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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윤의 날개

은빛으로 빛나는 날개가 눈 앞에서 천천히 펼쳐졌다. 은찬이 멍하니 손을 뻗었다. 투명하게 빛나던 날개는 은찬의 손이 닿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내렸다. 깨어진 날개 뒤로, 웅웅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주변이 은가루로 반짝거렸다. 한 소년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주은찬. 네가 날.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윤(潤)의 날개.

빛나는 날개는 신에게 선택받은 단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증표.

 

 

선택받은 자, 신의 대리인,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 이 나라를 수호하는 고귀한 힘을 가진 존재. 

많은 자들이 선택받기를 원하고, 그만큼 무척이나 노력한다. 현 나라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들은 모두 최소 한 명씩 윤의 날개를 배출한 가문들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혹은 더욱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가문에서는 체계적으로 후계자들을 양성하며 선택의 날에 제 가문의 후계자가 선택받을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한 단 한명만이 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가람이 눈을 돌렸다. 조그만 소년이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람은 물끄러미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안녕, 난 주은찬이라고 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불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착각을 주는 머리카락, 환하게 웃는 얼굴. 가람이 도통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제 얼굴만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은찬이라는 소년이 좀 더 덧붙여서 자신을 소개했다. 음, 앞으로 자주 볼 일이 많을 거야, 잘 부탁해.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그가 내민 손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따스하게 내밀어진 손이 있었다. 쓸쓸하고 숨막히는 이 세상에서 저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어준 사람. 가람이 손을 뻗어 은찬의 손을 잡았다.

 

 

'네가 이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거야.'

 

 

어릴때부터 줄곧 들어온 그 말에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고, 의문조차 품지 않았다. 청가람은 자신이 윤의 날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해진 삶이었으니까.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저, 알맞은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1.

 

청가람은 이 나라에서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큰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태어나자마자 찬밥신세로 버림받은 아들이었다. 그 이유에는 청 가문의 현대 수장이 엄청난 애처가였다는 게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가람의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다.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라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실로 맞아들이며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람이 태어나는 순간 깨어지고 말았다. 몇 시간동안 산고를 겪으면서 기력을 소진한 가람의 어머니는 가람을 낳고 며칠 후에 죽고 말았다. 그는 무척이나 슬퍼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만든 제 아들에게 분노했다. 그는 제 아들인 청가람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던 이유는, 갓 태어난 가람의 목 뒤에 조그만 날개 문양이 드러나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년에 한번씩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지극히 희귀한 현상. 날개 문양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손길을 받고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만큼 후에 아이가 자라면 신의 강력한 힘을 쓰게 될 수 있을거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전과는 다르게 조금씩 신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신이 직접 내려준 아이의 탄생은 무엇보다 축하할 일이였다. 황제는 청 가문의 수장에게 절대로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그는 제 아들을 가장 외곽으로 쳐박아두었다. 나이가 차서 황궁으로 들어갈 때까지 단 한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아주 멀리.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라났다. 돌보아주는 하인이나 유모조차 주인에게 분노를 살까 두려워 쉽사리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줄수 없었다. 그렇게 가람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웃는 일도 없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에요? 가람이 그렇게 물었다. 수장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람이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 계시죠? 유모가 씁슬하게 대답했다. 도련님의 어머니께서는, 도련님을 낳고 며칠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가람이 얼굴을 들었다.

 

 

'저 때문에 어머니가 죽어서, 아버지가 절 싫어하시는 거네요.'

 

 

아무도 그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가람이 연못에 비치는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왜 살아야 되는 거지? 가람이 속으로 생각했다. 도련님은 신의 선택을 받은 고귀하신 분입니다. 그래,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사는 거구나. 그러면 뭐해, 정작 나는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가람이 멍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고 얼마 후에 죽었기 때문이었으나,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는 자신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단지 황제의 명령 때문에 절 죽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몇 달 뒤면 궁에서 사람이 나와서 절 데려가겠지. 가람의 양 팔로 다리를 끌어모았다. 차라리 그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청가람이 6살이 되자, 황제가 서신을 보내왔다. 신의 징표를 가진 가람을 황궁으로 보내라는 서신이었다. 청 가문은 어떠한 반대의사도 표하지 않은 채 그 즉시 가람을 떠나보냈다. 어린 가람은, 단 한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가문을 떠났다.

 

넓고 호화스러운 궁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처음보는 것들만이 가득했다. 아름답게 치장된 복도, 사방에서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벽들. 앞으로 이곳이 가람님이 생활하실 곳입니다. 남자가 설명했다. 일주일간은 이곳에 익숙해질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은 편히 쉬십시오. 일주일 후로는 가람님을 가르쳐드릴 신관님과 무술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점차 방문하시게 될 겁니다. 가람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시 계시면, 곧 가람님을 모실 분이 올 겁니다."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가람은 멍하니 서 있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람이 의자를 질질 끌고와선 그 위로 올라갔다. 내려다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가람이 시선을 돌렸다. 아까 들어오면서 잠깐 보았을 때도 정말 크다고만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정도가 아니었다. 크기가 얼마만한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황궁을 들어올 때 보았던 성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람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가문에서 빠져나왔다 싶었는데, 다시 갇힌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뒤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음, 후계자님... 맞으시죠?"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가람에게 물었다. 가람은 그저 눈동자를 끔벅였다. 가람의 그런 반응에도 소년은 굴하지 않고 다가와서 가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계자님, 전 주은찬이에요. 앞으로 계속 후계자님을 모실 거에요. 소년이 의자위에 올라서있는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긴 위험해요, 이리 내려오세요. 은찬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가람이 내민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찬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팔 아픈데.... 처음보는 종류의 신기한 인간이었다. 가람이 은찬이 내민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오니 주은찬이라는 녀석은 저와 키가 비슷했다. 그것도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줄곧 가람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른들뿐이었고 그래서 항상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눈높이가 비슷한 게 신기했던 가람이 은찬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은찬이 볼을 긁적였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그러다가 갑자기 가람이 제 볼을 잡아당기자 아야! 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말랑말랑해...."

 

 

가람이 손을 떼면서 중얼댔다. 은찬이 얼얼한 볼따구를 어루만지며 가람을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다, 신의 징표를 가진 후계자라는 분은. 왠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앞으로 잘 해내갈 수 있을까. 은찬이 속으로 걱정했다. 

 

은찬이 걱정하는 것은 생각치 못한 채, 가람은 가람대로 처음 겪는 일들에 혼란스럽고 신기해하고 있었다.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키, 자신처럼 작은 손. 이 낯선 곳에서 본 낯선 소년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거리감을 두거나 너무 깍듯이 대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람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좋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들떴다. 웃음지을 일이 없던 가람의 입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배어나왔다.

 

은찬이 볼을 어루만지다가 가람이 웃는 것을 보고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까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올라가있는 걸 보았을 때도 귀엽다고 생각했었는데 웃으니까 더 귀여운 것 같다. 약간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웃으니 좀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가람이 입을 열었다.  

 

 

2.

 

한 소년이 어둑어둑한 연무장에 홀로 서 있었다. 그렇지만 주변을 따라 호롱불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 음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은찬이 검을 스릉 꺼내 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비치는 두 검은 눈동자. 은찬은 검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청가람이 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청가람? 은찬이 가람을 불렀다. 네 방에 없길래 밖으로 나왔더니 여기 있었네. 거기서 혼자 뭐해? 가람이 물었다.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딱히 할게 없어서. 은찬의 대답에 가람이 그를 바라보고 훅 웃었다. 수련하러 나온 거 아니야? 가람이 턱끝으로 은찬의 손에 들린 검을 가리켰다. 맞아, 주은찬 넌 좀 수련을 해야 돼. 호위대장이 될 거라면서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면 말이 돼? 가람이 은찬을 타박했다. 못해서 죄송하네요. 은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지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가람이 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연무장 한켠에 있는 검을 하나 집어들었다. 어차피 나도 할 거 없던 참이었으니까. 가람이 스르릉 하고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평소 제가 쓰는 것보다는 약간 무겁지만 그닥 지장은 없어보였다. 가람이 두어 번 휘둘렀다. 내가 상대해줄게, 원래 무술은 상대가 있어야지 더 빨리 느는 법이거든. 가람이 샐쭉하니 웃으며 은찬에게 손짓했다. 

 

 

"덤벼."

 

 

 

 

은찬이 후우 하고 숨을 작게 골랐다. 땀이 흘러 미끄러지려는 검을 고쳐잡고서 은찬은 가람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 망설임없이 들어오는 공격을 받아낸 가람이 검을 휘둘렀다. 챙챙,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기중으로 울려퍼졌다. 은찬의 눈이 가늘어지며 가람의 헛점을 찾았다. 휙, 뒤로 홱 물러난 은찬이 가람과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빠르게 따라붙는 가람 덕분에 그럴 수가 없었다. 부웅 날아오는 발을 몸을 뒤로 꺾어 피한 은찬이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키기기긱, 듣기 싫은 금속음이 나다가 은찬이 먼저 가람의 검을 뿌리쳤다. 한 바퀴 돌아선 가람의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주은찬, 제법 하는데? 가람이 입을 열었다. 뭐, 나도 그동안 당한 게 있으니 그렇지 않겠어. 은찬이 씨익 웃으며 되받아쳤다. 그 말에 가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하지만 이젠 아닐걸."

 

 

응? 은찬이 의문을 가졌다. 그 의문도 잠시, 전보다 두배로 빨라진 속도에 은찬이 가까스로 가람의 검을 막아냈다. 빨라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직감으로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가람의 선홍색 눈이 선명한 빛을 띄었다고 생각했을 때, 은찬의 손에서 검은 이미 떨어져 있었다. 가람이 자신에 가득찬 얼굴로 당당하게 웃으며 은찬의 목에 검끝을 겨누었다. 뾰족한 끝이 빛을 받아 반짝 하고 빛났다. 음, 은찬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는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 손을 들어올렸다. 완전한 항복의 표시였다. 네가 이겼어. 이걸로 몇 승이지?

 

 

"328승."

 

 

가람이 검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그럼 난 328패겠네. 은찬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가람이 물끄러미 은찬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혼자 기어들어가고 그래? 당연히 내가 더 잘하니까 그러는 거지. 그래, 그래.... 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람의 말에 수긍했다. 반응이 왜 저래. 가람이 속으로 은찬을 욕했다.

 

 

청가람이 황제의 명에 따라 황궁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낯선 모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고 피곤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황궁은 피곤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본래 집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아니, 가람에게 이 곳은 집과 마찬가지였다. 유년시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여 살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당당하게 할 말을 하며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청가람은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라의 질서를 유지할 힘을 가질 중요한 존재.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도 가람에게 깍듯하고 부드럽게 대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람이 이 곳에 정을 붙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주은찬이었다. 살갑고 가끔은 멍청한 구석이 있는 주은찬. 저와 같은 또래가 계속 제 옆에 있어줄거라는 사실이 기뻤다. 

 

후계자님,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서고에서 책을 꺼내던 가람이 들린 목소리에 몸을 돌리니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있는 주은찬이 있었다. 방에 계신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여기로 오신 거에요. 진짜 놀랐어요. 주은찬이 가람에게 다가왔다. 가람이 꺼내던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빤히 은찬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절 쳐다보기만 하는 가람의 모습에도 이제 어느정도 면역이 된 은찬이 가람을 이끌었다. 어서 가요, 제가 맛있는 쿠키랑 차 가져왔어요. 가람이 손에 책을 든 채 은찬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그러다가 은찬의 손을 탁 놓았다. 응? 은찬이 뒤를 돌았다. 가람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저런 표정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아, 혹시 내가 먼저 손 잡아서 그런가. 은찬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그만..... 

 

 

'왜 자꾸 나를 후계자님이라고 불러?'

'그랬.... 네?'

 

 

가람이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은찬이 멍하게 대답했다. 그야, 후계자님이시니까....? 아냐! 가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라고? 은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찬이 가늘게 눈을 뜨고 가람을 바라보았다. 맞는데, 왜 저러는걸까. 가람이 다시금 말을 뱉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후계자님이라고 부르지 말란 말야. 에. 은찬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가람을 쳐다봤다. 그럼 어떻게 불러요? 이름으로 불러, 나도 이름이 있단 말야. 계속 후계자님 후계자님 이러니까 내 이름이 그게 된 것 같단 말야. 가람이 빨개진 귀로 항의했다. 구차한 변명이었지만 은찬이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은찬에게 가람이 쏘아댔다. 청가람이라고 부르라고, 이 바보야! 은찬이 머뭇거렸다. 빨리 해, 안 그러면 나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야. 결국 가람의 말에 진 은찬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 가람...님?'

 

 

가람이 표정을 누그려뜨렸다. 전보다는 듣기 좋네. 뒤에 붙은 '님'자도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가람이 슬금 은찬을 쳐다보았다. 그,그. 가람이 오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님'자도 빼. 성급한 가람의 마음에 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반말을 쓸 수 있겠어요. 가람이 입을 비죽였다. 가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지 다음 수업 힘내서 하죠. 은찬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가람이 말했다. 나 그거 듣기 싫어, 너무 졸리단 말이야. 가람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은찬이 힘있게 끌었다.

 

 

그렇게 꼭 '님'자를 붙이고, 높임말을 쓰다가 언제부터 주은찬이 저에게 말을 이렇게 놓을 수 있게 됐더라. 가람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명확한 시점은 아무리 애써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스스럼없이 저를 부르고 같이 대련까지 하면서 자라온 장면들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은찬이 가람에게 말을 놓은 것을 본 사람들이 기겁하며 호통쳤지만 가람이 뭐 어때 내가 괜찮은데 하면서 넘어가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주은찬 묻어가는 건 잘해.... 가람이 은찬을 째릿 노려보았다. 왜?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너 못생겼다고."

"지금 시비 거냐...."

 

 

안 그래도 져서 기분이 꿀꿀한데. 은찬이 중얼거렸다. 뭘 그거 갖고 그리 찔찔대? 지는 게 당연하다니깐. 가람이 새침하게 옷을 탈탈 털었다. 들어가자, 가서 씻고 차나 한잔 할래? 가람이 웃었다. 맞아, 내가 이겼으니까 내기한대로 내 말 들어줘야 되는 거다? 은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 저번처럼 닭 흉내내기 같은 것처럼 이상한 거 시키는 건 아니겠지... 은찬이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3.

 

가람이 물기가 떨어지는 몸을 시중드는 사람에게 가만히 맡긴 채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벌써 10년이네. 황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도 10년이구나. 가람이 싱겁게 생각했다. 황궁이 워낙에 넓었기에 갑갑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밖보다 이곳이 더 편하고 좋은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밖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람이 생각하는 사이에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옷까지 다 입힌 시종들이 방에서 나갔다. 가람이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섰다. 선홍색 눈을 가진 소년이 절 쳐다보고 있었다. 가람이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옷을 살짝 끌러내렸다. 목 뒤, 어깨 부근에 있는 한 쌍의 날개. 가람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걸 매만졌다. 딱히 아무것도 느껴지지는 않는데, 이것 때문에 자신이 여기에서 이렇게 지내는 거라고 생각하니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의 힘이 정말 이런 문양따위에 들어있을까? 가람이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주은찬일것이라는 생각에 가람이 내뱉었다.

 

 

"가람..... 아,"

 

 

은찬이 가람의 옷차림을 보고 황급히 다가와 옷자락을 여며주었다. 뭐하는거야! 왜이렇게 훌렁훌렁 벗고 있어! 훌렁훌렁 벗고있다니, 가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온몸으로 나 화났소 라는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주은찬은 눈치채지 못한 채 옷을 제대로 묶어주는 데 바쁠 분이였다. 야, 뭐하는 거야. 그그그그그렇게 아무데나 벗어제끼는 거 아니야! 뭔 소리야, 방에 너밖에 없는데. 가람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봤던 것 뿐이야. 가람의 말에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뭘? 너도 알잖아, 문양 말이야. 가람이 목을 살짝 꺾으며 은찬에게 보여줬다. 피부 위로 드러난 날개 문양에 은찬이 그제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문신처럼, 청가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신의 징표. 가만히 바라보던 은찬이 가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질문에 가람이 대답했다. 그냥.... 이 별거없어 보이는 조그만 것 하나 때문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게 신기해서. 가람이 옷을 도로 여미곤 의자에 앉았다. 

이리 와. 이거 향 좋은데, 마셔. 은찬이 가람에게 걸어갔다. 달그락 거리며 찻잔에 차를 따른 가람이 은찬에게 차를 건넸다. 한 모금 마신 은찬이 도로 탁자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별로야?"

"으으응, 좋아."

 

 

그래? 그래. 가람이 미심쩍어하며 저도 차를 마셨다. 향만 좋구만, 뭘. 가람이 속으로 생각했다. 한동안 말없이 차를 즐기며 과자를 집어먹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은찬이 입을 열었다. 가람아, 넌 괜찮아? 뭐가? 뜬금없는 질문에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다음 달이면 계승식이 이루어지잖아. 그러면 평생 황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텐데, 괜찮아? 은찬의 질문에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은찬이 진지하게 가람을 쳐다보았다. 두어 모금 차를 마신 가람이 질문에 대답했다.

 

 

"괜찮아."

 

 

솔직히 어릴때 여기 들어온 이후로 나간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갑갑하진 않았어. 사실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데 가보지 못한곳도 몇 군데 있잖아?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전부라고 볼 수도 없고. 태평한 가람의 말에 은찬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가람이 먼저 말을 이었다. 뭐라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하지만 난 그 때 그시절에 비하면 좋아. 그렇게 계속 얼굴도 못본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살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사는 것보다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좋으니까. 그리고 주은찬, 네가 내 곁에 있어줘서 괜찮아. 가람이 슬쩍 웃었다.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은찬은 말없이 찻잔만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걸 쳐다보며 가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다음달이구나. 괜시리 두근거렸다. 신의 힘을 얻게 되면 그 시점을 기준으로 노화가 멈춘다던데, 그러면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가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 가람이 눈쌀을 찡그렸다. 그러면 내 키는 그대론데, 넌 계속 자랄거잖아! 그러면 내가 널 올려다봐야 해? 가람이 화를 냈다. 너 여기서 그만 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은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람이 은찬을 노려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난 계속 네 옆에 있을게."

"당연한 거 아냐?"

 

 

가람이 쏘아붙였다. 그럼, 어디를 가려고 그랬어? 하찮은 주은찬 같으니라고. 가람의 말을 들으며 은찬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그 말에 가람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금새 풀어지는 가람의 얼굴을 쳐다본 은찬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항상 널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거야. 네가 위험에 빠지게 할 일은 없게, 내가 지켜줄게.  

 

 

4.

 

여러개의 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가람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게 가만히 있었다. 최대한 수수하게 꾸며달라는 가람의 부탁에 마지막으로 가람의 머리에 붉은 머리장식을 꽃고선 모든 손들이 떨어졌다.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흰색과 붉은색, 그리고 파란색을 적절히 섞어놓은 아름다운 옷자락이 청가람이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다. 은찬이 밖으로 나온 가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구는 주은찬이 행동이 웃겼다. 가람이 피식 웃으며 은찬에게 속삭였다. 

 

 

"일부러 진지한 척 하지 마, 그게 더 웃겨."

 

 

가람의 말에 은찬이 삐걱였다. 내, 내가 뭐 어때서! 은찬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때마침 보인 가람의 옷차림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신의 대리인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아니, 잠시 신이 인간으로 현신해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말해도 지장이 없어보였다. 은찬의 얼빠진 표정을 보고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가람이 걸어가는 것을 본 은찬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쫓아갔다. 

 

 

흰 복도가 끝없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복도에 자신들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오늘이 계승식 날이니까 그런 거겠지. 이 길의 끝에는 제단이 놓여 있고,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거라는 걸 알고 있다.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신의 힘을 가질 청가람을 보기 위해서. 은찬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청가람과 자신, 단 둘뿐이다. 이건 저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가람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은찬이 자리에 멈춰 서서 가람을 불렀다. 가람아, 청가람. 가람이 뒤를 돌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선 주은찬이 절 바라보고 있었다. 가람이 눈으로 물었다. 왜 불렀어. 은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지막일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거야."

"뭐가?"

"식이 끝나면 입장이 달라지니까 말야, 아무래도 전처럼 지내지는 못하겠지."

 

 

어딘가 멀어져가는 은찬의 말에 가람이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은찬이 서서 말을 이었다. 처음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생각했어. 널 지켜주고 싶다고.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매일을 살아. 너의 웃음, 너의 목소리, 너의 행동 다 하나하나 기억해. 절절한 은찬의 목소리에 가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계승식을 앞두고 쏟아져나오는 은찬의 진지한 목소리에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은찬이 가람의 앞에 한 쪽 무릎을 끓었다. 청가람, 이것만은 알아줘. 은찬이 가람의 손등에 입맞추며 중얼거렸다.

 

 

"넌 나의 주인이고, 난 그런 너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걸."

 

 

 

 

주은찬의 말을 듣고 난 후 어떻게 긴 복도를 걸어온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람이 멍한 정신으로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은찬이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가람이 신관의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지난날 주은찬이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니 수상쩍던 행동이 많았다. 진짜 그래서 그런 거야? 가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절 쳐다보는 주은찬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돌아보진 않을 거야, 가람이 애써 돌려지려는 고개를 바로 했다. 조금 있으면 곧이다. 사제가 앞으로 나와 가람에게 무릎을 끓었다. 황위를 계승하는 황태자를 대하듯이 치러지는 경건한 의식이다. 가람이 사제가 내미는 칼을 받아들고 가 제단 앞에 섰다. 애써 다른데로 흘러가려는 정신을 붙들고 칼로 손을 살짝 그었다. 아파, 가람이 눈을 찡그렸다. 가람의 손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져 앞에 놓인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또옥, 피가 물에 희석되며 스르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 위로 거대한 불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놓여있는 호롱불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하얀색의 불, 주변이 삽시간이 조용해지고 차례차례로 화르륵 불이 붙는 소리만이 들렸다. 가람이 바로 앞에서 넘실거리는 흰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이 푸른색으로 홱 타올랐다. 가람이 눈을 찡그렸다. 

 

은찬은 뒤에 서서 가람의 등에 천천히 자라나는 투명한 날개를 바라보았다. 사라락, 하고 펼쳐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날개가 완전히 펴졌다. 몇백년동안 이어져왔던 계승식중에서 가장 큰 날개였다. 신이 직접 선택을 해 준 아이였기에 그런 것인가. 성스러운 빛을 내는 날개였다. 저게 나타난 이상은 신의 힘이 청가람에게 완전히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날개가 접히고 사라지면 계승식은 끝난다. 그 때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청가람에게 나타났던 은빛 날개가 파사사사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가람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 하라는 대로 했을 터인데. 가람의 머릿속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졌다. 그건 청가람 뿐이 아니라 진행하던 사제들과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제 이 나라에 신의 가호를 내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일까.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때였다. 다시, 신의 날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좀 전과 같은 은색으로 빛나는 투명하고 거대한 날개. 하지만 그게 나타난 사람은 청가람이 아니었다. 신이 직접 선택했다던 청가람이 아니었다. 

 

주은찬에게였다.

 

 

5.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시녀가 고개를 숙여보인 후 방을 나갔다. 은찬이 한숨을 내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새롭게 윤의 날개의 자리에 오른 이후, 일주일간 쉴틈없이 바빴다. 자신이 다뤄야 할 것, 관리해야 할 것 등등을 대충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조금 지치긴 하네. 은찬이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가람의 호위격이었던 자신은 한순간에 이 나라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위치에 올라있었다. 전과는 달라져버린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다. 은찬이 넓은 방을 걸어가 손끝으로 책장을 넘겼다. 전대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기록들, 약 10년에서 15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의식. 나라의 결계를 수호하고 자연현상을 관리하는 사람. 책장을 넘기던 은찬의 손이 멈췄다. 잠시 그 안에 적혀있던 내용을 바라보던 은찬은 책을 덮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은찬이 고개를 살짝 돌려 거울에 비치는 문양을 바라보았다. 어깻죽지에 자리잡은 한 쌍의 날개 문양.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찬이 옷을 여몄다. 전례없는 일이였다. 신의 결정이 번복된 일은 없었는데, 그게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했으며, 의견이 분분하게 일었다. 왜 청가람이 선택받지 못하고 주은찬이 선택받았는지. 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말없이 은찬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중에서 얽히는 시선. 대화는 계속 흘러갔다. 청가람이 부정한 존재라 신이 그 힘을 도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를 죽여야지 뒤 탈이 없을 것이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건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만일 정말 그가 부정한 존재였다면 처음부터 표식이 나타나지도 않았겠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저희들이 함부로 청가람을 죽이면 오히려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은찬의 말에 시끄럽던 입들이 조용히 닫혔다. 폐하. 은찬이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대한 처분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황제가 허락의 뜻을 표했다. 

 

 

은찬은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청가람, 청가람. 은찬이 한 문 앞에서 발걸을 멈췄다. 은찬이 잠시 주저했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은찬이 결국 손을 들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람이 물끄러미 침대에 앉아서 들어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선홍색 눈. 은찬이 가람에게 다가갔다. 가람아, 은찬이 작게 가람을 불렀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찬이 손을 뻗었지만, 가람이 그 손을 쳐냈다. 정적이 흘렀다. 가람이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옷자락이 벌어져 살갗이 약간씩 보였다. 가람의 목 뒤에 남아있던 문양은 깨끗하게 없어져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가람이 다시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냔 말이야. 가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은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계승식 이후로 처음 묻는 질문이었다. 이제 필요없는 나는 궁에서 나가야 되는게 분명한데. 아니, 오히려 신에게 버림받은 부정한 존재니 죽임을 당해야 되는건데. 주은찬, 대답해. 내가 그렇게 비참해 보여서 그랬어? 독설이 날아왔다. 내가 우스웠지? 가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에게서도 버림받고, 신이라는 자에게도 버림받은 내가 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게 비참해... 은찬이 가만히 가람의 말을 들었다. 가람의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아룽졌다. 그리고, 왜 그때 복도에서 그런 말을 했어? 그 말에 은찬이 멈칫했다. 넌 알고 있었지? 내가 선택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가람이 생각하는대로 중얼거렸다. 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나가고 싶어.

 

 

"여기서 나가고 싶어.."

 

 

더 이상 이곳은 예전과 같은 곳이 아니야, 이젠. 가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숨이 막혀! 가람이 새빨개진 눈으로 소리쳤다. 예전과 달라진 눈으로 나를 보는 시선들이 싫단 말이야.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겠지, 어?! 날 내보내줘, 주은찬! 내 처분은 네 손에 달렸다며, 나를 여기서 내보내줄 수 있잖아. 제발, 내보내줘....차라리 죽여줘. 은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람이 말을 멈추고선 은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절 웃게 만들어주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가람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주은찬. 당장 여기서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내가 비참해지니까. 다시는 오지 마,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도 말고.          

 

 

6.

 

하아.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온 은찬이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팔을 걸쳤다. 조금 전 가람에게 험한 말을 들었던 것과 자신을 향해 지어보였던 가람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크게 상처받은 얼굴, 조금 숨을 돌릴 틈이 나서 뭐라고 말하기 위해 가람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던 은찬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도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밀어낼 줄은 몰랐다. 청가람이 저렇게 차갑게 절 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창문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은찬의 머리를 헝클고 지나갔다. 수없이 장난치고 재밌게 놀던 시절, 넘어져서 상처가 난 제 무릎을 보고 넌 정말 칠칠맞다며 구제불능이라고 타박하면서도 직접 붕대를 감아주던 청가람. 청가람은 제 모든 것이었다. 청가람이 조금 더 오래 이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길 원했다.

 

 

"가람아......"

 

 

은찬이 조용히 청가람의 이름을 읖조렸다. 아득한 기억, 처음으로 가람을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주은찬이 처음 청가람을 보았던 곳은 황궁이 아닌, 청 가문에서였다. 은찬은 외로이 서있는 가람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주 가문의 후계자 주은찬이라고 해. 가람이 은찬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잘 부탁해! 가람이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모기만한 가람의 대답이 들려왔다. 휙휙, 장면이 지나갔다. 

 

너, 목 부근에 날개 문양이 있다며? 진짜야? 응.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줄까? 가람이 조그만 손을 움직여 은찬에게 그걸 보여주었다. 자그맣게 피부위에 놓여진 날개 문양. 우와....신기해. 진짜 있구나, 그러면 선택받는 건 확실하겠네. 은찬이 가람의 옆에 따라앉았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확실한 후계자가 있으니까 나보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차라리 후계자를 지키는 검이 되랬어. 검술은 못하지만.... 노력하면 되겠지! 너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말이야. 은찬이 이를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 다시 기억이 흘러갔다. 

 

은찬이 턱을 괸 채 가람을 쳐다보았다. 이제 며칠 후네. 은찬의 말에 가람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게, 진짜 계승하게 되는구나. 가람의 감흥없는 말을 듣던 은찬이 불쑥 떠오른 생각에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보니까, 신의 힘을 담으면 그 상태에서 노화가 멈추게 된다던데. 은찬이 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럼 넌 평생 쪼그맣게 남아있는데 나만 늙어가야 되잖아! 은찬이 찡징거렸다. 가람이 얼굴을 굳혔다. 주은찬, 뭐라고? 쪼그맣다고? 가람의 관자놀이에 핏발이 섰다. 검은 아우라가 풍겨나오는 가람의 모습에 은찬이 헙 입을 닫았다. 망했다, 깜박하고 본심이 나와버렸다. 가람이 이를 갈며 웃었다. 좋아, 넌 내가 어떻게해서든지 끌고갈 거야. 네가 싫어하는 것들을 다 떠넘겨줄게.

 

은찬이 고개를 돌려 가람의 등에 나타나는 날개를 바라보았다. 성스러운 신의 징표, 약해져가는 나라의 힘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축복받은 존재. 선홍색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날개가 점점 수그러들고, 활활 타오르던 불꽃들이 일순간에 꺼졌다. 의식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은찬이 미소지었다.  

 

 

'너를 지켜줄 거야, 평생.'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해도 난 너를 지켜주고 싶어. 은찬이 가람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 가람이 피식 웃었다. 좋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앞으로 나의 검이 되어 내 곁을 지켜줘. 청가람은 윤의 날개로서,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의 힘을 썼다. 강력한 신의 힘으로 약해졌던 나라는 서서히 힘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점점 가람은 힘을 잃어갔다.

 

 

'왜 그래?' 

 

 

졸려? 은찬이 눈을 비비적거리는 가람을 보고서 물었다. 가람에게 빛나는 날개가 나타났던 그 날 이후, 6년째 되는 날이었다. 가람이 멍하니 대답했다. 아니, 그냥 조금 눈 앞이 흐릿해서. 요새 조금 무리한 거 아니야? 들어가서 쉬어. 가람이 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럴까...방까지 좀 데려다줄래? 가람이 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생각 없이 가람의 손을 잡은 은찬이 전보다 더 마른 가람의 손목에 화들짝 놀랐다. 청가람, 너 왜이렇게 말랐어. 은찬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가람이 눈쌀을 찡그렸다. 몰라... 그냥 요새 무기력하고 입맛이 없더라고. 가람이 은찬의 팔에 기대며 대답했다. 신의 힘을 몸에 가둔 이후로 가람의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만 은찬은 성장을 계속했기에 가람의 키는 은찬의 어깨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쉬면 괜찮아질거야. 방 앞에 서서 가람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내일 봐.

그 때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신의 힘을 가진 자는 얼마 살지 못한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힘을 더 많이 쓰면 쓸수록,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남은 수명은 더 줄어들게 된다. 은찬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싸늘한 밤공기에 눈물이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신의 증표를 가지고 태어난 가람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10년도 채 살지 못했다. 나라를 더욱 풍요롭게 번영시키고 발전시킨 대신, 그 댓가로 6년만에 죽어버린 청가람. 은찬이 멍하니 발걸음을 떼어, 6년전 의식이 치러졌던 곳으로 갔다. 현실감이 없었다. 은찬이 소리질렀다. 신이라는 자가 정말 있다면, 내 앞에 나타나라고. 당신이 뭐길래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데려갔냐고. 당신이 뭔데 단 한번도, 청가람에게 행복이란 것을 주지 않고 불행만 주다가 거둬갔냐고. 은찬의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뚫고 울려퍼졌다.

 

은찬이 악에 받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신의 축복을 받는 이 나라는 사실, 제물을 바치고 안전을 유지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잔인한 신이여, 왜 처음부터 청가람에게 징표를 내려줬던 거죠? 그 때문에 그녀석은 태어났을 때부터 외로웠어요. 단 한번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위한 도구로 자라났죠.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청가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 나라를, 기울어져가는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주었죠, 그리고 죽었어요. 은찬이 소리질렀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처음부터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청가람은 죽지 않았을 거야. 은찬이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치며 간절히 기도했다. 대신 내 목숨을 갉아먹어도 좋아, 다시 살려줄 수 있다면!!

그러자, 꺼진 ​제단에서 푸른색 불이 휙 타올랐다. 은찬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저주한다고요?'

근엄하고도 부드러운 여신의 목소리에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나를 이유없이 미워하는군요. 나는 그를 거둬가고 싶어서 거둬간 게 아닙니다. 다만, 그의 육체가 내 힘을 오래 견디지 못했을 뿐. 여신의 목소리에 은찬이 소리쳤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를 지목하지 않았으면 되었잖아요, 그 징표만 없었어도 그 녀석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여신이 침묵했다. 은찬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가람을 돌려줘. 내가 대신 당신의 제물이 되어줄테니. 꼭 누군가가 당신의 욕심에 희생되어야만 한다면 내가 하겠어. 그 어떠한 저주스러운 힘이라도, 당신을 저주할 거라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견뎌내줄거야.

푸른 불꽃이 작게 흔들렸다. 마치 주은찬의 말을 생각해보기라도 하는 듯이.

'그래요, 당신의 말을 들어줄게요.'

 

​시간을 되돌려주겠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아주 예전으로. 당신은 유년기로 돌아가게 될 거에요.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나게 되겠죠. 그 다음부터의 일은 당신에게 달렸어요. 각오가 있다면, 선택의 날에 나를 부르세요. 정말 후회하지 않고 견뎌낼 자신이 있다면, 후에 벌어질 차가운 눈들을 견뎌낼 자신이 있다면.

여신의 말이 끝나자,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저만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이 되감기고 있었다. 은찬이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 다시 눈을 뜬 눈에는 황궁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이는 건, 의자 위에 올라가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작은 소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은찬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시 돌아와줬구나. 은찬이 걸어가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가람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후계자님, 전 주은찬이에요.

 

 

7.

 

가람이 뒤척였다. 그 날 이후로,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주은찬, 주은찬. 제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주은찬. 3주 전에 절 찾아온 주은찬의 앞에 대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다시는 말 걸지 말라고 소리쳤었다. 정말 그 말대로 주은찬은 그 이후로 절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히 제가 먼저 그렇게 말한 거지만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건 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주은찬의 표정이 너무나 절절했기 때문이었다. 가람이 끙끙거렸다. 그 날 밤, 가람은 아주 기나긴 꿈을 꿨다. 

 

 

소년이던 모습의 청가람과 주은찬. 어린 가람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주은찬이 있었고, 꿈 속에서의 가람은 그걸 좀 떨어진 옆에서 지켜봤다. 은찬이 어린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어린 가람이 그 손을 살며시 잡았다. 두 소년은 같이 자라났다.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지고 눈이 모든 것을 하얗게 뒤덮고 다시 눈이 녹는 계절이 오는, 그렇게 해가 몇 번이고 바뀔 때까지.

가람이 두 소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항상 옆에는 주은찬이 있었다. 가람이 물끄러미 서서 역사책에 낙서를 하는 두 명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들어온 선생이 두 소년에게 호통을 치는 것도 보았다. 꾸중듣고 있는 어린 가람의 입가에 웃음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꿈 속에서 장면이 빠르게 넘어갔다. 우는 가람을 달래주는 주은찬,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람이 더 편하게끔 어깨로 끌어당기는 주은찬. 황궁의 정원에 가서 몰래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며 놀고, 연못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던 장면들. 그리고 계절이 몇 번 더 지나 드디어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청가람은 신에게 다시 선택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꿈 속의 가람은 주은찬이 계속 옆에 있는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은찬을 호위로 붙여달라고 황제에게 요구하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다시 장면이 넘어갔다. 가람이 생각했다. 왜 막연히 10-15년 정도에 한 번씩, 새로운 계승식을 올리는지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몇 년쯤은 지난 것 같았다. 주은찬의 키가 그만큼 커있었고, 체격도 달라져 있던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신의 힘을 가둔 가람은 그때 그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싸늘하게 식어 숨을 거둔 가람을 보고 은찬이 멍하게 서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거대한 힘을 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윤의 날개들은 그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꿈 속에서의 주은찬은 몹시 절망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음 후계자를 뽑을 의식을 준비하는 사제들에게 분노했고, 역시 아무렇지 않은 황제에게 분노했다. 다 알고 있었음에도, 알려주지 않았던 거였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이었겠지. 

 

주은찬은 제단으로 가 빌었다. 바닥에 콱 박힌 검이 흔들렸다. 신에게 악을 썼다. 청가람을 살려내라고, 대신 자신이 희생할테니, 다시 살려내라고, 그렇게 소리질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가람이 손을 뻗었다. 비록 꿈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위로해주고 싶었다. 울지마, 주은찬. 그렇게 울지 마. 가슴속이 너무나도 먹먹해져왔다. 

꺼진 불이 확 타올랐다. 은찬이 고개를 숙였다. 신은 주은찬의 말을 들어줬다. 시간이 돌려지고, 새롭지만 누구에게는 똑같은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 은찬이 손을 내밀었다. 앳되지만, 많은 감정이 들어있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후계자님.

 

 

 

"헉.....!"

 

 

가람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자신도 모르게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느껴졌다. 가람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떨어졌다. 꿈 속의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정말 실제로 겪었던 일인 것처럼. 가람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었을거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고 있었다. 확신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가람은 눈을 꼭 감고 정신을 맑게 하려고 노력했다. 방금 꾸었던 꿈과 한 달 전의 은찬의 얼굴이 수시로 겹쳐졌다. 그리고, 복도에서 들었던 은찬의 말이 생각났다.

 

 

[ 난 너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걸 ]

 

 

전에 들었던 주은찬의 진심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가람이 멍하니 눈을 떴다.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주은찬, 정말로 제 남은 시간과 목숨까지 바쳐버린 주은찬이었다. 거창한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 하나'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버린 거였다. 생명과 자유, 행복,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자신에게 받아야 할 차가운 눈초리까지도 모두 감안해서. 가람이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울컥, 솟구치는 감정에 그친 눈물이 다시 나오는 것 같았다. 바보, 멍청이. 

 

이 천하의 둘도 없는 멍청이를 찾아가야 했다. 가람이 옷을 챙겨입었다. 침대를 내려와 얽히려는 발걸음을 바로하고 빠르게 방문을 나갔다. 찾아가서, 한 대 때려줘야 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희생하다 죽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고 욕을 한 바가지 퍼줄 거였다.​ 당황한 얼굴로 서 있을 그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화를 낼 거였다. 그리고 주은찬에게 이렇게 말할 거였다. 너만 짐을 짊어지지 말고, 나에게도 그 저주스러운 힘을 나눠주라고. 주은찬. 가람이 은찬의 방문을 열었다. 피곤했던건지 널부러진 종이들 위로 엎드린 채 잠이 든 주은찬이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 천천히 은찬에게 다가갔다. 주은찬, 가람이 입을 열어 은찬을 가만히 불렀다. 주은찬, 은찬아. 감겨있던 은찬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졌다.   

 

 

같이 생을 끝마치자.

그저 제물로 쓰여지다 죽더라도, 너와 같이 죽는다면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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