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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32 x 15

처음, 은찬이 청가람을 본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이었다. 집과의 학교가 거리가 멀었던 탓에 혼자서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던 대학생 주은찬, 그리고 어느 날 그 옆집으로 이사온 한 쌍의 부부. 침대에 누워서 오랜만에 빌려온 재미있는 책을 읽고있던 은찬은 밖에서 들리는 벨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혹시 친구녀석들이 심심하다고 들이닥친 걸까. 그동안 간간히 있었던 일을 상기하자면 그럴 가능성도 적잖아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연 은찬의 눈에 보인 것은 낯선 얼굴의 여자와 조그만 손으로 자신에게 떡이 든 접시를 내미는 어린아이였다.

 

 

"안녕하세요, 어제부로 옆집에 이사왔는데 떡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학생이신가봐요? 여자가 미소지었다. 그 말을 들으며 은찬은 최근에 자주 시끄러웠던 일을 기억해냈다. 어제 학교를 가면서 왜 이삿짐 차가 앞에 있을까 하고 생각했더니만, 이들이 이사오느라 그랬나 보다. 자, 어서 형아에게 건네줘야지? 상냥한 말투로 여자가 아이에게 말했다. 은찬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쪼그려 앉았다. 형아, 이거 받아! 은찬이 아이의 손에서 떡을 받아들었다. 히, 귀엽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안아주고 싶었다.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여자가 호호 웃으며 아이를 데리고 옆집으로 이동했다. 은찬이 천천히 문을 닫으며 이동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득, 엄마를 쫓아가던 아이가 뒤를 살짝 돌아보더니 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허억, 귀엽다. 은찬이 문을 닫았다. 

 

원래 아이들이 저렇게 귀여운 생물이었던가.....? 은찬이 집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으으, 너무 귀여워. 말랑말랑거리는 흰 볼살을 살짝 잡아당겨보고 싶었다. 은찬이 방금 전 건네받은 떡을 한 입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아기일 때 저랬을까? 음. 은찬이 침대에 다시 배를 깔고 누웠다. 그래, 자신도 볼살은 말랑말랑 거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 저렇게까지 귀엽지는 않았겠지. 귀엽다, 또 보고 싶네. 은찬이 다시 떡을 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가 건네준 떡은 맛있었다. 나도 저런 동생이 있었으면. 은찬이 책장을 한 장 넘겼다.

 

*

 

띵동, 울리는 벨소리에 은찬이 문을 열었다. 형아! 말랑말랑한 볼을 가진 아이가 은찬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 가람이 왔어? 은찬이 품 속에 뛰어든 가람을 안아올리며 살갑게 웃었다. 형아 많이 보고 싶었어! 가람이 옹알댔다. 그랬어? 은찬이 따라했다. 여자가 미안한 얼굴로 은찬에게 부탁했다.

 

 

"미안해요, 잠시동안 맡길 데가 없어서...."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었는데요 뭐."

 

 

그럼, 몇 시간만 부탁할게요. 여자가 연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쓰시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가람이는 제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은찬의 대답에 여자가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여자가 가람의 조그만 손을 붙들며 당부했다. 가람아, 엄마 빨리 다녀올테니 형아랑 잘 놀고 있어. 알겠지?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이빠이. 가람이 걸어가는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배웅하던 은찬이 가람을 내려놓고선 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간 가람이 은찬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여튼 아기들이란 힘이 넘치는구나... 은찬이 약간 경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람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부부가 옆집으로 이사온 지 두 달이 지났다. 꽤 좋은 사람들이라 은찬은 옆집 부부와 가깝게 지냈고, 그 집 아들인 가람과도 가깝게 지냈다. 가람은 은찬을 형아라고 부르며 그를 곧잘 따랐다. 은찬도 절 쫄래쫄래 부르며 따라오는 가람이 싫지 않았다. 마치 한참 어린 친동생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가람과 같이 놀이터에서 놀아주기도 하고, 이렇게 가끔 가람을 맡아주기도 했다. 은찬이 의자에 올라가 책상 위를 뒤적거리는 가람의 옆으로 다가갔다.

 

 

"뭐 해?"

 

 

가람이 은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반정도는 차지한 것 같은 큰 선홍색 눈동자. 가람이 조그만 손을 움직이며 펜을 하나 집어들었다. 은찬이 형아! 으응? 은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람이 펜 뚜껑을 폭 하고 따더니 은찬의 연습장에 힘겹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삐뚤삐둘, 가람이 힘겹게 무언가를 써내려가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펜을 내려놓았다. 가람이 은찬을 다시 쳐다보고 밝게 웃었다. 봐봐, 가람이 형아 이름도 쓸 수 있어! 은찬이 연습장에 적힌 제 이름을 바라보았다. '주은찬'. 선을 찍찍 그은 듯 한없이 삐뚤어진 글씨였지만 그것조차도 귀여워 보였다.

 

 

"우와~ 진짜 잘 쓰네, 가람이!"

 

 

은찬이 부드럽게 웃으며 가람을 칭찬했다. 은찬의 칭찬에 마냥 신난 가람이 연습장과 펜을 가지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가람이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은찬에게 손짓했다. 형아도 나처럼 해. 응? 뭐 하려고? 가람이 은찬의 말에 대답했다. 그림 그릴거야. 그리고 제 연습장을 한장 북 찢은 가람이 종이와 펜을 넘겨주었다. 형아도 그려! 은찬이 얼떨떨하게 가람에게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어느 새 가람은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으음, 뭘 그려야 하나? 은찬이 잠시 고민했다. 딱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라서 뭘 그려야될지 모르겠다. 은찬은 그냥 졸라맨 몇 개를 그리기로 했다. 잠시 그러던 중에 가람이 도도도 일어나 은찬의 침대위에 있는 이불을 끌어내렸다. 어, 어.....? 뭐하는 걸까 하고 쳐다보는 사이에 침대에서 떨어져내린 이불속에 가람이 폭 묻히고 말았다. 헉, 가람아! 은찬이 재빨리 다가가 이불에 쌓인 가람을 빼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쏙 빠져나온 가람이 다시 옷을 탁탁 털더니 애벌레처럼 이불을 똘똘 말고 재차 엎드렸다. 나아, 이렇게 들어가서 그리고 싶었어!

 

 

"다시 그릴 거야."

 

 

가람이 펜을 쥐어들고 연습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가람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은찬이 피식 웃으며 가람의 옆에 엎드렸다. 슥삭슥삭, 뭔가 대단히 열성적으로 그리고 있는듯한 소리다. 은찬이 저렴하게 졸라맨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옆자리에 있는 가람을 쳐다보았다. 잔뜩 집중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건 알겠지만 뭘 그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궁금해진 은찬이 힐끗 보려고 했으나 필사적으로 막는 가람의 행동 덕분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람아, 뭐 그리는건지 형아에게 보여주면 안 돼?"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은찬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애들은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그렇게 은찬에게 말해놓고서 자신도 마음에 조금 걸렸는지 가람이 은찬을 쳐다보았다. 쳐진 눈썹을 하고 삐진 표정으로 있는 주은찬. 가람이 툭 말했다. 이따가, 이따가 보여줄 거야. 지금은 안 돼에. 아구, 귀여운 것. 늘어진 말꼬리에 금세 마음이 풀린 은찬이 가람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잠시 후에, 가람이 은찬을 불렀다.

자, 여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림에 은찬이 그걸 쳐다보았다. 아까 써놓았던 주은찬이라는 글씨 옆에 그려져있는 한 사람. 삐죽삐죽한 머리, 히 하고 바보같이 웃는 얼굴, 그리고 입가에 있는 점. 그옆에는 하트가 작게 두개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그린 것 같았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이거 형아 그린 거야?"

"응!"

 

 

가람이 은찬의 등 위로 폴짝 올라탔다. 형아 너무 좋아!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에 은찬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종이 안에 있는 게 아무리봐도 사람의 형상과는 거리가 좀 멀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가람이가 자신을 위해 그려준건데 말이다. 게다가 옆에 있는 조그만 하트들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은찬이 등에 올라타있는 가람을 업고 일어섰다. 우아아! 갑작스럽게 높아진 시야에 가람이 소리를 질렀다. 높아, 높아! 저기 앞으로 전진! 가람이 은찬에게 찰싹 매달리며 요구했다. 그래그래, 가자. 은찬이 가람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저를 잘 따라주고, 꼬박꼬박 부르는 그 '형아'라는 단어가 듣기에 너무 좋았다. 은찬은 가람이 나중에 커서도 분명히 귀여울 것이라는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보이는 이 말랑거리는 얼굴이, 들리는 칭얼거림이 얼마나 듣기 좋은가.

 

그래서, 은찬은 나중에 가람이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 써댈거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가람이 인상을 팍 쓴 채 시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아직까지 안 나오는 거람. 주위는 슬슬 어둑어둑해지고 쌀쌀해지고 있었다. 아, 추워. 가람이 옷깃을 좀 더 여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좀 더 두껍게 입고 나오는 건데. 청가람이 서 있는 곳은 큰 회사의 건물 앞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찬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앞. 가람이 핸드폰을 꺼내서 은찬에게 전화하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예고없이 찾아온 건데, 그걸 애써서 망칠 필요는 없지. 그런데 좀 춥긴 한데... 가람이 회사 로비를 바라보았다. 비어있는 의자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안에는 따뜻할 텐데, 들어가서 기다릴까? 가람이 짧게 고민했다. 아냐, 그냥 여기 서 있.... 하지만 그 다음에 바로 휘우우웅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가람이 깨끗하게 마음을 돌렸다.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아, 대체 언제 나오는 거지. 가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며 생각했다. 시간은 곧 정각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시간도 이미 지난 터라 간간히 내려오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람이 속으로 은찬을 욕했다. 아 진짜 이 아저씨 늦게 나오네. 덕분에 저녁도 건너뛰게 되어 배가 고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기다려야만 하는 이 상황이 심심했다. 가람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주은찬 언제 내려와 나 로비에 있는데' 가람이 카톡메세지를 탁탁 치고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지웠다. 졸려, 가람이 하품을 한 번 했다. 지루하니까 졸음이 온다. 가람의 눈이 느리게 깜박이더니, 곧이어 스르르 감겼다.

 

 

 

 

 

- 생, 학생?

 

"학생!"

"으으음....?"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가람이 눈을 떴다. 경비원이 저를 흔들고 있었다. 학생, 여기서 왜 이렇게 혼자 자고 있어? 아까부터 있지 않았어?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졌다. 추릅, 가람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침을 재빨리 닦아냈다. 으음, 몇 시지. 아까 간간히 로비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다 가고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람이 저를 바라보는 경비원의 어깨 너머로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각이 열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그건 자신이 두시간쯤 잠들어왔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고, 은찬을 기다리기 시작한 지 네시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 가람이 자느라 둔해진 머리를 돌렸다. 열시, 열시.... 어, 어! 가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은찬...!"

"?"

 

 

갑작스럽게 일어난 가람의 모습에 경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람이 열심히 생각했다. 주은찬이 이때까지 안 나왔나? 아니 아직까지 계속 있는 거야? 설마,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고 집으로 갔나? 앗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은찬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온 거라, 모르고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아씨, 진작 연락을 할 걸 그랬나. 가람이 후회했다. 명확한 말을 하지 않는 가람의 모습에 경비원이 답답했던 건지 조금전보다 더 크게 물었다. 학생,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누구 기다리는지, 말을 좀 해줘야지 원! 띵, 멀리서 엘레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열리고 익숙한 붉은 머리칼이 나타났다. 피곤한 얼굴로 한 손에 가방을 고쳐들던 은찬이 옥신각신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한 사람의 모습에 은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람아?"

"....는, 응?"

 

 

가람아! 은찬이 후닥닥 달려오며 가람의 앞에 멈춰 섰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가람은 대답 대신 눈을 찡그릴 뿐이었다. 음? 아는 사이인가 보오? 경비원이 은찬에게 물었다. 네, 제 동생이에요. 은찬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가람이 다시한번 얼굴을 구겼다. 경비원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랬나, 난 자네 동생인 줄 몰랐지. 흠, 꽤 할일이 많았나 보지? 은찬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뭘요, 흔히 있는 일인걸요. 항상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동생이랑 나가볼게요. 은찬이 깍듯하게 인사하고서는 가람을 데리고 나갔다.

 

 

부르릉, 시동소리가 날 때까지 줄곧 가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가람의 안전벨트를 매준 은찬이 가람의 눈치를 살폈다.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설마 가람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자신이 나온 시간을 가늠하면 최소한 세 시간은 기다린 것 같은데, 그럼 저녁밥도 안 먹은 걸까? 아 어떡하지. 은찬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람아? 은찬이 가람을 불렀다. 가람은 절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람아.

 

 

"시끄러워, 주은찬. 빨리 나가기나 해."

 

 

날선 가람의 목소리에 은찬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많이 기다렸나 보다. 은찬이 말없이 차를 뺐다. 회사 주차장을 나간 은찬이 사이드미러로 지나가는 차들를 보다가 여유롭게 도로로 끼어들었다. 흘끔, 다시 가람의 눈치를 보던 은찬이 입을 열었다. 으, 난 네가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지. 연락이라도 하질 그랬어, 그러면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몇 시간동안이나 기다린 거야? 세시간? 가람이 시크하게 턱을 괴곤 대답했다.

 

 

"네시간."

"네시가안?! 저녁은?"

"당연히 못 먹었지. 바보같이, 그런 생각도 못 해?"

 

 

가람이 톡 쐈다. 어떡하지 진짜. 은찬은 조금 초조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애를 굶긴 꼴이 되었다. 성장긴데 굶겨버리다니....저러다가 만일 키가 안 크면 내 책임인가. 은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먹으러 갈까? 뭐 먹고싶어? 사줄게. 가람이 여전히 은찬을 외면한 채 대답했다. 됐어, 이미 한참 지나서 배고프지도 않아.

 

신호등에 걸려 잠시 차를 멈춘 은찬이 가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청가람이 절 외면하고 있을까. 물론 예상보다 많이 기다려서 화가 났긴 했겠지만, 가람의 성격을 봤을 때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기다린 것이니 금세 화를 풀 것이었다. 이렇게 오래까지 제 얼굴을 한 번도 안 본다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가람아. 은찬이 팔을 뻗어 가람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왜 이렇게 화났어, 왜 화난 거야? 가람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파란불이야. 가람의 말에 신호등을 확인한 은찬이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은 다시 침묵.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십분, 십오분.... 그러다가 가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생이라고?

 

 

"내가 왜 네 동생이야?"

 

 

가람이 정면을 노려봤다. 경비원이 그냥 나이 차 많은 형제로 봤을 거 아냐. 가람이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짜증나. 어? 은찬이 멍하니 생각했다. 풋,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 은찬이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가람이 은찬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아니, 그냥. 은찬이 핸들을 돌렸다. 어두운 도로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은찬이 눈꼬리를 휘었다. 어떻게 말해주면 좋았겠어? 사랑스러운 동생이라고? 아니면. 은찬이 가람에게 웃어보였다.

 

 

"내 어린 연인이라고 할 걸 그랬나?"

 

 

가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은찬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덧붙였다. 그럴 수는 없었는걸, 그러면 난 세상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이 되는걸? 그냥 무난하게 동생이라고 둘러대는 게 편할 것 같아서 그랬어. 마음에 안 들었다면 미안. 은찬이 짧게 사과했다. 치,치사한 주은찬 같으니라고. 가람이 주먹을 꽉 쥐며 툴툴거렸다. 짜증나 진짜. 그렇지만 조금전 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다. 은찬이 힐끔 쳐다보다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진짜 저녁 안 먹어도 괜찮아? 가람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때 간 곳으로 가. 거기 맛있었어."

"응, 알았어."

 

 

은찬이 차선을 변경했다. 가람이 다시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훌륭한 파렴치한 아저씨야, 주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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