건이 길게 나풀거리는 겉옷을 벗어 은찬에게 둘러주었다. 얘가 징그럽게 뭐하는 거야, 하고 생각했으나 솔직히 추운 건 추웠기에 은찬이 코를 훌쩍이며 옷깃을 여몄다. 그러면서도 백건을 관찰했다. 어디 예전 책속에서만 볼 수 있을 그런 복식이었다. 네가 현우도 아니고 이런걸 왜 입어, 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백건이 표정을 무섭게 굳히며 말을 이었다.
'왕위가 바뀔 때가 되니까 발악을 하네. 그래도 정리는 끝났어.'
물론 은휘가 지시한 건 아니겠지만. 옆에서 한 자리 얻으려고 눈독들이는 자들이 한 거겠지. ....은휘? 왕위? 뭔가 이상했다. 은찬이 입을 열어 이해할 수 없는 말보다는, 일단 가람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다. 혼자 찾는 것보다는 둘이 찾는 게 낫겠지. 백건, 나랑 청가람이..... 질문하려던 은찬이 입을 닫았다.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백건이 지금 바로 앞에서 주술을 썼기 때문이다. 백건의 손 안에서 생겨난 하얀 연기가 백건이 손짓하는 대로 덤불 안으로 사라졌다. 어? 뭐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치고는 싱겁긴 했지만, 왕위를 계승하면 깨끗이 정리하는 게 나을 거야. 백건의 말이 끝나자, 저 쪽에서 흰 말이 다그닥거리며 달려왔다. 제 앞으로 서는 말을 바라보던 백건은 들려오는 은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백건, 너 주술....쓸 줄 알았어?'
은찬의 물음에 백건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소리 하는건지 모르겠네. 백건이 말 위에 가볍게 올라탔다. 그리고 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타. 저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저하? 은찬이 멍하니 백건을 올려다보았다. 백건이 조금 짜증에 찬 목소리로 반복했다. 가다 안 엎어져, 두 명은 태우고 갈 수 있다고요. 시간 많이 지체됐다니까, 얼른 타. 은찬이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힘겹게 올라탔다. 백건은 그런 은찬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발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힝, 힘차게 울며 흰 말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이라는 걸 처음 타봐서, 자세가 몹시 불편했다. 엉덩이도 아팠다. 그리고 안전장비도 전혀 없어 혹여나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느라, 청가람을 생각하느라 은찬은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왜 말을 타고 있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얼만큼 내려갔을까, 백건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다그닥거리며 멈추었다. 아, 삭신이 쑤신다. 별로 타지 않은 것 같은데 몇 년은 시달린 듯 아프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저하를 모셔왔다. 백건의 말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 발밑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린다. 죽여주십시오, 저하. 다행입니다. 은찬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여긴 대체 뭐지?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절 보고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자신은 저들을 모른다. 백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찬을 보고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주언국. 은찬이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있는 세상은 사방신들과 후계자가 있는 세상이 아니다. 주언국의 현왕이 내일모레하는 상태고, '은찬'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랬다.
주언국의 다음 대 후계자인 18살의 '주은찬'과 또다른 왕자인 11살의 '주은휘'. 주언국에 있는 왕자는 이 둘뿐이었다. 물론 은찬이 정통 후계자였고 법대로 왕이 되어야 했지만 은찬은 주술에 그다지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에 다른 왕자인 은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2왕자편의 사람들은 은휘를 다음 대 왕으로 밀려고 했다. 변수가 있다면 은찬과 은휘의 사이가 좋다는 게 문제였겠지만. 배다른 형제지만 은휘는 은찬을 끔찍히 따랐다. 은찬도 그런 은휘를 귀여워했고 말이다. 하지만 사이좋은 형제관계와 권력다툼은 다른 문제였다. 2왕자의 주변은 후계자인 은찬을 호시탐탐 노렸고, 은찬의 편은 그런 2왕자의 세력들을 견제해야만 했다. 즐비해있는 암살 시도들. 그것은 현왕이 죽을 시기가 다가오자 더 극심해졌다. 끝내 암살자들을 보내 2왕자 몰래 은찬을 죽이려는 일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백건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은찬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은찬이 경악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 노신이 놀라는 은찬의 모습에 물어왔다. 은찬이 입을 열어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백건이 가로막았다. 저하께서 힘든 일을 겪어서 그런 거야. 좀 쉬시게 해줘. 백건의 말에 노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갔다. 은찬이 그런 백건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은찬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옷이 거추장스럽다. 은찬이 자신이 입은 왕자의 복식을 내려다보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백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은찬이 백건을 바라보았다. 백건이지만 백건이 아닌 사람. 누구지.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백건이 물었다.
'저하, '주은찬'이 아니지?'
대답해줘. 백건의 노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은찬이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간 정신적으로 시달려 몹시 힘들었다. 은찬이 긍정했다. 맞아, 난 네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거야, 아마. 설명해줘. 백건이 주먹을 꾹 쥐었다. 은찬이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백건은 은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 들은 후, 입을 닫았다. ....그래서, 넌 주은찬이지만 주은찬이 아니란 거지? 백건이 은찬의 멱살을 잡았다. 갑자기 변한 백건의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주은찬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백건이 하 한숨을 쉬며 은찬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네가 잘못한 건 없지. 하지만 그래도 온 이상은, 백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왕위 계승자'의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은찬이 눈을 내리깔았다. 하기 싫다면? 나는 왕 따위 되고싶지 않아. 그저 가람이를 찾아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은찬의 말에 백건이 입을 열었다. 아니,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야, 성공적으로 연기를 해서 왕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것. 순순히 연기를 펼쳐주면, 도와줄게. '청가람'을 찾는 것을.
은찬은 화려한 옷을 입고 제단 앞에 섰다. 불꽃이 일렁이며 세차게 타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불꽃을 일으키며 왕궁의 하늘 전체가 붉은 불길로 뒤덮였다. 화르르르, 불타는 새가 우아하고 엄숙하게 넓은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지금껏 이렇게 큰 주작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노란 불길의 눈을 반짝이던 주작이 은찬의 몸에 내려앉았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새 왕조의 시작이었다. 주변에서는 다 주은찬이 왕이 되기 전까지 진정한 주술 실력을 숨겼던 거라고 수근거렸다. 자신의 능력을 일부러 숨기고 못하는 척 가면을 쓴 무서운 사람이라고. 은찬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 했다. 웃긴다. 그 쪽에서 얻기 위해 발버둥치던 주술을 이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다니. 알 수 없는 세계에 떨어진 자신을 가엾게 여겨 힘을 쥐어준 거라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은찬이 눈을 들었다. 청가람은 어디에 있을까. 왕이 되면 청가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연기를 시작한 거다.
하지만 생각만큼 일은 은찬의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할 게 많아, 은찬이 화를 냈다. 사실 들여다봐도 어려운 용어들에 잘 이해되지 않았을 뿐더러,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이런 것들이 아닌데. 백건, 은찬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네 말을 들어줬으니 너도 내 말을 들어줘야 해. 이건 명령이야. 백건이 입을 열었다.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사실, 이방인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야. 그 말에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공개되지 않은 왕가의 역사서에 남겨진 이방인들에 대한 게 적혀있거든. 너처럼 날개 표시를 지닌 자들이 말이야. 어쩌면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네 '청가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있을지 몰라. 은찬은 서고를 뒤졌다.
은찬의 등에 새겨진 이방인 표식을 본 현자가 말을 이었다. 이건, 온전하지 않은 표식입니다. 무슨 소리지? 은찬이 눈썹을 찌푸렸다. 현자가 손을 모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곳으로 넘어온 이방인들은 다 전하처럼 표식을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죠. 저는 이방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 표식은 원래 계셨던 세상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찬이 재빨리 물었다. 그럼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현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온전한'표식의 경우일 때이죠. 전하께서 지금 가지고 계신 표식은 반쪽짜리입니다. 반쪽짜리?
'다른 분과 같이 떨어지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그 분이 나머지 반쪽을 지니고 계실 겁니다. 은찬이 현자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청가람을 찾아야 된다는 게 중요하잖아, 지금. 현자가 은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하, 지금 찾으시는 분은 이 쪽에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은찬이 되물었다. 현자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표식이 숨을 쉬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전하.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진지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분명히 그분이 도착하는 곳은 이 세계가 확실하지만, 시간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시공간이 뒤틀려 있으니 전하와 다른 시간대에 도착할 겁니다. 그것은 내일일 수도 있고, 몇 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영원히 만나실 수 없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몇백년 후에 이 곳에 도착한다면 말이죠. 끔찍한 말에 은찬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현자가 마지막으로 말을 전했다. 만일 그 분이 이 쪽으로 오신다면, 전하께서는 그분의 기척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때였다. 은찬은 가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숨을 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더없이 싱그럽고 청명하게 느껴졌다. 은찬은 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청가람은 자신과 같은 세상에, 같은 시기로 왔다. 비록 4년동안은 혼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며 기다려야 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너는 어디에 있을까.
3.
가람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 가람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몸이 무거웠다. 어지러운 향을 맡고 잠이 든 것 같았다. 가람이 힘을 실어 상반신을 일으키고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검은색 벽돌로 도배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냉기도 느껴졌다. 있는 곳을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아마 지하실일까.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기분에 가람이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갈아입혀져 있었다. 겉에는 부드러운 하늘색 옷, 안에 입고 있는 것은 하얀색이다. 누가 갈아입혔지, 타인이 제 몸을 만졌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안 그래도 최악인 기분이 더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람은 두 번째로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장면을 되살렸다. 현우, 나풀거리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가람이 이마를 짚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습니까? 현우가 미소지었다. 가람이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서 있는 현우를 보고 깨달았다. 이 인간은, 현우지만 현우가 아니다. 가람이 씹어뱉었다. 어디야 여기. 현우가 가람의 말을 무시했다.
"그쪽, 이방인이더군요?"
"..이방인?"
현우가 웃었다. 등에 나있는 표식으로 알았죠. 반쪽짜리긴 하지만. 그럼 그렇지, 용족은 이미 지상세계를 떠난 지 200년도 넘었는데 있을리가 없죠. 하지만 이방인이라면 가능하죠. 현우가 가람의 앞에 한쪽 무릎을 끓고 앉았다. 사락, 자줏빛 옷자락이 바닥에 살짝 끌렸다. 당신의 대답에 친절하게 알려주도록 하죠, 아무것도 모르면 소용없으니까. 현우가 가람의 눈을 마주보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원래 있던 세계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쪽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온 겁니다. 이곳은 현주국이라고 합니다. 저는 현주국의 2왕자, 현우고요. 어찌된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듯 하지만. 현우가 눈을 가늘게 떠서 가람을 바라보았다. 꿀꺽, 얼음장보다 차가운 눈빛에 가람이 침을 삼켰다. 현우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내 소유인 2왕자궁에 와 있는 겁니다. ...왜? 가람이 물었다. 현우가 웃었다. 왜냐고요? 현우가 손으로 가람의 턱을 잡아올렸다.
"쓸모가 있으니까요. 용족이잖아, 너."
그 무술실력, 그 능력. 나에게 무척이나 필요하거든. 가람이 현우의 손을 쳐냈다. 팍, 뿌리쳐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현우가 다시 가람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렇게 행동한다면 많이 후회할 텐데.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가람을 걷어찼다. 윽, 가람이 신음을 삼켰다. 콱, 현우가 가람의 등을 세게 짓밟았다.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발 치워, 미친놈아. 현우가 가람의 등을 밟은 발에 힘을 더 주었다. 기분이 더럽다. 가람이 여의주를 꺼내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챈 현우가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여의주 꺼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걸. 현우의 말에 가람의 눈이 커졌다. 진짜다. 여의주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는 앞으로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야. 현우가 가람의 옷을 끌어내렸다. 가람이 발버둥치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현우는 가람의 오른쪽 날갯죽지에 정교하게 나타난 표식을 바라보았다. 현우가 손으로 새겨져있는 반쪽 날개문양을 매만졌다. 뱀이 기어가는 느낌에 가람이 몸서리쳤다.
"그래, 이왕이면....여기가 낫겠지."
현우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헉, 현우의 손에서 벗어나려던 가람이 숨을 멈췄다. 아,아,아악.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범람했다. 검은 기운이 가람의 어깨에 스며들어갔다. 반쪽뿐이지만 당당하고 아름답게 펼쳐져있던 날개가 검은 사슬에 칭칭 묶여지고 있었다. 가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숨통이 조여지고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주은,찬. 눈앞에 은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 죽을 것 같아, 살려, 줘. 가람의 턱이 덜덜 떨렸다. 현우가 마침내 손을 떼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가람을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현우의 시선이 이제 불쌍하게 꺾여버린 가람의 표식으로 향했다.
가람은 눈을 들어 자신의 '주인'이 된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람의 목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매여졌다. 이제 당신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야. 나는 왕이 되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앉은 채 현우가 미소지었다. 날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게 앞으로 당신의 일이 될 거야. 가람이 입을 열었다. 싫어, 난 돌아갈 거야.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현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이방인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쪽이 불완전체라 더더욱 그렇지. 불완전체? 가람이 미간을 구겼다. 가람이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현우가 미소지었다. 그리고 차갑게 뱉었다.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게 좋겠군요. 현우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현주국의 2왕자라는 현우,는 가람의 목을 틀어잡았다. 지금껏 알던 현우와는 다른 사람이라, 주술에도 능했다. 가람은 그런 현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발목에 무겁고 긴 사슬들이 얽혀 청가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눈 앞에서 피가 튄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가람은 눈을 깜박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큰 고깃덩이가 되어간다. 충격으로 눈이 감겨지지도 않았다. 중앙에서 수련하면서 가람은 인간들은 다 저보다 하등하다고 생각했다. 개미처럼 별볼일 없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땅에 기어가는 개미를 볼 때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개미들은 인간이 밟으면 죽는다. 인간들은 그런 개미의 죽음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 자신은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살인을 알기에 가람은 어렸다. 사람을 죽이기에, 가람은 어렸다. 무엇보다 피가 튀기는 상황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나 대신 이것들을 처리해주면 되는 거에요, 알겠습니까? 현우가 피가 뚝뚝 털어지는 손으로 가람의 볼을 만졌다. 내가 죽이라면 죽이고, 끌고 오라면 내 앞으로 끌고 와요. 날 반대하는 것들을 깨끗하게 깔아뭉개고, 뽑아버려.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현우가 선언했다.
가람이 손을 벌벌 떨었다. 얼굴에 묻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청가람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앞에 고꾸라져 죽어있는 자의 피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충격으로 눈동자가 멍해졌다.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었다. 현우가 협박해도 저 사람을 절대로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제 손을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저 자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은 물론, 내가 도와줘야겠지.'
주술에 묶인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손이 긴 창을 단단히 잡고, 춤추듯이 휘두르며 가볍게 사람의 목을 베었다. 현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알겠죠? 가람이 무릎을 끓었다. 챙강, 붉게 물든 창이 땅으로 떨어졌다.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주은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게 도와줘, 주은찬.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살려줘, 은찬아.
몸에 새겨진 이방인의 표식이 아려왔다.
4.
은찬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어졌다. 시녀가 황급히 들어와 깨어진 유리병을 치웠다. 백건이 입을 열었다. 전하. 은찬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홰홰 저었다. 아득, 은찬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붉은 머리가 제멋대로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다. 은찬이 명령했다. 치울 필요 없다, 나가라. 시녀가 주저했다. 나가! 은찬이 씹어뱉었다. 시녀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급히 방을 나갔다. 덜컥, 방문이 닫혔다. 은찬이 고개를 홱 돌려 백건을 바라보았다. 왜 안 나가? 백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글쎄, 넌 내 '주군'이 아니니까? 백건의 정확한 말에 은찬이 매섭게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안에 있는 것을 다 때려부수며 돌아다니던 은찬이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빠르게 중얼댔다.
"안 보여, 안 느껴진다고."
"...."
"청가람이 느껴진 이후로 1년이 지났어. 하지만 찾을 수가 없어. 왜지?"
은찬이 중얼거렸다. 청가람을 찾고 싶어도 뭔가에 가려진 듯 막혀져서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비밀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중에 하나인, 백건이 이끄는 소수정예군으로 정기적으로 청가람을 찾는 데에 내보내고 있었지만 원하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백건이 은찬을 불렀다. 다급해하지 마. 하, 은찬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같잖은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마."
난 지금 충분히 미쳐서 그깟 걸로는 와닿지도 않으니까.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속에서 폭발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은찬이 백건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가서 소리질렀다. 알아?! 난 니네들이 원하는 대로 왕위에 올라서,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원래부터 여기 있던 것처럼 애써 왕을 연기해왔어. 속으로는 너무나도 힘들고 계속 청가람이 생각나 미치겠는데도, 이렇게 있다고!!
"난 여기 있기 싫어."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은찬이 차갑게 말했다. 분노하는 은찬의 모습에 백건이 입을 다물었다. 청가람이 없잖아. 왜 내가 이 짓을 해야하는 건데? 내 나라니까? 아니, '네' 나라겠지. 안 그래? 백건. 은찬이 백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왕을 연기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은찬이 숨을 고르고는 제 목적을 다시 말했다. 청가람을 찾기 위해서지. 그게 계약 조건이었잖아? 그렇지? 은찬이 빈정거렸다.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이었잖아, 네가 내건 조건. 은찬이 말을 이었다. 가람이 내게 돌아오면, 계약은 끝나. 그리고 난 반드시 가람이를 찾을 거야. 5년간 악몽에서만 살아가는 것도 지쳤어. 은찬이 백건에게서 몸을 돌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주은찬의 모습을 버리고, 주언국의 왕으로 돌아온 은찬이 명령을 내렸다.
"다음에 가야할 곳은 현주국과의 경계선이다."
이제 남은 곳은 그곳밖에 없어. 은찬이 고개를 살짝 젖혀 백건을 보았다. 알아들었나? 백건이 고개를 숙였다.
5.
가람이 창을 휘둘렀다. 남자가 비명도 내뱉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가람은 몸을 돌려 자신이 만들어놓은 흔적을 바라보았다. 숲 속에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는 시체들, 공기를 가득 채우는 비릿한 피 냄새. 가람이 얼굴에 묻은 피를 훔쳐냈다. 바람이 불자 펄럭 하고 긴 망토가 나부꼈다. 가람은 현우에게서 지시받은 목적이었던, 땅에 떨어져있는 돌돌 말린 문서를 집어 품에 넣었다. 몇십번째인지도 모를, 피비린내나는 살육시간이 끝났다. 이제는 이걸 들고 피비린내보다 더 끔찍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최악의 상태로 최악의 세계에 떨어진 후로 2년이 지났다. 가람은 현주국의 2왕자, 아니 지금은 왕위에 오른 현우의 개가 되어 있었다. 1년 전, 현우가 1왕자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데에는 가람의 공이 컸다. 너무나 우습게도 말이다.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가장 많이 도와준 게 자신이라니. 가람이 실소를 흘렸다.
처음에는 현우의 명에 불복종했다. 사람을 죽일 순 없어, 못하겠다고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로 죽는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은 이후로는 반항하는 것을 멈추었다. 가람에게 걸려있는 주술은 가람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다. 가람이 칼로 목을 그으려다가 은찬을 떠올리고 손을 내렸다. 가람은 매일 주은찬을 생각했다. 같이 떨어졌으니, 주은찬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인형처럼 버텨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은찬을 만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어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피에 물든 손을 내려다보면서 오열하고, 자신을 끝없이 저주하면서 주은찬을 기다리고. 가끔씩 주어지는 '자유시간'에는 미친듯이 주은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우가 감시하는 범위 내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가람은 죽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래도 언젠가는. 아마. 그러나 희망도 이제는 거의 꺼질 듯 힘없이 흔들거렸다.
탁, 가볍게 땅으로 내려앉는 소리에 현우가 뒤를 돌았다. 피투성이가 된 가람이 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문서는? 가람이 말없이 현우에게 문서를 던졌다. 저 인간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현우가 문서를 받아들고 한 번 주르륵 흝었다. 맞네요. 잘했습니다. 현우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라는 손짓에 가람이 말없이 방을 나갔다.
"......."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본다. 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피냄새에 익숙해진 자신이 무섭다. 만일, 아주 만일이지만 은찬을 만나게 된다면, 피에 젖어든 자신을 밀어낼까봐. 그게 두려웠다. 가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람이 현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었다. 지도를 놓고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말소리와 일정하게 섞여 들려왔다. 주언국이 신경쓰여. 현왕이 왕위에 오른지 6년, 주변국의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고. 현우가 잠시간의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역대 최강이라는데 이상하게 평화유지를 한다 싶더니 1년 전부터는 그것도 아니죠.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상당히 거슬립니다. 내가 다스리는 곳을 조금씩 노리고 있어. 현 왕이 무척이나 거슬린다 이 말입니다. 가람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본론을 말해. 현우가 웃었다.
"그를 죽여."
한 나라의 왕을 죽이고 오라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명령에 가람이 빈정거렸다. 그냥 나보고 죽으라고 하지 그래? 개죽음 당하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말할 필요는 없는데. 가람의 날카로운 반응에 현우가 눈을 깜박였다. 글쎄, 그 실력으로 가능하기에 말한 건데. 아직은 꽤 쓸모가 있어서 말이지. 칭찬하는 듯, 깔아뭉개는 현우의 말에 가람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이번 것은 솔깃한 제안일거야. 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가람이 표정을 바꾸었다. 그 자의 목을 들고 오면, 내가 당신을 묶어놓고 있는 주술을 풀어주죠. 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5.
한달간의 기간을 주죠. 임무를 완수하면, 자유지만.
가람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 일만 해내면, 이제 더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이야, 마지막. 가람이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나무위에 앉은 채 차분히 기다렸다. 뭐, 귀띔을 살짝 해주자면, 주언국의 왕은 일정한 시기에 소수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온다고 하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하는게 주특기니까, 믿어보도록 하죠. 만일 내 정보를 불거나, 한달 안에 소식이 들리지 않을 경우에는.... 현우의 잔인한 미소가 떠올라 가람은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지워버렸다. 붉은 머리를 한 사람이 주언국의 왕입니다.
저 멀리서 서서히 느껴지는 여러개의 기척들에 가람이 눈을 돌렸다. 붉은 머리, 저 머리색을 보니 주은찬이 떠올랐다. 주은찬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처럼 나쁜 자에게 묶여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을까. 자신을 잊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되고. 만일 주은찬을 만날 수 있다면 기억속의 그 모습일까, 아니면 시간이 흘렀으니 조금 달라졌을까?
가람이 화살을 두 대 꺼내들었다. 괜히 모습을 감추려 안개를 썼다가는 이쪽이 되려 당할 수 있으니, 안개는 쓰지 않고. 맨 앞에 있는 놈들을 먼저 처리해버려야지. 가람이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들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픽픽, 맥없이 두 명이 쓰러졌다. 쓰러지는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있는 곳을 바로 알아차린 주언군이 활을 쏘았다. 쐐애액,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한 가람이 땅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저를 공격하려는 자가 탄 말의 다리를 먼저 베어 형태를 무너뜨리고 밟고 올라선다. 피가 솟구치고, 저 뒤에 붉은 머리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귀찮아, 가람이 문득 생각했다. 칼의 형태를 띄었던 여의주가 긴 창으로 변했다. 가람이 기계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목이 잘리며 붉은 피가 공중으로 흝어졌다. 볼이 살짝 베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끝이야. 제 앞을 가로막으려는 흰 머리를 가진 남자의 공격을 잽싸게 뛰어올라 피하며 가람이 말 위에 탄 주언국의 왕을 노렸다. 공중에서 불이 팡팡 터지며 화끈거린다. 불붙은 망토를 순식간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가람이 자신이 죽여야 할 자에게 창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주...은찬.....?"
그게 주은찬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말이다. 기억속에 있는 주은찬의 얼굴보다 선이 조금 굵어지고, 머리가 길었고, 성인의 모습으로 변해버렸지만, 주은찬이었다. 청가람....? 은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은찬이 칼을 들어 그 자리에 굳어있는 가람을 내리치려는 백건을 저지했다. 그만! 가람의 목 바로 뒤에서 칼이 멈추었다. 일단 주은찬의 명령대로 공격은 중단된 상태였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공격하던 청가람이라 쉽사리 칼날들이 거두어지지는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 여러개의 날카로운 칼끝이 가람을 향했다. 살벌했지만 정작 가장 긴박해야 할 주은찬과 청가람 사이는 그게 아니었다.
가람의 손에서 창이 스르륵 사라졌다. 가람이 말 위에 올라타있는 주은찬을 올려다보았다. 당당한 왕의 위엄을 내뿜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립다는 분위기밖에 느껴지지 않는걸. 너야? 정말 너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혹시 모른다. 저 사람도 '현우'처럼 얼굴만 똑같고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렸던 청가람, 이라고 들린 낮은 목소리에 꺼져가는 희망을 걸었다. 가람은 그저 은찬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목을 금방이라도 칠 듯, 목 뒤에 겨누어져 있는 칼날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은찬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진홍색 의복이 펄럭거렸다. 청가람, 청가람, 청가람. 가람의 앞으로 다가온 은찬이 가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선홍색 두 눈동자. 살짝 깨무는 붉은 입술. 놓쳤던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청가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은찬이 곧, 양 팔을 들어 부서져라 가람을 세게 껴안았다.
"어디있었던 거야, 청가람....."
은찬이 애잔하게 속삭였다. 가람이 은찬의 품 안에 폭 들어왔다. 포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백건이 손을 내렸다. 그에 따라 가람에게 겨누어져있던 다른 칼들과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활시위도 내려간다. 백건이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른 자들에게 손짓했다. 백건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은찬이 가람을 미친듯이 쓰다듬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녀서, 결국 만났어. 은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청가람, 어디 있었어, 가람아. 날 두고 어디 있었어.
가람은 기억속에 남아있던 은찬의 목소리보다 낮아진 목소리를 들었다. 애절한 은찬의 목소리에 메말랐던 감정이 터져나왔다. 달라진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주은찬의 키도 좀 더 자란 것 같았다. 가람이 제 머리를 간지럽히는 은찬의 붉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긴 머리카락이다. 가람이 울컥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날 기다린 거야, 주은찬. 은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줄곧, 너만 찾았어. 가람아, 널 찾아다녔어. 청가람...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6.
은찬은 입단속을 철저히 한 채 가람을 데리고 궁으로 귀환했다. 가람이 현주국의 왕궁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은찬의 궁을 보고 살짝 놀랐다. 사람사는 느낌이 난다.
은찬이 궁으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할 일을 다 뒤로 미루는 것이었다. 사실은 어느때보다 활기차고 건강했지만 말이다. 가람이 푹신한 침대위에 누운 채, 은찬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머리감을 때 귀찮겠다.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그렇게 귀찮지는 않아. 그래? 가람이 웃었다. 그리고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지금 꿈 꾸는 것 같아. 은찬이 가람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가람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춰주었다. 이래도 꿈 같아? 은찬이 씩 웃었다. 가람이 질색했다. 너, 좀 많이 느끼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누운 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밤을 새어도 모잘랐다. 헤어지고 나서 겼었던 아픔들, 시련들, 고통들. 은찬의 말이 끝나고, 가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6년이나 있었던 거야? 나보다 4년 빨리, 온 거구나. 혼자 보낸 4년을 가늠하려는 가람을 은찬이 하지만 괜찮아, 라는 말로 압축시켰다. 너보다는 안 힘들었으니까. 은찬이 가람을 보고 서글픈 어조로 말을 했다. 네가 보낸 2년,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걸 견뎌내며 살았다니, 가람아. 은찬이 가람의 볼을 매만졌다.
은찬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가람이 몸을 일으켰다. 가람아. 은찬이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가람은 눈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하얀 손이지만 피로 붉게 얼룩진 느낌이 들었다. 뚝뚝, 손에 묻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죽어가는 끔찍한 비명소리마저 귓가에 울려퍼지는 듯했다. 가람의 심정을 알아차린 은찬이 뒤에서 안아오며 가람의 손을 잡았다. 네 손, 나에게는 예쁘고 깨끗한 손이야 가람아. 은찬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가 죽인 게 아니라, 현주국의 왕이 죽인 거야.
"너는 그저 악몽을 꿨다고 생각하면 돼."
가람이 은찬의 품에 기댔다. 응, 가람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들으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은찬이 가람의 손을 계속해서 어루만져 주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있던 가람이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제 옆으로 내려온 은찬의 붉은 머리를 살짝 잡았다.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 안에서 흩어진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가람이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둔 채 은찬은 가람의 뒷목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옷을 조금씩 풀어갔다. 가람은 은찬이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온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주은찬의 체온이. 은찬이 손을 움직이자 옷 안에 감춰져있던 가람의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입을 맞추며 내려가던 은찬이 어느 한 곳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흉측한 사슬에 칭칭 묶여버린 날개 표식을 본 탓이다.
"이거, 현주국의 왕이 건 거라 그랬지?"
은찬은 현우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손을 움직여 표식을 살살 매만졌다. 자신도 힘들었지만, 청가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애처로운 표식이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은찬이 말을 이었다. 이거, 풀어줄게. 내가 능력이 더 웃도니까 쉽게 풀을 수 있어. 안 돼. 가람이 은찬의 손을 저지했다. 왜? 은찬이 눈쌀을 찌푸렸다. 설마 계속 묶여 살고 싶단 뜻이야? 은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건 당연히 아니야, 하지만. 가람이 한숨을 쉬고 설명했다. 주박령이 풀어지면 걔도 알게 돼. 그러면 날 의심하게 되겠지. 아,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은찬이 대충 납득했다. 은찬이 가람의 목에 다시 입을 묻으며 물었다. 따뜻하다, 가람이 생각했다.
"주어진 게 한 달이라고 그랬지?"
"응."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자."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가람의 물음에 은찬이 웃었다. 설마 잊고 있는건 아니지? 우리가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가야지, 가람아. 가람이 은찬의 말에 고개를 젖혀 은찬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를 띈 검은 눈이 보인다.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은찬이 가람의 볼에 살짝 입맞추었다. 응, 돌아갈 수 있어. 네가 내 옆에 와줘서 그런거지만. 가람이 은찬을 흔들었다. 당장 돌아가자, 나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은찬이 가람을 달랬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 나도 여기서 일단 왕이라서.... 마음같아서는 무책임하게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지.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고 돌아가자. 그리고 일단 오늘은,
은찬이 가람의 몸을 돌려 침대위에 부드럽게 눕혔다. 풀썩, 부드러운 비단이 몸을 감싸왔다. 은찬이 가람의 위에 올라탔다. 남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며 저를 내려다보는 은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목이 바싹바싹 탄다. 은찬이 고개를 숙여 가람의 목을 핥았다. 읏, 가람이 움찔했다. 너.... 가람이 은찬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를 향한 욕망에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밀렸던 거 풀고."
은찬의 말에 가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 정사가 아닌 정사에만 집중하는 최악의 왕 아니야? 은찬이 가람의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아닌데? 나 이래봬도 성군이라고. 가람이 은찬의 뻔뻔한 말에 피식하는 소리를 냈다. 은찬이 말을 정정했다. 괜찮아, 사실 난 왕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은찬이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까르르, 가람이 웃음을 떠뜨렸다. 가람이 손을 움직여 은찬의 옷자락을 풀어내렸다.
내 앞에서만은 한번 폭군이 되어봐 주은찬.
7.
은찬이 자리에 앉은 채 손을 움직였다. 정말 오랜만에 일에 집중하는군. 놀랍다는 어투에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여기에 머물러있을 시간도 별로 없을테니까, 그동안만이라도 최선을 다할까 해서. 백건이 입을 다물었다. 백건의 시선이 궁을 둘러보고 있는 가람을 향했다. 은찬이 백건과의 약속을 되살렸다. 계약, 이라고 했잖아. 그래, 말리진 않아. 백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까지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래. 그런데 왕위는 어떻게 하려고? 은찬이 대답했다.
"은휘에게 물려주면 돼."
은휘? 백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은찬이 손을 멈추고 백건을 바라보았다. 응, 내 '동생'말이야. 그 아이도 이제 17살이잖아, 충분하지. 잘할 거야. 공표는 어떻게 하라고? 갑자기 말도 없이 왕이 급작스럽게 바뀌면 사람들은 당황해. 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제 할일에만 바쁘지. 어차피 주작은 왕이 생기면 다시 나타나. 그 아이는 어렸을때부터 주술에 재능이 있었다고 했으니 글쎄, 어쩌면 나보다 더 강한 왕이 될지도 모르지. 은찬의 말에 백건이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은찬은 가람과 함께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책임감으로, 최대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세계에 잠시간만 더 머물고 있다는 것도. 은찬이 백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는 내 오른팔이니까, 그것도 잘 처리할거잖아. 확신하는 은찬의 어조에 백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꽤나 위험한 연극이 시작되겠군. 아니. 은찬이 부정했다. 위험한 연극의 막을 내리는 게 되겠지.
청가람이 곁에 있고,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가람이 제 옆에 있으니 은찬은 그제서야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찬이 푸른 옷을 입고 흰 허리띠를 매단 가람을 바라보았다. 머리에는 붉은 꽃장식이 달려 있다. 은찬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진짜 예쁘다, 가람아. 가람의 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 와봐. 싫어. 가람이 은찬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군 편성은 네 손으로 해야된다며, 그거 하기전까지는 안 갈거야. 그거 백건에게 주면 돼. 백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 너무한데요.
앞으로 남은 시간은 12일. 돌아가기 전에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돌아갈 것이다. 은찬은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는 가람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가려줄 수 있게. 가람이 은찬의 손을 잡고 끌었다. 바람이 불며 두 사람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숲 속의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간다. 나무 사이를 지나가고 있던 가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주은찬, 내기하자 내기. 왕궁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응? 가람이 멋대로 정했다. 하나, 둘, 셋 하면 시작하는 거야. 하나, 둘.... 이랴! 가람이 둘,에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가람을 태운 말이 저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은찬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곧바로 가람의 뒤를 쫓아갔다. 잊을 수 있을 거야, 청가람. 마지막에는 좋은 것만 보고 가자.
조용한 한밤중에 들리는 울음소리에 은찬이 눈을 떴다. 옆에서 곤히 자고있던 가람이 몸을 움츠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청가람? 가람아. 은찬이 당황하며 가람의 어깨를 돌렸다. 왜 울어, 은찬이 당황해서 손을 움직였다. 방황하던 손이 가람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주은찬, 가람이 울먹거렸다. 나, 미안해서 어떡하지. 가람이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계속 훔쳐냈다. 나 돌아가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아. 내가 죽인 사람들, 피 흘리며 죽어가던 사람들이 생각날 것 같아. 가람이 손을 덜덜 떨며 바라보았다. 아냐, 가람아.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아내리고 꼭 안아주었다. 울지 마, 청가람. 은찬이 가람의 귀에 대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괴로워하지 마, 그러지 마.
하지만 위로해주는 은찬의 마음도 가람과 같이 찢길 듯 아파왔다. 청가람이 제 앞에서 계속 웃어주고 있어서, 아픈 기억들을 서서히 묻어두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람은 절대로 피냄새가 배인 기억들을 잊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통받았던 것이다. 우는 가람을 꼭 안아주고 있던 은찬이, 조용히 가람에게 물었다. 내가 기억 지워줄까? ....응? 가람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이 눈가에 달라붙은 가람의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말했다.
"내가, 주술로 지워줄 수 있어. 지워줄게."
힘들잖아, 기억하는 게 너무 힘들잖아. 내가 그 아픈 기억, 지워줄게. 가람이 멍하니 은찬을 바라보았다. 내가 죽인 사람들을 잊게 해준다고? 피비린내나는 내 행적들을, 감춰주겠다고. 제 눈물을 닦아주는 은찬의 손이 느껴진다. 가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지우지 말아줘. 가람이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니까, 슬프니까. 가람이 은찬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무서우니까, 따뜻하게 안아줘. 무서운 꿈을 꾸지 않도록. 응, 그럴게. 은찬이 가람을 조심스럽게 안고 누웠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가람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은찬의 품에 안긴 채 잠들었다.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 조그만 성문이 열리더니, 세 마리의 말이 성문을 빠져나왔다. 왕궁에서 나온 주은찬과 청가람, 그리고 백건이었다. 말발굽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두 명은 웃고 있었다.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이토록 신날수가 없었다. 은찬이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가람을 보며 웃었다. 내기할래? 가람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말을 더 재빨리 몰았다. 은찬도 가람을 따라잡으려 신나게 몰았다. 두 사람을 쫓아가야하는 백건만 혀를 차며 더 빨리 달리려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백건이 말을 세웠다. 은찬과 가람도 따라 말을 세웠다. 여기야. 백건이 입을 열어 앞을 가리켰다. 안개로 잔뜩 덮여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은찬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가람의 옆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 가람이 흥 소리를 내고 은찬의 손을 거절한 채 익숙하게 뛰어내렸다. 은찬이 넌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찬이 백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백건이 머리를 저었다.
"그럼,"
백건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무사히 돌아가시길. 백건이 마지막으로 예의를 표했다. 은찬이 피식 웃었다. 갈까?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백건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안개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나서야 말머리를 돌렸다.
8.
안개 속을 얼마정도 걸었을까, 마침내 안개가 모두 사라지고 오묘한 색을 띈 장벽이 나타났다. 은찬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람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 곳을 통해 이 곳으로 왔으니까, 갈 때도 이 곳으로. 가슴이 기대감으로 쿵쿵거렸다. 원래 있던 세상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잠시간 장벽을 바라보고 있던 은찬이 가람에게 손을 뻗었다. 가람아. 은찬이 가람을 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지금, 주술을 풀 거야. 조금 아플지도 몰라, 참을 수 있지?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가람의 어깨 부근에 손을 가져다댔다. 읏,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혈관이 뽑혀나가는 듯이 아팠지만 견딜 수 있었다. 주은찬이 앞에 있었으니까, 주은찬이 절 강하게 안아주고 있었으니까. 파아아, 표식을 동여매고 있던 검은 주술이 풀려나왔다. 은찬이 손을 세게 쥐었다 피자 주술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내렸다. 미안, 아팠어? 몸이 가벼워진 기분에 가람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어. 가람이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은찬, 너 뒤에 날개 달려 있다."
투명하게 자라난 반쪽짜리 날개가 팔랑거렸다. 은가루가 뿌려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은찬도 받아쳤다. 가람아, 너도야. 가람의 등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표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 공기가 웅웅거리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등에 새겨져있던 이방인의 표식이 몸에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온전히 한 쌍으로 합쳐졌다. 펄럭, 거대하지만 알 수 없는 힘으로 쌓여있던 반짝이는 흰 날개가 장벽 앞에서 활짝 펴졌다. 장벽이 웅웅거리며 응답하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날개가 파스스 부서졌다. 주변이 반짝거리는 가루들로 휘날리며 어두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날개가 부서진 공간이 이상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과 같은 뒤틀림이었다. 저 안으로 뛰어들면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기 전에. 은찬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아."
"왜."
은찬이 가람에게 말했다. 한 마디만 말해, 지워달라고.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은찬이 가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2년간의 악몽들, 내가 그 나쁜 꿈들을 먹어줄게. 가람이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은찬이 미소지었다. 나마저 기억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잖아? 우리중에서 한 명은 기억해야지. 가람이 울 듯한 표정을 지웠다. 제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 가능하면 잊고 싶다. 이제 돌아가서 피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 살더라도 계속 기억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주은찬은 저 대신 그것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너무 이기적이잖아, 그건. 은찬이 다시 말했다.
"난 네가 힘들어하는거 보기 싫어."
네가 힘들어하는게, 더 보기 힘들어.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이다. 가람이 은찬을 올려다보았다. 주은찬 넌 나를 너무 위하려 해. 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할래.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그냥 기억하고 있을게. 은찬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알겠어. 은찬이 가람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은찬은 가람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뒤틀리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뛰어들기 직전,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지. 내 나쁜 기억들을 먹어버리겠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 기억마저도. 두 사람이 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 붉은 주술이 크게 피어오르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9.
가람이 눈을 떴다. 산들거리는 바람과 맑은 공기. 기억속에, 2년 전에 남아있던 그 산이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아련함과 울컥한 심정이 몰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저와 똑같이 앞을 바라보고 있던 은찬이 있었다. 은찬이 고개를 돌렸다. 전처럼 다시 짧아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바뀐것은 머리카락의 길이뿐만이 아니었다. 주은찬의 외견이 그때 같이 손을 잡고 이 산을 올랐던 때로 어려져 있었다. 가람이 웃었다. 주은찬, 너 다시 어려졌다. 너 능력도 분명히 하찮아졌을 거야. 앗, 그러면 안되는데. 은찬이 헛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폈다. 화르륵, 불이 크게 솟아올랐다. 은찬이 주먹을 쥐어 불을 껐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아쉽다."
입술을 비죽이며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은찬과 잠시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허전하지. 가람이 눈을 끔벅였다. 왜? 은찬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가람에게 물었다. 아니, 나 뭔가 기억이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아. 가람이 제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은찬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그 세계에 2년정도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널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왜 이러지? 가람이 미간을 슬쩍 좁힌 채 고민했다. 으으으음,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아. 은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억안나는 거 굳이 애써서 생각할 필요 없지 않아? 그만큼 중요한 기억도 아니라는 걸 테니. 가람이 은찬에게 쏘아붙였다.
"만일 중요한 기억이었다면 어쩔 건데?"
"뭐...."
은찬이 살짝 말을 흐리며 가람을 쳐다보았다. 은찬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기억하지 않는 게 너에게 더 좋아, 청가람. 너는 나에게 항상 순수한 사람이니까. 은찬이 입을 열었다. 생각 안나도 뭐 어때, 중요한 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거야. 가람이 입을 비죽였다. 주은찬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나중에 닦달해서 알아내야지. 그렇게 가람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은찬의 말은 이어졌다. 분명히 별 거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까 기억나지 않는 거겠지. 주은찬은 거짓말을 했다.
"이제 돌아가자, 중앙으로."
은찬이 가람의 손을 잡았다. 괜시리 맞잡은 두 손이 따스했다. 가람이 피식 웃었다. 산을 내려가며 은찬이 말을 했다. 나, 라면 먹고 싶어. 몇년동안 못 먹었더니 갑자기 그거 먹고 싶다. 가람이 되받아쳤다. 그것보다 더 맛있는 거 먹었을 텐데 왜 투정이야? 은찬이 하하 웃었다. 몰라, 다시 돌아오니까 입이 저렴해졌나 봐. 가람이 은찬을 흘겨보았다. 인스턴트는 몸에 안 좋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꽃게탕 해줄게. 가람의 말에 은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은찬이 속으로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편한 쪽도 있어, 내 마음대로 한 건 미안하지만.
사랑해, 가람아. 네가 잃어버린 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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