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심해서 전장르 조금 리메이킹ㅋㅋㅋ..ㅋㅋ
선택받은 사람에게는 제각기 고유한 체향이 존재한다. 피어나는 꽃처럼 보드라운 향, 시원한 바람처럼 조금 차가운 향, 이슬에 젖은 풀잎을 닮은 향 등등. 그리고 각각의 향기에는 저마다 짝이 존재했다. 청가람에게 주어진 향기의 짝은 난초 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때, 그 일 이후로 유일하게 옆에 붙어다니는 향기. 하지만 이제는. 가람이 눈을 뜨고 후 불어 자신의 몸에 붙어있던 향기를 날려보냈다.
자박자박, 일정하게 나는 발걸음 소리가 한밤중의 정적을 깼다. 주차된 자동차 밑에 숨어있던 얼룩무늬 고양이가 다가오는 그림자에 야옹-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가람이 한 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트렁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짐을 밀어넣었다. 트렁크를 닫으며 가람이 생각했다. 자신들의 인연도 끝이 바랜 것임에 틀림없었다.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가람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녀석에게 바친 시간이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미련을 두며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은 더 멍청한 짓일 거다. 가람이 차문을 열었다. 청가람이 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잠시 뒤에, 자동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렇게 가람은 조용히 거리를 떠났다.
Baby,
향기의 이별
Love is not Eternal
1.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십년이면 거대하고 웅장한 강산도 바뀐다는데, 하물며 그에 비하면 작고 여린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쉽게 바뀌겠는가. 주은찬과 청가람의 사이도 그런 경우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은 식었고 정조차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시는 은찬이 먼저 했다. 첫만남은 그다지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뇌리에 박혀있었다. 주은찬이 청가람을 처음 만난 날은, 유난히 추운 겨울날이었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같이 놀겸 은찬은 친한 친구들 몇 명과 모여 같이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막 달리자는 취지에서 멤버들을 모아놓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주당이다 보니 분위기는 자연스레 먹고 죽자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댕그렁, 처음부터 유난히 신나서 술을 들이키던 현우가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 덕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젓가락이 밑으로 떨어졌다.
"어휴, 저 새끼 언제 죽나 싶더니 완전 갔네, 갔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죽어버린 현우에 대해 누군가가 애도를 표했다. 백건이 그런 현우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다. 야, 죽었냐? 현우가 으으으 거리는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흔들지마세요, 토 쏠립니다... 그 말에 백건은 곧바로 손을 떼고 현우를 옆으로 밀었다. 보는 사람이 감동먹고 눈물을 잔뜩 흘릴 만한 대단한 우정이었다. 남자들끼리라서 그런지 술먹고 시체가 된 녀석은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취한 사람이 계속 널부러져서 자던가 말던가, 길바닥에서 대자로 드러눕던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취기가 돌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너 이새끼, 잔 빼기 없어. 어차피 기말 망한거, 조금 더 망해도 상관없잖아? 눈알을 부라리며 술잔을 빼나 안 빼나 한동안 살벌하게 웃으면서 서로를 감시하고 있던 분위기가 흐트러진 것은 낯선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던 탓이었다.
"저기 미안한데, 현우는?"
그래도 우정이 다 죽지는 않았던건지, 시체가 되어버린 현우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긴 있었다. 백건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서는 구석에 널부러져있는 현우를 가리켰다. 데리러 온 거냐? 청가람 너도 룸메 잘못 만나 고생이다. 백건이 청가람이라는 남자를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은찬을 스윽 바라보는 게, 잘못 만난 룸메이트 중에 주은찬도 있다는 의사표시 같았다. 죽어볼래? 은찬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백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저것도 친구라고... 은찬이 잠시 자신의 얄팍한 10년지기 우정을 되짚었다. 여하튼 그런 백건의 말에 가람이 죽어버린 현우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쳤다. 야. 은찬이 그런 가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멍청아, 일어나."
그러나 이미 술에 절어버린 현우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가람이 한숨을 쉬곤 손으로 오느라 바람에 엉망이 된 갈색 머리를 쓸어올렸다. 주황색 불빛에 반사되어 루비보다 선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선홍색 눈동자가 한순간 은찬을 사로잡았다. 가람은 좀 곤란하다는 듯 볼을 슬쩍 긁적이다가,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저들끼리 술파티를 다시 이어나간지 오래였다. 하아. 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끌고간담, 하고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가람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은찬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은찬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한 손을 턱에 괸 채, 손가락으로 술잔을 톡톡 쳐댔다. 한동안 은찬을 바라보던 가람은 흥미가 사라진 듯, 다시 현우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현우의 팔을 제 목에 두르더니 부축하고 일어났다. 오. 은찬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작아 보이는데, 힘은 생각보다 꽤 센 듯 했다. 키가 좀 있는데다가 술에 취한 현우를 저렇게 데리고 갈 수 있다니 말이다. 사경을 헤메는 현우가 힘없이 가람에게 몸을 기댔다. 가람이 일어서는 것을 본 백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고해라."
"수고고 뭐고...."
가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다. 끙, 한 번 고쳐메는 폼이 생각보다 많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가람이 중얼거렸다. 지지라도 무겁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쳐마시라고.... 꿍얼꿍얼대다가 현우를 부축한 채 술집을 나갔다. 청가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은찬이 물었다. 쟤, 누구야? 쟤? 아, 너 모르냐? 하긴 그러고보니까 만날 일이 없었긴 하겠네, 학과도 다르고. 은찬은 재촉하지 않은 채 백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백건이 물을 따라 마시고는 대답했다.
"우리랑 같은 학년, 경제학과 청가람."
2.
이 세상은 소수의 알파와 소수의 오메가, 그리고 다수의 베타로 이루어져 있다. 베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단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 사람들도 있대.' 라는 것을 듣기만 했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몰라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굳이 애써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파나 오메가이거나, 혹은 주위 사람들 중에서 그안에 속한 사람이 있는 경우일 때였다. 주은찬은 이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주은찬 자신이 알파였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단지 베타는 향기를 맡을 수 없었고, 오직 알파와 오메가들만 맡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반인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과 맞는 짝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셈이었으니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더라도,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끝에는 자신의 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가람에게서는 희미한 장미향이 났다.
은찬이 처음 보았을 때 가람을 주의깊게 보았던 이유는, 가람에게서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맡았을 때, 향이 꼭 청가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부드럽고, 어딘가 고귀함이 느껴지는 향. 하지만 그 향은 아주 희미했다. 단지 향기만을 가지고서 청가람이 알파나 오메가라고 판단하기에는 일렀다. 만일 정말로 가람이 알파나 오메가였더라면 향기는 좀 더 짙게, 상대를 유혹할 수 있을 만큼 흘러나왔을 테니까. 은찬은 약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바디워시나 비누 향기가 독특해서 그럴 거라고 결론내렸다. 은찬은 가람이 베타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후에 들은 백건의 말에 따르면 청가람은 베타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기를 맡았던 날부터, 은찬의 코끝에는 장미향이 붙어다녔다.
3.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자신의 형질을 발현하는 '각성'의 시기를 거친다. 보통 각성은 유소년기 중반부터 청소년기 초반 사이에 이루어진다.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성하는 시기는 모두 달랐지만, 대개는 그 사이에 이루어졌다. 각성의 증세는 보통 2-3일 전부터 온몸에 힘이 없고 나른하다가, 당일이 되면 몸살에 걸린 것과 비슷하게 아프고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면 그 날은 꼬박 침대에 누운 채 있어야 했다. 몸이 알파나 오메가의 특성에 알맞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열이 올랐다. 몸에 올랐던 가벼운 열이 내리면 각성은 끝났다. 각성이 끝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면 전에는 맡을 수 없었던 자신의 고유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본능적으로 자신이 알파인지, 오메가인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것은 모두 일반적인 각성의 과정일 때의 경우다. 각성의 과정을 남들과 다르게 매우 심하게 겪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각성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실제로 주은찬은 그걸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은찬이 질끈 주먹을 쥐었다. 가끔씩,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을 때면 아직도 눈앞에 떠다니는 형상. 축 늘어진 손, 굳게 감긴 두 눈, 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떨리는 손을 뻗어서 만졌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바로 은찬의 누나였다. 은찬의 가족은 모두 베타였기에, 알파나 오메가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는 단지 아프다고 칭얼대는 은하를 보고 감기라고 판단하고, 약을 먹이고 일찍 재웠다. 일이 일어났던 것은 바로 그날밤이었다.
뭔가가 우당탕 떨어지고 깨지는 소리에 잠을 자던 은찬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옆 침대를 보았다. 약을 먹고 곤히 잠든줄만 알았던 누나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탁상시계가 떨어져 산산조각난 잔해들이 널려있었다. 바르르, 은하의 팔이 심하게 떨렸다. 흐으으으으윽, 다 죽어갈 듯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누나? 누나. 은찬이 벌떡 일어나 다가가 누나를 흔들며 물었다.
'누나, 왜 그래? 괜찮아?!'
하지만 은찬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몸을 바로 세운 후 보였던 것은, 두 눈에서 새빨간 피를 쏟아내고 있는 은하였기 때문이었다. 은찬이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엄마! 아빠!!!!
은찬이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무서워, 누나. 바들, 떨리는 은하의 손이 무언가 붙잡을 것을 찾고 있었다. 누나 왜 이래, 무서워, 무섭다고... 온몸이 두려움과 공포로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은찬의 비명을 듣고 잠을 자고 있던 부모가 재빨리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은찬아, 무슨 일이니? 여자가 울먹거리는 은찬을 붙잡고 다그쳤다. 은찬이 떨리는 팔을 움직여 은하가 있는 곳을 가리켰고, 여자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더니 충격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여보, 여보!! 은하가!! 은하에게 달려간 남자가 아이를 안아들었다.
'은하야, 왜이래. 정신차려봐!!'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녀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감긴 눈에서는 여전히 빨간 피가 흘러내렸고, 이제는 쿨럭거릴 때마다 입에서도 피가 한웅큼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찬아, 닦을것좀 가져와! 당신은 빨리 응급차좀 부르고!! 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은찬이 재빨리 몸을 돌려 방을 뛰쳐나갔다.
수건, 수건. 은찬이 허둥대며 손을 움직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넘어지고, 칫솔통을 몇개 더 떨어뜨린 다음에야 은찬이 겨우 수건을 찾아들었다. 은찬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니는 전화를 붙들고 최대한 명확하게 주소를 말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은하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손과 옷자락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괴기스러워 보였다. 은찬이 아버지에게 수건을 건넸다. 아버지가 수건을 빼앗듯이 건네받아 흘러나오는 피를 닦았다. 은찬은 떨리는 팔을 붙잡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나, 누나아.... 은찬이 울먹거렸다. 전화를 끝낸 어머니가 그들에게 다가와 울면서 은하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은하야, 조금만 더 힘내렴. 조금만 더. 바로 다음 순간, 은하의 목이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은하야....?'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소녀를 살살 흔들었다. 툭, 이번에는 팔이 힘없이 흔들렸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서 소녀를 빼앗더니 얼굴을 어루만지며 계속 이름을 불렀다. 은하야, 은하야. 내 딸, 은하야. 그러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얼음장같아. 그 말에 남자가 손을 뻗어 아이의 조그마한 손을 잡더니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은찬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누나의 팔을 건드렸다. 무척이나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열에 시달리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부른 응급차는 결국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응급대원들이 죽어버린 아이가 있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은하를 품에 안고 오열했다. 은찬의 누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다. 강가에 가루가 된 누나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은찬은 멍하니 서 있었다.
후에 은하의 죽음이 '각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진작에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은 자신들을 저주했다. 그리고 일단 누나에게서 각성이라는 것이 나타났으니, 둘째인 은찬에게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은찬이 가벼운 감기라도 걸리면 무조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다행스럽게도, 은찬은 '일반적인' 각성 과정을 거쳤다.
3.
백건과 그의 새 룸메이트인 가람은 은찬과 같은 층에 살았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새 기숙사 방을 배정받고 보니 그랬다. 문득 열고 나온 문 바로 옆방에서, 익숙한 하얀 머리칼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알았다. 어. 은찬이 약간 놀란 듯 말을 뱉었다. 그 소리에 백건이 고개를 돌리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주은찬. 너도 이 층이었냐, 지지리도 붙어다니네. 백건이 지겹다는 어투로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나도 지금 알았어. 은찬이 자신 또한 너와 같은 심정이니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는 말투로 받아쳤다. 엘레베이터의 위치를 나타내는 전광판이 11층, 12층, 13층을 표시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삐딱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백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이번에 시간표 망해서 월수목 파워공강 3시간이야. 게다가 다 전공이다, 죽이지? 은찬이 백건의 말을 한 귀로 한귀로 흘려들으면서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죽인다. 띵, 하고 엘레베이터의 음이 경쾌하게 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백건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 백건이 미간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 좀 기다리는 거 못해서, 이 자비없는 놈아."
백건의 룸메이트인 청가람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차림의 가람이 못마땅한 얼굴로 백건을 노려보았다. 니가 늦게 나온 게 문제지, 난 잘못한 거 없어. 백건이 당당하게 말했다. 가람이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입을 닫고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엘레베이터가 부드럽게 내려갔다. 가람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백건의 앞에 흔들었더. 지갑 두고 나왔으면서 뭔 자랑질이야. 아 맞다 내 지갑. 백건이 가람의 손에 있는 자신의 지갑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갑을 받아들려고 했다. 하지만.
"뭐냐."
"뭐가?"
순순히 주지 않겠다는 듯 가람이 피식피식 비웃으며 지갑을 이리저리 빼돌린다. 이 쥐방울만한 게. 몇 번 잡아채려고 한 백건이 결국 청가람을 누르고 강제로 지갑을 빼았았다. 누르지 마, 키 작아진다고! 가람이 불평을 토해냈다. 백건이 비웃었다. 여기서 더 작아질 게 있긴 하냐? 쥐방울아. 백건이 악의를 잔뜩 실어 놀렸다. 이자식이 진짜 뒤질라고. 키에 예민한 가람이 백건의 낚싯바늘에 왈칵 걸려들었다.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은찬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공기중에 희미한 장미향이 떠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층, 2층, ...1층. 띵동.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로비로 발을 내딛었다.
"그럼 이따 놀러간다."
백건이 제멋대로 은찬의 기숙사에 쳐들어간다고 잡아놓고서는 여전히 뭐라 항의하는 청가람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같이 사라졌다. 뭐 사지? 고기, 고기. 기숙사에 음식물 반입금지거든? 두 사람의 목소리도 희미해져간다.
은찬이 천천히 걸으면서 손등을 들어 제 코에 가져다 대었다. 새삼스럽게 제 향을 맡으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역시, 아닌가. 은찬이 혼잣말을 하고선 손을 원래대로 내렸다. 제 향은 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꼿꼿한 향이었다. 난초 향.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맡았던 향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했다. 그런데 왜 계속 희미하다 못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향이 신경쓰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며, 은찬은 뒷문을 나섰다.
4.
은찬은 벽에 기댄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내일 집에서 올라온다고 연락을 받았던 터라, 옆자리 침대는 비어 있는 채였다. 은찬이 빈 침대를 흘끗 바라보다가,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1:41분. 잘까? 원래 늦게 자는 터라 잠은 별로 오지 않았지만 할 일도 딱히 없는 터라 은찬이 벽에 기댄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폭, 하고 침대에 누운 순간 몸을 감아오는 푹신한 이불의 느낌이 기분좋았다. 으음, 은찬은 누운 상태에서 다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1:42분.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잠금을 해제했다. 사실 핸드폰을 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제일 가깝고, 그나마 지루함을 해소시켜줄 수 있으니 하는 것일 뿐이다. 잠과 핸드폰,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생산적이냐고 꼽느냐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잠을 자는 것이지만...
사람이란 본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만을 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러면 건강에 나쁜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고, 담배도 끊어야 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강의는 중간에 뛰쳐나가야 하고, 팀플은 프리라이더를 해야 하나? 그것을 꼬박꼬박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뭐, 실제로 그러는 사람도 있긴 있겠지. 그렇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으니까, 나도 뭐. 은찬이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자 침대 밖으로 고개를 빼 문쪽을 바라보았다.
"백건?"
분명 아까 술마시러 나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지금 쳐마시고 나한테 꼬장부리러 온 거? 아니면 옆 방이라 지 방이랑 착각한 건가. 은찬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덟시쯤에 나갔으니 계속 먹고 지금 들어왔으면, 뭐... 제정신이 아닐 테니 방을 착각하는 실수는 한번쯤 봐줘도 되나. 하지만 분위기가 좀 달랐다.
야, 주은찬. 백건이 신발을 신은 상태 그대로 들어와 주은찬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10년이 넘게 알아왔지만 이렇게 당황한 백건은 처음 봤다. 심상치않은 모습에 은찬이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백건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곤 은찬을 일으켰다. 백건의 눈동자가 갈팡질팡했다. 은찬을 바라보다가 문 밖을 바라보다가 벽을 바라보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백건이 갑자기 욕을 뱉었다. 아 씨발 이게 진짜 뭐야. 그리고 백건이 막무가내로 은찬의 멱살을 잡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빽건 잠깐만, 이것 좀....컥. 숨이 졸려오는 느낌에 은찬이 백건의 손을 간신히 떼어놓고 백건을 다그쳤다. 뭐야? 뭔데 니가 이렇게 허둥대는 건데. 백건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지금 내가 존나 제정신이 아니거든? 술먹고 방금 들어왔는데, 청가람이. 백건의 입에서 나온 '청가람'에 은찬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청가람이 뭐? 은찬이 덩달아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씨발, 청가람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백건이 소리쳤다. 뭐? 은찬의 눈이 크게 떠졌다.
5.
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장미 향이 코끝을 찔렀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지독한 향기다. 윽, 은찬은 자동적으로 코를 막고서 방 안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침대 옆에 떨어진 채 온몸을 비틀어가며 끙끙거리고 있는 청가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은찬이 코를 막았던 손을 내리고 가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진한 향기와 뜨거운 열기가 풍겨와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져왔다. 애써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은찬이 가람의 옆에 앉았다. 끙끙거리던 가람이 손톱을 세워 침대를 바드득 긁기 시작했다. 너무 세게 긁어내린 탓에 연약한 손톱이 부러져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같이 들어온 백건이 가람의 손을 잡아채 바라보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청가람, 너 진짜 왜 이래?! 내 말 들려?!"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백건이 완전히 술이 다 깬 목소리로 청가람을 흔들었다. 술기운은 이미 다 달아난 지 오래였다. 한껏 취하고 기숙사로 돌아온 후,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불을 켜 보니 청가람이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발악하고 있었다. 흔들어 괜찮냐고 물어도 청가람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알코올 때문인지,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멈추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무작정 옆방에 있을 주은찬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은찬은 말없이 앉아 가람의 어깨를 잡고 살살 부축했다. 가람이 침대를 긁던 손톱을 세워 은찬의 손등을 긁었다. 순간적으로 깊게 손등을 파고드는 손톱에 은찬이 저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빨간 자국이 손등 깊게 생겼다.
"야, 뭐라 말 좀 해봐!"
백건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은찬은 입술을 꾹 깨물고 헐떡이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본능이 은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각성'이라고. 왜 이렇게 뒤늦게 각성이 온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늦어봐야 청소년기에 다 끝났어야 했을 터인데. 게다가 일반적인 각성이 아니었다. 은찬의 눈앞에 예전의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 입에서 나오는 핏덩이, 차갑게 식은 손,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청가람!!"
- 은하야, 왜이래. 정신차려봐!!
두 번 다시 그 경험은 겪고 싶지 않다. 은찬이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대로 가다가는 청가람은 죽을 수도 있다. 사실, 이 현상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각성이지만, 이것은 좀 더 다른 각성이었다. 자신이 알파로서의 각성이었다면, 청가람은. 은찬이 입을 열었다.
"백건, 정신사납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침착한 은찬의 목소리에 백건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전과는 달리 무거운 무게가 느껴졌다. 일단, 피좀 닦게 휴지 좀 줄 수 있어? 백건이 옆에 있는 휴지곽을 통채로 넘겼다. 은찬이 손을 들어 가람의 목덜미에 내려앉은 갈색 머리를 떼어냈다. 그리고 휴지를 몇 장 뽑아 깨진 손톱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았다. 흐윽, 고통에 움찔거리는 몸이 부자연스럽다. 은찬은 눈을 감았다 뜨고선, 입을 열었다.
"백건, 너 내 방에 가 있어."
"애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옆방에 가서 쳐자고 있으라고?"
"..이따가 설명해줄 테니, 지금은 내 말 따라줘."
부탁이야. 단호하고도 어딘가 절절한 목소리에 백건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움씰대면서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건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별 뾰족한 수도 없는 자신이 뭘 해결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겠지, 아마. 솔직히 말해서, 자신은 없다. 가람이 뒤로 쓰러지면서 머리를 침대 모서리에 박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은 은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청가람의 온몸은 불덩이였다. 은찬이 힘없이 꺾이려는 가람의 얼굴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청가람, 내 목소리 들리지? 지금 힘든거 알아."
내가 이걸 해결해줄 수 있어. 가람이 은찬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은찬이 말을 이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 하지 말고, 날 받아들여. 은찬의 말에 가람이 힘없이 눈을 떴다. 울 것만 같은 선홍색 눈동자가 은찬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감겼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곧이어 은찬이 고개를 숙여 가람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입 안에서 장미꽃이 하나하나 녹아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6.
각성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 때는, 강제적으로 각인시켜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우성 알파, 우성 오메가. 우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 열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혹은 열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각인이 되기에는 더 쉽다고들 했다. 하지만 대부분 각인까지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일반적인 각성에는 각인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각인은 비인간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알파든 오메가든 일단 한번 각인되면, 상대를 잊는 것이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은 강제적으로 몸에 상대의 이름을 새기는 행위였다.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각인된 상대를 기억했다.
청가람의 각성은 뒤늦게 발현된 터라, 미처 대처하지 못했던 각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은찬은 가람을 안았고 결과적으로 청가람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은찬은 우성 알파였고, 가람은 열성 오메가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로 더 심하게 각인되었다. 그 날 이후로, 청가람은 무의식적으로 은찬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마치 알에서 깨어난 아기새가 어미새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과 같이. 이전보다는 뚜렷하지만, 열성이라서 그런지 남들보다는 강하지 않은 은은한 장미향이 공기중을 떠돌아다녔다. 은찬은 그 향을 좋아했다. 아무도 맡을 수 없는, 나를 위한 향기. 나만을 위한.
은찬과 가람의 사이에는 항상 백건이 있었다. 어색한 사이를 중재해줄 수 있는, 그런 고맙고도 불편한 존재. 그러나 어느날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백건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가람은 은찬에게 말을 잘 걸고, 잘 웃게 되었다. 은찬도 곧잘 대답하고, 그와 같이 다니게 되었다. 대학 내내 두 사람은 같이 다니다가, 졸업하고서는 동거를 시작했다.
7.
처음에는 그저 좋았다. 그냥 주은찬한테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향기가 좋을 뿐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갑자기 진한 향기가 날 때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시선의 끝에는 항상 주은찬이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자신의 향은 짙은 주은찬의 향에 묻혀 나지 않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주은찬의 향이 더 좋았으니까. 이걸 두고 각인의 효과라고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을 찾는 은찬에게 다가가 톡톡 건드렸다. 야. 가람이 은찬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 찾는거?"
"어! 이거 맞아."
땡큐. 은찬이 가람에게서 책을 받아들고는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거 재밌어? 촤르륵 책장을 대충 넘겨보던 은찬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람에게 물었다. 과제에 재미를 기대하지 마. 가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겠지... 은찬이 애써 피어난 희망을 꾸깃 접었다. 하아, 책은 젬병인데 큰일났다. 푹 꺼지는 은찬의 말을 듣고있던 가람이 은찬을 툭툭 쳤다. 나, 저번 학기에 똑같은 거 듣긴 했었는데. 그때도 이 책이었어. 솔깃. 가람이 던지는 떡밥에 은찬이 확 걸려들었다.
"좀 도와주라."
"맨입으로?"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가람이 픽 하고 웃었다. 흐음, 잠시 생각해보던 가람이 선심쓰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뭐, 너한테 손해지 나한테 손해될 건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드는 한심한 생각에 가람이 타박을 주었다. 너 진짜 뭐 하려고 이렇게 생각없이 사냐. 은찬이 변명했다. 원래 경영학과는 딱히 할거를 정하지 않은 애들이 오는 거야, 그나마 문과에서 취업은 제일 잘 되니까. 가람이 쯧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가람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까이 오니 역시 머리가 더 맑아지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의 향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가람에게 있어서 은찬의 향기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청가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실제로도 그랬다.
8.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은 있다. 주은찬과 청가람이 서로 같이 살게 된지 7년이 지났다. 사귀게 된 지는 9년이 지났다. 이제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너무 익숙해져서 연인이 아니라, 가족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가람이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꺼냈다. 그리고 익숙하게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정하게 채소를 써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일정하던 소리가 잠시 멈춘 것은, 채소를 썰던 가람이 제 손가락을 베었기 때문이었다. 아, 피 나네. 가람이 중지손가락을 잠시 입에 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대로 하면 음식에 피가 다 묻을 것이 분명하기에 가람은 대일밴드를 찾아 붙이고서는 다시 식사준비를 했다. 식사준비를 다 마친 후, 가람은 방에 들어가서 아직도 잠에 빠져있는 은찬을 깨웠다. 주은찬, 일어나. 밥먹어. 그리고 미련없이 등을 돌려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다, 먼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람이 식사를 하기 시작한 잠시 후에, 은찬이 하품을 하며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다. 젓가락을 놀리는 가람이 손놀림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조금 전에 칼에 베인 탓이다. 은찬이 대일밴드를 붙인 손가락에 잠시 시선을 주다가, 계속 식사를 했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쩌다 손을 베었냐, 괜찮냐는 상투적인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연애 초반에는 이러지 않았다. 보통의 다른 연인들과 똑같았다. 서로 걱정해주고, 사소한 것에 웃음짓고, 싸우고 또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랬다. 사랑했기에 크게 싸우고 며칠간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냉전상태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홧김에 집을 나가 다른 여자랑 자버리고 뻔뻔하게 와이셔츠에 키스마크까지 달고 온 주은찬을 보고 홰까닥 돌아 패서 반 죽여놓기도 하고, 온 집안의 물건을 다 깨부신 적도 있었고, 멱살을 붙잡고 나야 그 년이야 라는 진부한 선택지를 주은찬의 눈앞에 들이민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서로에게서 풍기는 부드러운 향기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입을 맞추고, 키스하고, 같이 잤다. 그런 관계가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였다.
은찬은 각인된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은찬은 일반적인 각성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사랑하는 상대에서 자유로웠다. 은찬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을 매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가람은 주은찬에게 각인된 상태였다. 가람은 은찬을 제외한 타인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저에게 배어있는 은찬의 향이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끔 붙들어두었다. 그래서 가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다. 여전히 가람에게는 은찬의 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똑같이, 은찬에게 웃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똑같이 대했다. 그것이 은찬의 마음을 끌지 않게 되었다. 항상 풍기는 은은한 장미향조차도 은찬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어느 날, 은찬은 집에 늦게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거 뭐야?"
여느때처럼 늦게 집에 돌아온 은찬이 현관 앞에 놓인 짐들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못 보던 게 놓여있었다. 은찬의 질문에 가람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 짐. 무슨 짐? 은찬이 다시 물었다. 가람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방안에서 은찬의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나가려고. 은찬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물끄러미 가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칼이 목덜미를 약간씩 스쳤다. 겉옷을 걸친 가람이 뒤돌아보았다.
"혼자 잘 살잖아, 너. 나 없어도 상관없잖아?"
은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람이 웃었다. 무언은 긍정이랬어.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뭐, 상관을테니. 잘 있어, 그동안.... 가람이 말을 흐렸다. 적당한 말을 찾는 듯 싶었다. 그래, 그동안 수고했어.
은찬이 짐을 드는 가람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띠리릭, 하고 도어락이 열리며 청가람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청가람의 모습은 이제 집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은찬이 다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람이 쓰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희미하게 남은 장미향만이 조금 전까지 가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9.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넓은 편이라, 은찬은 계약기간이 끝나는 날과 맞추어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날에 이삿짐 차량이 올 계획이라, 은찬은 큰 박스를 열어놓고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정리하는 거 귀찮은데, 은찬이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제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초등학교 때 졸업앨범, 그간 받았던 상장들, 예전에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들.
남아있는 추억들이 꺼내져 잠시 동안 빛을 보다 곧 상자 안으로 처박혀 사라졌다. 가구는 내일 옮기면 되겠지. 은찬이 생각했다. 몸을 돌려 다른 방으로 가려고 할 때, 책장 사이에 끼여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은찬은 궁금증을 가졌다. 손을 뻗어 빼내려고 하다, 도저히 그 좁은 곳으로 손을 넣을 수 없어 볼펜을 넣어서 빼냈다. 하얀 먼지가 쌓여있는 책이었다. 갈색 가죽 비스무리한 재질로 된,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이었다. 은찬은 책을 펼쳤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떠나간 사람, 청가람의.
은찬은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이미 제 곁을 떠난 가람의 일기장을 굳이 세세하게 읽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더이상은 볼 일이 없다고 해도, 안보는 게 매너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주은찬도 인간이었다. 내용이 궁금해지는 게 당연했다. 비밀스러운 일들을 써놓는 일기장이라면 더더욱. 은찬은 뒷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204x 9월 18일
주은찬이 늦게 들어왔다. 약속이 있어서라고 했다. 말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녀석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 않게 되었다. 주은찬은 자고, 나는 혼자 깨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자야하는데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방 안에 낯선 자의 향기가 맴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잠이 안 오는 것일까. 오늘, 주은찬은 또다시 낯선 향기를 달고 왔다. 그건 여자의 향수였다.
204x 10월 1일
오늘은 다른 향기를 달고 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신에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하나 찍어왔다. 저 몸 어딘가에 키스마크가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남들이 보면 화를 내야한다고 할 만한 상황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것을 가지고 화를 내기에는 너무도 평범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서로 입을 맞추지도 않게 된 지 일 년이 넘었다. 따스하게 맞잡았던 손의 온기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204x 10월 2일
사랑? 정?
204x 10월 9일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204x 10월 20일
주은찬과 나는 왜 이런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걸까. 나에게 각인을 시켜서? 그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몇 년전의 일이고, 희미하게 사라지는 기억들 사이에 속할 준비가 되어있다. 오히려 자칫하면 죽을 뻔한 나를 구해주었으니, 고마워해야할 일이지 않을까. 주은찬의 속내를 잘 모르겠다. 솔직히, 우리가 지금 이러한 관계에 남아있는 것은 어느 누가 끝을 말하지 않아서일거라고 생각한다.
204x 10월 22일
지금 우리들의 사이는 마치 익숙함을 버리기 싫어서, 억지로 지속하는 사이인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추억뿐이다.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4x 10월 29일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일기장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은찬은 표지를 덮었다. 청가람이 떠난 날은 31일이었다. 청가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은찬은 일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두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은찬이 다시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10.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사람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너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단지 이건 흘러가는 시간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뿐이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랑이 식은 것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직 많다. 나도, 너도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지나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 중 하나와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희미한 장미향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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