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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찬가람] Silver Rain

* 해머님 보상 글ㅠㅠ늦어서 죄송해욤...8ㅁ8

* 현백 성향 아주 약간 있습니다

 

 

 

후우. 가람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좀 피곤하군. 현 청룡이 맡고 있는 동쪽 지역에서 손볼게 많아서 시간이 늦어졌다. 원래 다음 대 사신에게로 사신 임무가 넘어간 이상은, 선대 청룡인 청가람이 도와주거나 끼어들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현 청룡이 저에게서 임무를 이어받은 지 3년밖에 안 되었기도 하고, 지상과 달리 하늘의 질서는 정교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람은 청룡의 부탁을 받아주었었다. 현 청룡과 같이 질서가 어긋난 곳을 보완하고, 제어가 안 되는 신수들을 아예 밑에다가 감금시켜놓고 하다보니 시간이 꽤나 많이 흘렀다. 

이제 일도 다 끝났고 하니까, 푹 쉴 수 있겠지. 그동안 못 봤던 얼굴들도 보고, 자유롭게 휴식도 취하고... 일단은 중앙 숲으로 가야겠다. 가람이 발걸음을 옮겨 저를 기다리고 있는 흰 이무기의 등에 올라탔다. 비늘을 쓰다듬으며 목적지를 말하자 이무기가 빠르게 하늘로 솟구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차게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는 가람의 얼굴에 웃음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거의 수직이었던 이무기의 몸이 어느 정도 수평을 이루자 가람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긴 갈색 머리가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리고 더불어 흔들리는 신비한 푸른색의 옷. 꽤 높이 올라온 탓에 밑의 광경은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얼마 후, 멀리서부터 중앙의 숲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뿐, 땅에 착지한 가람이 넓은 숲을 바라보았다. 넓디넓은 숲에서 언제 주은찬을 찾나, 하는 생각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왔지만 어차피 주은찬이 주로 가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 시간은 그다지 많이 안 걸릴 것이었다. 가람이 흥얼흥얼거리며 숲 안을 걸어다녔다. 금빛 새들이 살고 있는 구역에는 없었고, 오색 물들로 반짝이는 강가에도 은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겠지 뭐, 가람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연약한 풀잎들이 가람의 얇은 발목을 슬쩍 건드리고, 나뭇잎이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고. 은찬이 주로 가는 장소는 모두 다 돌아다녀봤는데 주은찬의 모습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있는 거야.."


슬슬 짜증이 올라올 타이밍이었다. 가람이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넘기면서 콧김을 푹 하고 내뿜었다. 여기에는 없는 건가? 다른 데에 있나? 아니면 중앙 숲에 있기는 한데, 주은찬이 주로 가지 않는 곳에 갔나. 가람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숨을 돌릴 겸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이, 매 한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와 가람의 옆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앉았다.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내린 가람이 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 바람소리가 섞여 어지러웠지만 그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집어낸 가람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이 숲 속에서 걸어나왔다. 백색의 머리카락.


"백건?"

가람이 중얼거렸다. 백건이 숲 안에다 대고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먹지는 마. 맛 없어, 뱉어내. 뭘 먹는다는 거야, 가람이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백호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면서 입에 뭔가를 문 채 수풀 사이로 걸어나왔다. 덜렁거리는 한 사람이 그 끝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이 새하얘진 채 백호입에 물려서 덜렁거리는 사람, 현우였다. 가람이 생각했다. 아, 호 식사가 현우였어? 그래 항상 쟤네들 보면서 언제쯤 백건이 현우 놈을 호에게 식사거리로 줄지 궁금하긴 했어.

호는 백건의 애완동물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지상 세계에 있는 백호들과 비교한다면 큰 오산이었다. 일단 몸집부터가 집채만했으니까 말이다. 주인인 백건의 성격을 꼭 닮아있었는데, 그러면서도 가끔 보면 그냥 거대한 고양이같다 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이제 좀 내려주세요, 공자..."

 

현우가 지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언제부터 물려다닌 건지는 몰라도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였다. 현우의 머리가 산발인데다가 옷도 마구 엉망이었고, 얼굴에 핏기도 싹 가셔서 마치 밀랍인형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우의 애원에 백건이 흠 하고 고민하는 척 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백건의 허락에 호가 현우를 떨궜다. 쿵. 공자아....현우가 바닥에 들러붙은 채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가람은 그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백건이 먼저 청가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 왔냐? 고개만 까닥이며 말하는 모습은 마치 누가 들으면 몇 시간만 일하다 온 뉘앙스다. 실상은 어리숙한 현 청룡 때문에 계획에도 없는 고된 일을 반 년정도 해서 죽을 것 같다만. 가람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이제는 산발이 된 머리를 푸르고 다시 묶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힘들었다고 두명에게 징징대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가람은 모든 말을 생략했다. 그리고 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흰 털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주은찬 못 봤어?"

"걔가 어디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거 아니냐?"


애인인데 타인인 자신들보다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란 말투로 말하는 백건의 말에 가람이 말을 이었다. 주은찬이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봤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 다른 곳에 있을 텐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걔가 원래 잘 싸돌아다니긴 하잖냐, 나도 통 모르겠는데. 백건의 말에 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도움은 안 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맥이 탁 하고 풀렸다. 그 때,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주작 공자를 왜 여기서 찾습니까?"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현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도로 가람에게 물었다. 응? 무슨 소리야? 가람이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야, 백건이 현우의 명치를 퍽 하고 쳤다. 조용히 해 병신아. 백건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렸다. 현우와 백건이 하는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눈치로 대충 무언가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가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힐끗, 하고 제 눈치를 보는 백건의 모습은 필시 무언가 구린 걸 봤다는 거다. 현우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왜요? 하고 멍청하게 백건에게 묻고 있었고 말이다. 아...짜증나게. 가람이 호를 쓰다듬던 손을 뗐다. 호가 가람의 눈치를 보며 슬슬 물러났다.


"뭐야, 뭘 숨기는 건데? 내가 알면 안되는 건가?"


날이 선 가람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다물어졌다. 야 어떡할 거야, 백건이 짜증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일부러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처음부터 못본 척 했는데 눈치없는 현우 새끼가 모든 일을 다 망쳐버렸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백건이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러는 사이에 재촉하는 가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걔 어딨어, 빨리 말해."

​이제는 '걔'로 격하된 가람의 말을 들으며 백건은 하는 수 없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주작궁. 제대로 말해. 보충 설명을 요구하는 가람의 말에 백건이 덧붙였다. 주작궁 옆에 딸려있는 숲에 있을 거야, 아마. 가람의 눈썹이 꿈틀댔다. 사신도 아닌 게 왜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현 주작이 초대라도 했대? 그 말에 반응하는 백건의 몸짓을 가람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넌 놀고 있었다 이거지. 가람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좋아, 거기로 가면 되지 뭐. 가람이 몸을 돌렸다.

"알려줘서 고맙다."

 

백건과 현우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는 가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주은찬.... 도망쳐.

 

 

Silver Rain

 

 



1.

이무기 등에 앉아 이동하는 내내 가람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중앙의 숲을 빠르게 지나고 높디높은 산들을 지나, 그리고 주작의 영토로. 가람이 주작궁의 숲 바로 앞에서 멈추곤 땅에 발을 내딛었다. 화려한 색의 꽃들이 가람을 반겼지만 가람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갑자기 내려온 가람의 모습에 주작궁의 사람들이 놀라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람은 숲 안으로 성큼성큼 들이섰다. 따스한 공기가 떠돌아다니고 싱그러운 수풀들이 청가람을 맞이하는 모습은 평화로웠지만, 폭풍전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마쯤 숲을 걷다보니 저편에서부터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이로구만?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 즐겁게 웃는 소리가 커져갔다.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목소리의 주인들. 그리고 가람이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래서-"


익숙한 목소리와 너무나도 익숙한 옆모습이 있었다. 가람이 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선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술잔을 받아들고 있는 꼴이란. 가람이 가만히 입을 열어 아까부터 절 따라오고 있던 매에게 중얼거렸다. 저거 봐. 주은찬, 진짜 재미있어 보이지? 가람의 목소리에서 살짝 웃음기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다르게 눈은 싹 가라앉아 있다. 매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가람의 기분이 급격하게 바닥을 친 것을 읽은 탓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주 재밌어 보이는데."


가람이 반복했다. 하지만 쿨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저 자식은 여자들을 옆에 끼고 즐겼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죽여버릴까. 안절부절 하며 가람의 주위만을 날아다니던 매가 눈치를 보는 듯 싶더니 마침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빠르게 은찬이 놀고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갈색 머리가 날갯짓에 후웅 하고 흩날렸다. 

청가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은찬이 선녀에게 받아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휘이익 하는 강렬한 바람소리와 함께 매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며 은찬의 손에 있던 술잔을 낚아챘다.

 

"어머나!"

 

선녀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낚아채진 술잔에서 술이 흘러 은찬의 손을 적셨다. 즐거운 술자리에 끼어든 불청객에 은찬이 눈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화난 은찬이 흐른 술을 대충 닦고는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매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감히 내껄 뺏다니. 저걸 그냥 구워버릴까, 하던 은찬은 눈에 들어온 한 인영에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청가람이 매에게서 지금 막 자신에게서 낚아챈 술잔을 받아들고 있었다. 아,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한 모금 마시고 목을 축인 가람이 술잔을 들고 은찬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마침내 은찬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가람이 입을 열었다. 맛있네, 술. 화내거나 타박하는 말 따위 없이 저게 다였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은찬이 가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가람아, 이게..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그게..."

"아, 나 때문에 그만 논다고 안 해도 돼. 난 괜찮으니까."



가람의 표정은 평온했다. 정말 괜찮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주은찬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은찬이 제 옆에 앉은 선녀를 밀치고 일어났다. 어느 새 흥겨운 음악소리와 깔깔거리던 목소리들은 싸악 사라진 채였다. 가람아, 청가람. 이게 말이지, 내가 안 오려고 했는데, 주작이... 은찬이 저 쪽에서 강물에 발을 담근 채 그대로 얼어있는 현대 주작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뻔뻔한 은찬의 발언에 봉변당한 어린 주작이 입을 떡 하고 벌렸지만, 가람이나 은찬이나 둘 중에 그 누구도 그녀의 표정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변명하려던 은찬은 들이닥치는 가람의 말에 묻혔다.

알아, 네 맘. 가람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안 놀고 싶었지만 억지로 끌려온 거라고? 다 알아. 원래 주작의 습성이 노는 거 좋아하잖아, 흥겨움을 좋아하고 오락거리도 좋아하고, 본성인데 뭐. 그렇지? 가람이 싱긋 웃었다. 이런 것도 이해 못할 정도로 속 좁지 않아.


"더 놀아. 난 갈 테니까."

"가람아.."

"그래, 매일 노는 게 얼마나 힘들겠니."


 

빈정거리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문장에서부터 충분히 까내리는 말이었다. 가람이 은찬의 손에 술잔을 쥐어주었다. 괜히 내가 분위기 망친 것 같아 민망하네. 가람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 것을, 은찬은 놓치지 않았다. 가람이 현 주작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 나도 같이 놀고 싶지만 지금은 좀 피곤해서.


"나중에나 불러 줘."

"..아니...가람 님..."

어린 주작이 입술을 떼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가람은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휭하니 뒤돌아섰다. 빠르게 사라지는 가람을 그 누구도 잡지 못했다. 점점 작아지는 가람의 뒷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은찬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아주 깔끔하게 망했다. 싸한 분위기가 감도는 주작궁의 숲이 을씨년스러웠다.


2.

은찬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래, 현 주작이 자신을 억지로 끌고간 것은 아니었다. 현 주작은 그다지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여자라서 남자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더 앞서 있는 것 같았고, 아니면 아직 사신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신나게 놀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현 주작은 술을 마시면서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느니 하늘나라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맨정신으로 보는 걸 좋아하는 쪽이었고, 특히나 주작궁에 딸려있는 숲에 있는 강에서 측근들과 물장난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정신연령이 어리다고 볼 수도 있고.

그에 비해 주은찬은 사신자리에서 물러난 상태라 너무나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물론 사신일 때 놀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보며 노는 것과 자유롭게 노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솔직히 청가람을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고, 백건이랑 현우 사이에는 별로 끼고 싶지 않았고, 신선 할배들이랑 노는 것도 지겹고, 오랜만에 주작궁을 가보고 싶었기도 해서 불청객 수준으로 자신이 놀러간 간 것일 뿐이었다. 아니, 불청객 까지는 아닌 것 같다. 전에 사신 일을 물려줄 때, 그녀가 심심하면 언제든지 주작궁에 놀러와도 좋다고 말 했었으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주작궁을 방문해서 낯익은 얼굴도 보고 -주작이었을 때는 좀 많이 귀찮았던 종자들이지만- 뭐가 잘 안 된다고 도움을 청하는 현 주작의 문제도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잘 풀어주고, 며칠동안 즐겁게 주작궁에서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잉여스러운 절 보고 할 거 없죠? 숲에 같이 갈래요? 하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냉큼 따라나섰던 것이다. 혹시나 청가람이 갑작스럽게 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반 년 전에 청룡을 좀 도와주겠다고 말한 가람은 예상했던 3개월보다 훨씬 더 일이 길어졌는지,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끝나냐 심심해 죽겠다 내가 거기 가서 네 얼굴 좀 보아도 되냐 하고 기별을 넣어도 묵묵부답이었던 청가람이었기에 아직도 일이 한창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며칠쯤 신나게 놀아도 별 탈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말 들이닥칠 줄이야... 게다가 가람이 보았던 저의 모습은 한창 예쁜 여자들과 놀던 때였던터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타이밍도 안 좋지.."


청가람이 더 놀아, 하고 말했지만 그 상태로 어떻게 재밌게 놀겠는가. 그리고 괜히 잘못없는 현 주작에세 잘못을 덮어씌워서 욕을 좀 먹었기도 했다.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냐고, 사랑싸움에 등 터지긴 싫다고 빨리 가서 어떻게 좀 하라고 열불을 내는 주작의 말도 있었고, 이런 건 빨리 끝낼수록 좋은 걸 알았기에 은찬은 가람이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뒤를 쫓았다. 그리고 가람이 향한 곳이 청룡궁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 청룡궁이야, 주작궁이 아닌 다른 궁은 막 들어가기 좀 꺼림칙한데, 하면서도 은찬은 자연스럽게 청룡궁 안으로 들어섰다. 사전에 말 없이 방문한 은찬의 모습에 청룡궁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지만 은찬은 설명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선대 청룡이었다고 해도 사신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상은 청가람도 함부로 청룡궁에 드나들 수 없다. 이 궁의 주인인 현 청룡에게 가 있을테지. 은찬이 계단을 올라가, 넓게 펼쳐져있는 복도를 한참동안이나 걸어 신수들이 새겨져있는 문 앞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들이닥친 불청객에 현 청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은찬이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 방 안에 청가람의 모습은 없었다. 은찬이 입을 열었다. 청가람, 어딨지? 은찬의 물음에 청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행동에 은찬이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확신에 찬 은찬의 말에 청룡이 눈을 깜박이다가 은찬의 앞으로 조금씩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게 얼마나 무례하고 배려없는 행동이란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지도 않고. 이럴 때는 혼자 있도록 두는게 더 나은데."

"시끄러워, 네가 끼어들 문제 아니야."

"게다가 힘을 많이 써서 피곤하시기도 할 텐데, 거기다가 기름을 부은 건 그쪽이잖아요."


피곤함을 무릎쓰고 보고 싶다고 찾아갔는데, 눈 앞에서 다른 사람이랑 재미나게 노는 연인의 모습을 보면 저 같아도 맥 풀릴 거 같고. 청룡이 은근히 은찬을 비난했다. 은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것쯤은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다. 가람이 오랫동안 힘든 일을 해서 피곤한 건 알고 있는데, 여기서 오해를 풀지 않으면 다시 가람이 저에게 다가올 때까지 시간이 배로 걸릴 것을 아니까. 가람에게 욕을 먹으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왔지만 새파랗게 어린 청룡 꼬맹이한테서 비난받을 생각까지 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낭비하는 것도 아깝다. 은찬이 하, 하고 숨을 파 쉬곤 짧게 내뱉었다.

 

"입 다물어."

은찬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은찬의 분위기에 청룡이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눈 앞에 서 있는 선대 주작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마냥 사람좋게 웃기만 하는 사람일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그런 성격이 아닌 것쯤은 예전에 알고 있었다. 바보같이 웃고, 바보같이 행동하다가도 수틀리면 표정을 싹 굳히고 강압적으로 나가는 주은찬의 모습은 아마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를것이리라.

조금 전까지 나불대던 청룡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자, 은찬은 저 쪽에 나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청가람이 저 문 너머에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얼어붙은 청룡따윈 내버려두고 은찬이 성큼성큼 구름이 새겨진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바람을 타고 익숙한 체향이 풍겨져왔다.

"가람아."


편한 자세로 창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 있던 가람이 은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피곤함과 원망과 짜증이 온통 뒤섞인 얼굴이었다.


3.

은찬이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가람의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지는 은찬의 모습을 보고서도 가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릎을 덮은 긴 천이 살짝 흘러내리자 손을 움직여 제대로 덮은 게 다였다. 어디 뭐라고 지껄이나 보자,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은찬은 가람에게서 두 발자국 정도를 남긴 채 멈추어 섰다. 가람아. 재차 불렀지만 청가람은 여전히 붉은색 눈동자만을 깜박였다. 이렇게 반응없는 청가람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짜증을 내고 틱틱거리는 가람의 모습이 훨씬 더 나은 듯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찾아오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가람아아. 은찬의 말이 늘어졌다. 가람이 은찬에게 두었던 시선을 다시 창 밖으로 돌렸다. 안돼, 거기 보지 말고 여기 봐. 다급해진 은찬이 약간 남은 가람과의 거리를 좁히며 양 손으로 가람의 얼굴을 붙잡고 절 향하게 했다.

"가람아, 여기 봐."

"....."

루비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은찬을 향해 깜박였다. 제 손을 쳐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자신을 완전히 피할 의향은 없어 보였다. 조금 마음을 놓은 은찬이 가람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손을 움직여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가람은 말 없이 은찬이 하는 행동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 없는 연인에 조바심이 났다. 가람아, 계속 말 안할 거야? 난 네 목소리 듣고 싶은데. 예쁜 목소리 듣고 싶은데.


"가람아, 화 풀어. 응?"

가까운 거리에서 청가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가. 힘든 일에 시달린 탓에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섞여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황홀할 정도로 좋았다. 은찬의 손끝이 가람의 입술을 매만졌다. 약간 거칠어진 입술이 느껴졌다. 그래도 좋았다. 튼 입술을 부드럽게 잡아물고, 목 뒤에 코를 묻고 깊숙히 청가람의 체향을 들이마쉬며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동안 못 봤던 아쉬움이 씻은 듯이 날아갈 텐데.

저를 달래는 주은찬의 목소리. 제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가락과. 가람아, 청가람. 제 이름을 달콤하게 부르는 듣기좋은 목소리도. 가람은 세세히 다 바라보고 있었다. 주은찬의 손이 가람의 뒷목을 감았다. 그리고 얼굴이 점차 가까워져올 때였다. 탁. 가람이 은찬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연한 거부에 은찬이 놀란 눈으로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넌 항상 그러지."

가람이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는, 그래, 주은찬이 여자들과 노는 걸 봐도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삐쳤을 뿐이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자신이 고생할 동안에 주은찬이 즐겁게 놀았다는 건 조금 배알이 꼴리긴 했지만 뭐 나이도 이만큼 먹을만큼 먹었고, 여자를 좋라하는 것은 주은찬의 취향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은찬의 행동을 보고 미친듯이 화가 났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쳐선 키스하려는 꼴이라니. 넌 날 뭘로 보는 거야?

"넌 나한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어. 알아? 항상 이렇게 흘러가잖아."

 


싸늘한 가람의 말에 은찬이 당황한 눈으로 가람을 쳐다보았다. 가람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하고 있었다. 가람이 주먹을 꽉 쥐며 은찬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말하는 이 순간도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나를 화나게 해. 


"사과도 없이 그저 달래주는 척 하면서 키스, 그리고 결국에는 몸을 섞고, 나는 어영부영하게 휘말려들어가고."

제대로 된 사과 한 번이 그렇게 힘들어? 그게 뭐가 힘들다고, 미안하다는 말 하나면 되는데, 왜 넌 못 해?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나 이해할 수 있어. 방금전까지도 난 네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받아주려고 그랬어. 그런데 왜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어? 나한테 사과하는 시간이 그렇게 아깝냐고. 넌 말이야,

가람이 이를 갈며 내뱉곤 열려진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은찬이 놀라 재빨리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높은데 아무리 청룡이라고 해도 저렇게 대책없이 뛰어내리면. 하지만 그런 걱정도 우습게 얼굴 바로 앞으로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갔다. 뭐야?! 은찬이 고개를 내밀어 방금 전 본 것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흰 새였다. 청가람은 거대한 새 위에 올라탄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넌 진짜 개자식이야.


청가람이 떠난 방에 혼자 남은 은찬의 귀에, 가람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4.


"그럴 줄 알았다."



백건의 첫마디였다. 그러길래 왜 그랬냐? 빈정거리는 백건의 말에 은찬은 아니까 그만둬..하고 꺼져가는 목소리를 했다. 청가람과 주은찬의 일은 할짓없는 선인들의 입들을 타고 며칠도 안 되어서 하늘나라 전체에 퍼져있었다. 가람이 사라진 직후 방 안으로 들어온 청룡이 말한 그럴 줄 알았어요, 를 기점으로 나머지 사신들에게 같은 소리를 들었으며, 매번 가는 곳 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싸다 라는 주구장창 들었기에 은찬은 이제 반응할 기력조차 잃어버렸다. 하아, 은찬이 고개를 꺾었다.

청가람이 제 앞에서 사라진 지 벌써 2주 째였다. 이렇게 넓은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청가람 하나를 빨리 찾아낼 수 있겠는가. 아니, 사실 주은찬쯤 되는 지위라면 며칠도 안 되어서 청가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는 쉬웠다. 주변에 찾아달라고 하면 들어줄 사람들이 밑에 쫙 깔려있었으니까. 하지만 단합이라도 한 듯이 모든 사람들은 은찬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는 동물들도 자신이 다가가서 도움을 청할치려면 슬슬 내빼고 있었다. 단체로 절 엿먹이고 있었다, 는 말이었다. 덕분에 속은 타들어가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 있는 건 두말할 것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좀 억울하잖아, 너네도 나랑 똑같은데. "

곰곰히 생각하다가 무슨 이유로 열이 뻗쳤는지 은찬이 고개를 도로 돌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너네도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 그러잖아. 그리고 싸우고 화해할 때도 그렇고. 은찬이 현우와 백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까놓고 말해서 나만 그래? 아니잖아. 싸우고 화해하는 패턴도 다 같은데 왜 청가람만 그래? 억울하다는 은찬의 말에 백건이 근질거리는 코를 한 번 긁고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 우리는 서로 대놓고 노니까? 내가 여자들이랑 놓면 현무 놈도 같이 여자 끼고 놀고, 쌍으로 날라리 짓 하는거지 뭐. 그러다가 재미없으면 같이 붙어먹고 그러고... 어차피 남은 시간은 상당히 많은데 어떻게 저 현무 새끼랑만 같이 놀아, 지겨워 죽을 일 있냐. 현우가 백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백건이 왜 뭐, 하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쳐다보았다. 백건의 행동에 현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싱겁긴. 백건이 중얼거리며 못다한 말을 이었다. 가끔은 쭉쭉빵빵한 여자들과 놀고 그런 게 인생인 거지. 상당히 자유분방한 발언이었다. 은찬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백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 푸욱.



"가람이랑 나도 너네들 사이 같으면 좀 좋아."

"성격 차이지 뭐."

"후...."


근데 너도 잘못한 거 있긴 하다. 우리는 그래도 사과는 하거든. 마음없는 사과긴 해도 사과는 하는데, 넌 진짜 사과한 적 있긴 하냐? 백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요, 저도 공자가 청룡 공자에게 사과하는 건 한번도 못 본거 같습니다. 은찬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내가 왜 사과를 안 해? 맨날 사과하거든? 백건이 곧바로 물었다. 진짜? 언제? 날아온 질문에 은찬이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속으로."

"지랄도 병이다."

신랄하게 욕을 한 백건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까 정말 기억속에 제대로 된 사과를 건넨 적이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미안하다고 말 한 기억조차 없으니, 이쯤이면 청가람이 여태껏 참고 넘겨준 게 대단할 지경이었다. 사실 은찬은 굳이 미안하다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사과의 의미를 담은 키스를 하면 다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은 했었어야 되지 않았나 싶었다.

은찬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백건이 생각에 잠긴 주은찬을 흘낏 바라보곤 다시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남의 연애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주은찬이 삽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즐거웠지만 이번 건은 어떻게 될지 약간 궁금하긴 했다. 바람이 머리를 헝클고 지나가자 백건이 아, 하는 추임새를 내뱉곤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까 사흘 후면 시작되겠네."

"뭐가요?"

"우기 말이야."

백건의 말에 현우가 오 그렇네요, 하고 대답했다.

하늘나라라고 해서 항상 화창한 건 아니다. 10년에 한 번씩, 하늘나라 전체에 3일동안 비가 내리는 시기가 있었다. 10년에 한 번, 단 3일씩만 비가 오면 지상세계는 아마 가뭄이 들어 다 말라죽을 정도겠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하늘나라의 물은 마르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보면 이 우기는 이벤트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 '우기'는 3일 내내 그치지 않고 비가 오지만 지상세계의 장마와는 달랐다. 회색빛 하늘이 아니라 평소와 같은 하늘에서 약간 어두워진 게 다였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비'가 은색으로 빛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밤에는 빗줄기를 따라 주변이 아름답게 빛나는 절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너무 밝지도 않은, 은은하게 빛나는 우기의 밤.


"이번에는 마음놓고 제대로 즐길 수 있겠군."

백건이 중얼거렸다. 사신일때는 꼭 이 시기만 되면 바빠져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었는데, 물러나니까 편하네. 백건의 말을 들으며 은찬이 멍하니 첫 번째 우기를 생각했다.


5.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청량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비였다. 은찬이 두 손을 모아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받았다. 양손 안에 환하게 차오르는 게 비가 아니라 빛처럼 느껴졌다. 와, 진짜 예쁘다. 말로만 들었던 우기를 실제로 보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은찬이 저 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청가람은 저와 같이 감탄에 젖은 눈으로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낮이라 그런지 빗줄기의 빛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곧 다가올 밤에 나오면 확연히 보일 것이었다. 은찬이 가람에게 다가갔다.


"정말 신기하다, 비에서 빛이 나."

"그러게..."



가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은찬이 멍하니 서 있는 가람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청가람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중앙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시기에도, 비만 오면 짜증도 덜 부리고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맨몸으로 비를 한가득 맞는 모습도 은찬은 종종 보곤 했었다. 주은찬은 하늘나라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말에 가람이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은찬이 가람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거 밤에 보면 정말 예쁘겠다."

온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정말 장관일 것 같은데.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아. 은찬이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응?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 손끝으로 저 멀리 구름에 반쯤 휩싸인 산을 가리켰다. 저기서 보면 하늘나라 전체가 다 내려다보이겠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전체가 다 은은하게 빛나겠지. 마치 빛에 둘러싸인 느낌일 거야. 가람이 은찬이 가리킨 산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저기 가자."

"어?"

"저기 같이 가서, 같이 내려다보자고. 이 우기때."



단 둘이서만. 은찬이 싱긋 웃었다. 빛나는 세상에서 빛나는 너랑 같이 있으면 기분 최고일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가람이 눈을 끔벅끔벅거리며 은찬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좋아, 가자.


그렇게 말은 했었지만, 당장 그 날부터 업무에 시달려서 산에 가보기는 커녕 우기의 밤조차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주욱. 빛나는 밤과 빛나는 너를 언제쯤이면 볼 수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



6.


​가람이 바위 위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며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나라를 내려다보았다. 우기의 마지막 밤이었다. 우기의 밤은 절경 중의 절경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신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구경하는 건 매우 힘들었다. 평소에는 조금 쉬엄쉬엄 해도 되는데, 꼭 이 시기만 되면 이상하게 업무가 쏟아져들어왔다. 그래서 가람은 무슨 음모가 있는게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면 대충 미뤄놓고 구경하러 나갔을 텐데, 잠시라도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엄청난 차질이 빚어지고 그 엄청난 차질들은 자신이 처리할 일과 직결되는 문제들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해치웠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청룡궁에서 잠깐 내다보았던 우기의 밤마저 미칠 듯이 아름다웠어서, 사신일이 끝나면 꼭 해야할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우기를 온전히 3일 내내 즐기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오늘만 지나면 끝이지만.

"아쉽다.."

가람이 중얼거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려면 앞으로 10년을 기다려야 된다니. 하루만 더 오면 좋겠는데. 고요한 산에서 빗소리를 음악삼아 들으며 조용히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첫 번째 우기때 주은찬이 절 보며 같이 가서 하늘나라를 내려다보자고 말했던 곳. 가람은 지금 그 산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주은찬은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가람은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일 높은 이 산에 올라가서 구경하면 분명히 빛에 둘러쌓인 느낌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은 꼭 들어맞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세계. 하지만 마냥 기분이 들뜨지만은 못했다. 자신이 왜 여기 혼자 있는가를 생각해보니 그랬다.

여자랑 놀고 있던 주은찬을 본 후, 청룡궁으로 도피한 자신을 찾아온 그 녀석. 사과해주길 바랐지만, 그 날도 똑같이 키스로 무마하려는 주은찬에게 폭발적으로 화가 치밀어서 앞뒤 잴 것도 없이 날카롭게 말을 쏘아붙이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따지고보면 별 거 아니었다. 그냥 조금만 대화를 나누면 끝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 때는 몸이 힘들어서 그런 사소한 것 하나에 폭발했던 것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나도 치졸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굽히고 들어가기는 싫었다. 주은찬이 잘못한 건 잘못한거니까.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람이 괜히 다리를 다시 흔들었다. 사실 3일 내내 이 산에 줄곧 있으면서 동화와도 같이 주은찬이 자신을 찾아와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가람은 이미 알아차린 채였다. 분명히 주은찬은 지가 이런 말을 했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바보같이 그자식 말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자기가 더 멍청하지. 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는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누구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가람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더불어서 머릿속도 복잡해져갔다. 나만 이렇게까지 매달리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부터 자신을 끌어안았다. 발을 흔들거리던 가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은 없었다. 말은 없었지만, 가람은 자신을 끌어안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은찬이었다. 천하의 멍청이가 드디어 자신을 찾아낸 것이었다. 한참 후에야, 주은찬이 고개를 떼었는지 머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숨소리를 제외하고 어떠한 것도 오가지 앉았다.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은찬이 입을 떼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가람은 은찬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은찬이 가람을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 천천히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람아,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네 마음은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내 방식으로만 밀어붙이기에 급급했어. 조근조근한 주은찬의 목소리 뒤에 잔잔한 빗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어쩌면 사과하면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걸지도 몰라. 웃기지? 그게 뭐라고. 사과하는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네가 더 상처받고 힘든데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정말 보잘것없더라, 나. 네 말대로 난 개자식인가봐.

"정말 미안해, 가람아."

가람이 고개를 돌려 주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얼굴에서부터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가람이 다시 은찬을 바라보았다. 비를 맞은 주은찬은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세상에서도 빛나는 주은찬. 가람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했던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꺼냈다. 이리 앉아. 가람이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 앉아, 네 사과를 받아주겠다는 가람의 표시였다.

은찬이 가람을 안았던 팔을 풀고, 얌전히 가람의 옆에 가서 앉았다. 둘 사이에 있던 벽은 사라진 채였다. 3일 내내 봤는데도, 질리지 않더라. 언제 싸웠냐는 듯 가람이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청룡 때는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왜 그 시기만 일이 많았던 건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어. 맞아, 나도 정말 모르겠어. 은찬이 맞장구를 쳤다.

가람이 흘깃 은찬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기분이 좋았다. 예쁜 풍경에 좋아하는 내 사람 하나. 부러울 게 하나 없었다. 가람이 먼저 손을 움직여 은찬의 손을 잡았다. 자기가 한 일이 있는지라 스킨쉽은 하지 않은 채 앞만을 보고 있던 은찬이 커진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이 그 눈을 바라보곤 틱틱거렸다. 봐 준 거야, 내가.

평소대로 돌아온 청가람의 목소리다. 아 어떡하지, 예뻐 죽겠다. 가람아, 내가 말했었나? 은찬이 가람에게 말했다.


"이 빛나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아름답게 빛나."


 

가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 손을 잡은 가람의 손에 힘이 좀 더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빛나는 세상에서 빛나는 너랑 같이 있어서 기분 최고야, 하며 중얼거리는 청가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은찬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최고다.