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찬가람

[찬가람] 스물두살의 봄

"람이 자?"


저를 톡톡 치곤 물어오는 목소리에 은찬은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 엎드린 채 곤히 자고 있는 청가람을 확인했다. 어떠한 미동도 없이 아주 잘 자고 있다. 은찬이 친구에게 대답했다. 어, 아까부터 졸리다고 그러더니 잔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뭐. 같이 매점가서 맛있는 것좀 사주려고 했더니만. 은찬이 그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고 손가락 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랑 같이 가자. 먹을 거 사줘. 여건을 놓치지 않고 덥석 물어오는 주은찬의 목소리에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쯧 하고 찼다.


"니가 람이냐? 니 돈으로 사먹어."

"치사한 놈..."

은찬이 입을 비죽였다. 친구가 하품을 크게 하고서는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어디 가려는 걸까, 은찬이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고개를 핸드폰으로 돌렸다. 그 사이에 타이밍을 놓쳐서 이미 게임판은 끝나 있었다. 은찬이 시계를 바라보고 남은 쉬는시간을 가늠했다. 한판정도는 더 할 수 있겠지. 주은찬이 다시 핸드폰을 시작하기 전에, 곤히 잠들어있는 청가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꺼풀 뒤에 감춰진 붉고 동그란 큰 눈, 남자답지 않게 고운 옆선, 미약하게 분홍기가 도는 잡티없이 깨끗한 피부. 남고의 아이돌, 청가람.

남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남고에는 아이돌이 한명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여자가 없으니까, 그 대신으로 학교 안에서 눈요기를 할 대상같은 걸로. 주은찬이 속한 그런 남고의 아이돌의 자리에는 가람이 올라와 있었다. 새침한 성격, 웬만한 여학생들 외모 뺨치게 뛰어난 외모. 남학생들은 그런 청가람을 마치 정말 공주님 대하듯 취급을 취급을 했다. 발렌타이데이다, 빼빼로데이다 하는 날에 청가람의 자리에는 수북한 선물들이 쌓여있기 마련이었다. 청가람의 생일이면 한술 더 뜬다. 하루 온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청가람이 눈에 띄면 선물과 축하 인사들을 건네기 바빴다. 청가람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했기에 수줍은 얼굴로 남학생이 축하 인사를 건네더라도 돌아오는 것은 찌푸려진 얼굴밖에 없었지만, 하여튼. 도도하고 새침하고 귀여우며 앙칼스러운 공주님. 람이, 는 청가람의 공식 애칭이었다.

은찬이 입에서 람이,라고 말을 굴리다가 도로 청가람이라고 고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청가람이라는 말이 백 번 더 나은 것 같았다. 좀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애들은 람이라고 잘도 부르는 것 같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하여튼 그렇고. 은찬이 다시 가람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형의 조건들을 찬찬히 대입해보자면 가람은 은찬의 이상형에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거의'인 이유는 딱 하나, 키가 조건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가람은 키가 168cm로 남고생 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아마 청가람의 키가 좀 더 컸더라면 주은찬 자신도 금방 전 실실거리던 제 친구처럼 청가람에게 목을 메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서 다행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람이 으음 하며 몸을 뒤척였다.

 

 


 

스물두 살의 봄

 


1.

백건, 현우, 주은찬, 청가람, 이들은 꽤나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4인방은 고등학교때 처음 만났다. 가람의 키는 168로 조금 작은 편이었고, 주은찬은 173, 백건은 176, 현우는 175였다. 그래서 네 명이 나란히 하교를 하는 일이 있을 때면 가람은 마치 남고생들 사이에 낀 남중생처럼 보였다. 청가람은 종종 목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곤 했다. 너네들 왜이렇게 키가 크냐고, 배려따위 없는 거라며 짜증을 냈다. 솔직히 그건 너한테 잘못이 있는 것 아닙니까? 현우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너가 비정상적으로 키가 작은 거에요. 가람이 현우의 다리를 퍽 쳤다. 죽을래? 현우가 덩치에 맞지 않게 찡찡거렸다. 아파요. 백건이 비웃으며 현우의 말에 동참했다. 맨날 청가람을 보며 언제 자랄거냐고 안보인다고 구박했다. 가람은 그런 말을 정말 싫어했다. 그리고 항상 자신도 곧 자랄거라며, 이중에서 가장 크게 자라주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입버릇처럼 키 빨리 커서 졸업할 때는 이 학교에서 가장 장신이 되어 졸업하겠다는 가람의 말을 듣고 친구 한 명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가람이 눈썹을 찌푸렸다. 친구가 저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람이는 키가 작아서 귀여운 맛인데, 크면 그런 매력이 떨어질 것 아니야. 가람이 입을 벌렸다. 귀엽다고? 어이가 없네. 가람이 주먹으로 왼팔을 가격했다. 악, 친구가 왼팔을 감쌌다. 아이돌인데 이미지같은거 신경 안 써? 가람이 팔짱을 꼈다. 누가 하고 싶댔어? 니네들이 맘대로 날 올리고 찬양하는 거잖아. 그리고 가람이 흥 하고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성질 더러워도 좋아하잖아."



가람이 당당하게 웃어보였다. 빛나는 미소에 주변에 모여있던 남자애 몇 명의 입이 헤 하고 멍청하게 벌어졌다. 은찬이 저거저거 또 저러지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주은찬의 웃음소리에 가람이 은찬에게로 눈동자를 돌렸다. 뭐야, 비웃는 거야? 가람의 날 선 목소리에 은찬이 어깨를 들썩여보였다. 응, 맞아. 은찬의 대답에 가람이 다리로 은찬의 무릎을 걷어찼다. 저런 폭력쟁이 같으니. 은찬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입 안으로 삼켰다. 청가람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지금 이 말을 꺼냈다가는 매타작을 맞을 것이 분명했다. 가람이 혼잣말 격으로 중얼거렸다. 목말라. 그 말에 바로 한 명이 반응을 했다. 목말라? 뭐 사다줄까?

"탄산음료 말고. 아무거나."



가람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한 명이 바로 사라졌다. 그렇게 한 명을 자연스럽게 심부름 보낸 가람은 다른 한 명과 심심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피씨방 갈래? 피씨방? 가람의 말투가 조금 떨떠름했다. 버스 태워줄게. 구슬리는 말에 가람의 얼굴이 솔깃해졌다. 저런 호구새끼들. 은찬이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래, 뭐 인생에 한번쯤은 호구 짓을 해볼수도 있지. 그러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역시 공주님 아니랄까봐, 또 둘러싸여 있네."

"공주님 소리 하지 말랬지."

백건. 가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어때, 사실이잖아. 백건이 의자를 빼고 풀썩 주저앉았다. 은찬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층이 달라 반으로 돌아가려면 시간 많이 걸리는 거 아니었나, 이 녀석. 은찬이 입을 열어 궁금한 점을 물었다. 너, 반 안가? 백건이 대답했다. 종 치고 올라가도 안 늦어. 은찬이 무신경하게 끄덕거렸다. 뭐 선생한데 야단맞는 것은 백건일테지, 자신이 아니니까. 그 사이에 가람의 심부름을 하러 갔던 남학생이 돌아왔다. 고마워. 이럴때만은 상냥한 척 하는 청가람이 낼름 손에서 캔을 받아들었다. 가람이 몇 모금 목을 축이고 캔을 내려놓았다. 백건이 그 캔을 자연스럽게 훔쳐가 벌컥 들이켰다. 주변에서 아이돌의 캔을 낚아챈 평민 백건에 대한 야유가 쏟아졌다. 그 때,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백건이 밍기적밍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 청소끝날 때까지 기다려. 핸드폰 배터리 다 떨어져서 연락 못 받아. 위로 올라와라. 제 할말을 다한 백건이 제 반을 향해 사라졌다.

"쟤 저 말 하려고 온 거야?"

가람이 의자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으며 은찬에게 물었다. 은찬이 턱을 괴고 대답했다. 몰라? 그런 건가? 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정말 도움 안 된다. 은찬이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 기다릴까?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선생이 문을 열고 교탁 앞으로 걸어와 섰다. 가람이 되물었다. 어쩔래? 장난스러운 웃음이 청가람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보면서 재차 생각했다. 청가람은 제 취향에 완벽히 들어맞았다, 키를 제외하고.


​2.

시간은 쉬지않고 흘러갔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마지막 기말고사도 끝나고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수능도 끝났겠다, 담임도 제지를 하지 않아 방황하는 학생들은 잉여롭게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교실안은 부산스러웠다. 충전기 있는 사람? 누군가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가람은 담요를 덮은 채 히터 바로 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졸리다. 어제 밤새서 게임을 했더니 상당히 피곤했다. 하지만 쉽사리 잘 수 없는 것은 부산스러운 주변 때문이었다. 옆에 앉은 주은찬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가람의 눈꺼풀을 발견하고 물어왔다.

"잘거야?"

"아니....시끄러워서 좀."


그 말에 은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말 한마디 없이 무언가에 뚫어져라 집중하는 애들도 보였고, 낄낄거리는 한 무리들, 음악소리를 전체적으로 시끄럽게 틀어놓은 애도 한 명 보였다. 그래, 자기에는 좀 부적합한 것 같긴 하네. 어쩔 수 없지. 가람이 그냥 턱을 괴고 엎드렸다. 은찬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은찬이 무언가를 찾는 동안, 청가람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몇 년정도 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게 하나 남아있었다. 

내년 1월 초에 자신은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로 떠나게 된다. 회사에서 그 쪽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가람에게는 수능을 어떻게 봤든 간에 상관이 그렇게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년 2월에 있는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이미 담임선생님에게는 말했지만, 그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과 제일 친한 3인방에게도. 귀찮은데, 그냥 말하지 말고 조용히 갈까.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때,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귀를 파고들었다.

가람이 흠칫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귀에 꽂힌 무언가를 빼냈다. 주황색의 말랑말랑한 귀마개.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 다른 쪽 귀마개도 내밀어주며 손짓했다. 시끄러우니까, 그거 하고 자라고. 가람이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잘 쓸게. 가람이 양쪽 귀에다 착용하고서는 엎드렸다.


"람이 잔대?"

가람이 엎드리는 것을 발견한 한 남자애가 부산스러운 소리를 뚫고 날아왔다. 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은찬의 대답에 남학생이 손뼉을 짝짝 쳐서 집중시켰다. 람이 잔대, 조금만 조용히 하자. 남학생들의 시선이 저 쪽에서 잠들어있는 청가람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소리를 줄였다. 완전히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확연히 조용해진 분위기에 은찬이 새삼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청가람의 힘은 고등학교 시절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까지도 막강했다. 그리고 그 힘을 아마도 유지시켜주는 것은 여전히 귀엽고 작은 청가람의 겉모습 탓이 아닐까, 하고 은찬이 가만히 생각했다. 원래 남자애들은 키가 쑥쑥 자란다. 마치 콩나물처럼 말이다. 백건과 현우는 180대 중후반이 되어 있었고, 자신도 훌쩍 자라서 181이 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청가람의 키는 170이었다. 그리고 남자애들의 외모도 변한다.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벌써 완전한 성인의 티를 풍기는 애들도 여럿 있었다. 그에 반해 청가람은 아직도 보송보송한 솜털과 앳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청가람이 과연 변하기는 할까. 은찬은 문득 생각했다. 아닐 것 같았다.

3.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세 명은 걸음을 재촉하며 북적북적한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되게 많네, 놀러가는 건가? 저도 비행기 한번 타보고 싶습니다. 현우의 말에 은찬이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너 지금까지 비행기 한번도 안 타봤어?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백건과 은찬이 재빠르게 눈빛 교환을 시전했다. 은찬이 자연스럽게 밑밥을 깔았다. 혹시 나중에 탈 일 있을지도 모르니까, 비행기 매너 알려줄게.


"비행기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해."

현우가 은찬을 바라보았다. 왜요? 은찬이 당연한 말을 왜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그야, 비싼 비행기에 흙 묻히면 안 되니까. 이번에는 백건이 낚싯줄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어. 비행기에 화장실이 있는데, 그거 진짜 위험한 곳이야. 왜죠? 현우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 백건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밑바닥이 없거든, 그러니까 잘못하면 땅으로 떨어져."

"....거짓말이죠?"

현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해 보였다. 백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야. 나 그래서 예전에 화장실 급했는데 가지도 못하고 목적지까지 계속 참았잖아. 그 말에 현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비행기가 그렇게 무서운 거였다니....절대 타지 말아야겠군요. 현우의 중얼거림에 백건과 은찬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은찬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 우리 지금 에스컬레이터로 가고 있어. 곧 가.

 

백건, 현우, 은찬이 공항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외국으로 떠나는 청가람의 마지막을 보내주기 위한 것. 귀찮고 수고스러웠지만 이후로는 오래 못 볼 것을 아는 터라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아빠가 인도네시아로 발령 나서, 가족 전체가 가기로 했어. 아마 대학도 그쪽에서 다닐 거야. 방학식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청가람이 꺼낸 말이었다. 당혹스러운 말에 세 명이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청가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섭섭하네요, 이렇게 늦게 알려주다니요. 떠날때까지 별로 안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은찬이 동조했다. 가람이 받아쳤다. 이거 말해주는 것도 너네 3명뿐이야. 영광스럽게 생각해.

 

저 쪽에서 큰 캐리어를 옆에 둔 채 서 있는 청가람이 눈에 들어왔다. 청가람! 백건이 소리쳤다. 가람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가람의 앞까지 걸어간 세 명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가네.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은? 저 안쪽에 이미 들어가 있어. 너네가 너무 늦게 와서 하마터면 못 보고 들어갈 뻔 했다. 백건이 큰 손으로 가람의 머리를 헝클었다. 임마, 형 보고 싶다고 질질 짜지 마라. 누가 형이야? 그리고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거든. 가람이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가람이 피식 웃었다. 은찬은 웃으며 가람을 따스하게 한 번 안아주었다. 부끄럽게 왜 저러냐. 백건이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제 할말을 했다. 

"시간나면 언제 한국 들어와."

"그래."

은찬이 가람을 안았던 팔을 풀었다. 현우는 가람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마 보고싶을 거에요. 현우까지 인사를 받고 나서, 가람은 조금 떨어진 채로 세 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흝었다. 그러다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야겠다. 가람이 캐리어를 잡았다. 잘 가라. 백건이 손을 흔들었다. 가람이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들어가기 바로 직전, 마지막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가람은 은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문 밖으로 사라지는 갈색 머리가 흔들거렸다.

 

4.

은찬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내일 모레 시간 되지? 은찬이 짧게 대답을 보냈다. 그래, 그럼 거기서 봐. 지각하지 마라. 은찬이 액정 화면을 껐다. 카톡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청가람이 한국으로 잠시 돌아오니, 예전처럼 네 명이 완전히 모여보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성인이니, 만나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는 말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거 좋지, 은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학을 와서 배운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꼽자면 술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에,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도 포함하면 편하고 좋지. 은찬이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모임의 주인공일 청가람을 떠올렸다.

청가람은 어떻게 변했을까? 은찬이 예전의 일을 회상했다. 가람의 마지막 모습은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이었는데. 근데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람이' 일것 같달까. 키도 모습도 그대로 일 것 같고. 조금 기분이 들뜨기 시작하는 게 착각만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제 예상을 깨고 급격하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면 좀 웃길 것 같긴 했다. 가서 다른 풍토에 적응하느라...달라졌을까? 은찬은 청가람이 많이 달라지지 않기를 바랬다.

"어."


다시 이어진 카톡음에 은찬이 생각속에서 깨어났다. 여자친구에게서였다. 내일 모레 시간 되냐고, 만나서 수족관이나 갈래? 하는 내용이었다.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는 사귄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은찬은 사실 현 여자친구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여자친구가 먼저 고백을 하고, 자신도 오는 여자 가는 여자 안 막기에 받아준 것 뿐이었다. 그냥 장식용이랄까.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자신이 사귀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 쪽이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아무튼 그건 그거고, 여자친구의 제안에 은찬은 손끝을 두드려 답문을 보냈다. 이미 그 날은 청가람과 오랜만에 만나기로 선약이 되있던 터라 거절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미안, 나 그때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있어서. 여자친구의 카톡이 떴다. 친구가 나보다 중요해? 카톡에서부터 약간 날선 말투가 묻어나왔다. 삐지면 골치아파지는데. 은찬이 손을 움직였다. 외국에 나가있다가 오랜만에 들어오는 어릴때부터 친한 친구라. 이해해주면 안 돼? 은찬이 말을 덧붙였다.

[ 앞으로 언제 만날지도 기약없는 그런 친구여서. ]

그 말에 더 야박하게 굴면 속좁은 여자친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건지 한 발짝 물러났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같이 가자. 그때는 안된다고 하면 안 돼, 알았지? 은찬이 대충 보냈다. 응, 알았어. 은찬이 핸드폰을 다시 껐다. 피곤했다, 여자친구라는 것은. 차라리 그냥 헤어질까. 은찬이 고민했다. 그것을 말하는 것도 귀찮다. 차라리 저 쪽이 먼저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지도.



캠퍼스 곳곳에서는 벚꽃이 휘날렸다. 4월이었다. 아직 중간고사기간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풋풋한 신입생들은 좋아하 하며 구석구석을 구경다녔다. 썸을 타고 있는 남녀들은 수줍어하며 벚꽃을 구경하고.

지만, 은찬은 그저 기숙사 방에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봄은 무슨 봄, 귀찮기만 하지....졸리고. 춘곤증인가봐. 은찬이 졸린 눈을 뜨고 시간을 바라보았다. 11시 8분. 주말인데, 조금 더 잘까. 그런데 조금 있다 나가야되는데, 혹시 너무 자다가 시간을 제대로 못 맞추면 어떡하지. 은찬이 이불안에 몸을 밍기적거리며 갈등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오래 자겠어? 은찬은 조금만 더 자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까지 오래 잤다.

주은찬이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오후 4시 반을 훌쩍 넘겨 있었다. 미치겠네. 은찬이 중얼거렸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은찬은 이불을 박차고 화장실로 급히 뛰쳐들어갔다. 하나도 안 씻었는데, 큰일 났다. 솔직히 그냥 친구들끼리 만나는 거라 안 씻어도 그닥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었으나, 제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니었기에 씻어야 할 것 같았다. 쪼금 늦는다고 죽이겠어? 은찬이 옷을 챙겨입으며 시간을 바라보았다. 다섯시 반. 아슬아슬하다. 은찬이 기숙사 방을 쾅 닫고 엘레베이터를 탔다. 약속시간은 여섯시 반이었다. 은찬이 핸드폰을 켜고 카톡을 보냈다. 미안, 나 조금 늦을지도 몰라. 그리고 한동안 카톡방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옆에 떠있는 숫자는 3이었다. 아직 아무도 안 읽었군. 잘된 건가. 은찬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엘레베이터를 탔다.


5.

"정말 죽이고 싶다.."


가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관이었다. 약속장소에 가 보니 현우밖에 없어서 나머지 놈들은 어딨냐고 물었다니 안 왔다고 했다. 내가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쓴거다 이거지. 가람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현우는 현란하게 카톡을 치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뭐래요? 5분 있으면 온대. 가람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일단 지각한 두 놈에 대한 응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가람은 앞에 앉은 현우를 바라보았다. 넌 변한게 없네. 가람이 내뱉었다. 그렇습니까? 좋네요. 하지만 너는 많이 바뀌었네요.

"그렇지?"

가람이 싱긋 웃었다. 현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분위기도 조금 바뀐 거 같아요. 그 사이에 백건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가람을 본 백건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 청가람 맞아?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신기하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봐. 가람이 순순히 일어났다. 오오, 백건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전의 존마니에서 탈피한 걸 축하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보다 작네. 가람이 못들은 척을 했다. 세 사람이 테이블에 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배고픈데. 먼저 시킬까? 그러죠 뭐. 세 사람이 사이좋게 메뉴판을 열었다. 그리고 음식 몇 가지를 시키고 소주 두 병을 시켰다. 상이 차려지는 동안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거기 어때? 더워. 가람이 짧게 대답했다. 해물탕이 가스불 위에 올려졌다. 며칠동안 있는건데요? 현우가 물어왔다. 가람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3주.

"3주? 생각보다 오래 있네."

그동안 뭐 하려고?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몰라, 잘 생각 안해봤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현우가 픽 웃었다. 계획성 없네요. 심심하면 놀아줄 순 있으니 연락해요. 적선이라도 해주겠다는 듯한 태도에 가람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넌 필요 없어. 가람의 단호한 말에 현우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그 때,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세 명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늦어서 미안."

"별로 미안한 얼굴이 아닌데?"

구박하는 말을 들으며 은찬이 자리에 착석했다. ​가람이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주은찬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까지 지각한 거야? 은찬은 더운지 겉옷을 벗고는 고개를 들어 가람의 말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입을 연 순간 은찬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주은찬의 표정을 본 백건이 낄낄거렸다. 표정 진짜 멍청해보인다, 주은찬. 현우가 받아쳤다. 아까 너도 저랬습니다. 백건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남이니까 괜찮아. 하지만 은찬에게 그런 소리들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청가람...? 몇 년만에 본 청가람의 모습은 기억속에서 예상하고 있던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다. 동그랗기만 했던 눈은 가늘어지고, 선도 조금 날카로워졌으며 풍겨지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예전 분위기가 귀엽고 앙칼졌다면...지금은 섹시하고 위험하달까.

"왜?"

"아니, 너무 바뀌어서.."

은찬이 간신히 대답했다.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떨릴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가람은 주은찬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마저도 섹시해보여 은찬이 넋을 잃은 채 가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쟤 왜 저러냐? 백건이 해물탕에서 홍합을 집어들며 핀잔을 주었다. 가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한테 반했나 봐. 현우가 웃어댔다. 정말 그런가봐요, 표정 진짜 웃긴데. 주은찬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세상에, 오랜만에 만난 청가람은 완벽하게 자신의 취향이 되어서 돌아왔다.



​6.

은찬은 만나서 저녁을 먹는 동안 가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런 주은찬이 웃기다는 듯 마주바라봤던 가람도 계속되는 은찬의 시선에 부담스러운 듯 눈을 피해서 백건과 현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 2병을 더 시켜 거의 각자 한 병씩 채운 네 사람이 장소를 옮기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은찬은 다시한번 놀랐다. 늘씬하게 뻗은 청가람의 다리, 비율좋은 몸매. 키는 자신과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현우도 그런 가람이 신기했던 건지 옷을 챙겨입으며 물었다. 지금 키 몇이에요?


"나? 179."

"왜 갑자기 큰 거냐? 성장기에는 크지도 않더니만."

궁금해 죽겠다는 백건의 어조에 가람이 생각을 하다가 툭 대답했다. 글쎄? 인도네시아 풍토가 내 키가 자라기에는 적합했나봐. 가람의 말에 현우가 웃었다. 무슨 식물이에요? 환경에 따라 자라고 안 자라고 하게. 가람이 눈을 흘겼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은찬은 가람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완벽한 이상형이 제 앞에서 말하고 움직이고 있는게 신기했다. 사람이 키 하나로 저렇게 바뀔 수가 있나? 은찬이 뚫어지게 가람을 바라보며 겉옷을 입었다. 미치겠네. 지금까지 한 번도 뛰지 않았던, 여자친구와 키스를 할 때도 뛰지 않았던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고 있었다.


내가 계산할게. 백건이 지갑을 열었다. 그래? 잘 먹었어. 자연스럽게 카드를 긁는 백건의 모습에 나머지는 좋아했다. 돈 굳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아홉시를 넘은 시각이라서 그런가. 가람이 콧잔등을 긁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가? 백건이 음, 하고 고민했다. 어디 들어갈래? 가람이 옆에서 걷는 주은찬에게 물었다. 은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가람이 친절하게 한 번 더 물어봐주었다.

"어디, 갈 거냐고."

"어....응?"

​"귀 막혔어?"

가람이 살짝 짜증을 냈다. 은찬이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저 표정도 답답해 보여서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 몰라. 가람이 앞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 크게 물었다. 니네들이 정해! 우리는 따라갈테니. 백건이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백건과 현우와는 달리 가람과 은찬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왜 이래, 정말. 어색한 기분에 가람이 목을 긁었다. 주은찬.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 좀 해봐. 은찬이 고개를 들어 가람을 바라보았다.

".....래?"

"뭐라고?"

가람이 눈썹을 찡그렸다. 홀린 듯한 시선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가람이 손을 들어 은찬의 이마를 짚었다. 너 어디 아파? 아까부터 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열은 없고. 가람의 손이 다시 거두어졌다. 떨어지는 가람의 손을, 은찬이 덥석 잡았다. 놀래라. 가람이 움찔하며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주은찬이 다시 한번 더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주변이 시끄러워 들리지 않았다. 가람이 인상을 썼다. 안 들려, 가람이 은찬에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청가람. 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왜.


"나랑 결혼할래?"

".....뭐?!"


가람은 잘못 들었나 해서 은찬을 바라보았지만 주은찬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가람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다는 얼굴로 한동안 은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야 너 개그맨해도 되겠다. 가람이 깔깔거리며 은찬의 팔을 때렸다. 가람이 여전히 웃음기를 단 얼굴로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백건, 주은찬 왜이렇게 웃겨졌어? 왜? 백건이 물어왔다. 앞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은찬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보냈다. 여자친구에게였다.

 

 

[ 우리 헤어지자. ]

 

 

은찬은 앞서가는 가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연달아 카톡을 보낸 은찬이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완벽한 이상형이 자신한테 다가왔다. 주은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람이, 그래, 청가람이다. 놓칠 수는 없지.

 

이미 스타트는 끊었겠다, 제한시간 내에 빨리 클리어를 하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